“여기 물냉면 두 개요!”

“네.”

기영이 큰 소리로 외치자 메아리처럼 대답이 돌아왔다.

“더 맛있는 거 먹지 그랬어.”

기영이 마주 앉은 진호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너무 비싼 거 먹으면 네가 다음에 안 사줄 거 아냐, 원래 이런 게 다 불경기를 살아가는 지혜야.”

“흠, 하긴 경기가 어렵긴 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하는지.”

“그래도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설마 이 큰 나라가 어떻게 되기야 하겠어?”

“그렇게만 생각하면 좋지만, 워낙 다들 힘들잖아.”

“그나저나 네 기획 안이 채택되었으니 잘하면 승진할지도 모르겠네?”

“음, 결과를 봐야겠지? 대박만 나준다면야, 승진은 바라지도 않을 텐데.”

“근데, 정말 혜린씨가 지도대국 해준다고 하니까 통과시킨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어쩌다가 타이밍이 그렇게 된 거겠지.”

“혜린씨가 뭐래? 흔쾌히 하겠다고 해?”

“응. 처음엔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괜찮겠다고 하던데?”

“그래서 언제 두기로 한 거야?”

“내일 저녁에.”

“내일? 어디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던데, 바둑을 어디서 두는지는 잘 모르겠어.”

“저녁은 팀장이 사겠지?”

“그렇지 않을까?”

“혹시 팀장이 혜린씨한테 반하면 어떡하냐?”

“이미 늦었지 뭐.”

“오, 자신만만한데?”

“사실 팀장이 자기 팀원 여자친구를 좋아하기야 하겠어?”

“하긴, 그럴 리는 없겠지.”

“물냉면 두 개요.”

때마침 커다란 쟁반에 큼지막한 얼음이 동동 떠있는 물냉면 두 그릇을 가져온 아주머니가 냉면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그들의 대화를 중단 시켰다.

“와 맛있겠다. 잘 먹을게 친구,”

냉면을 본 진호가 겨자와 식초 통을 끌어오며 말했다.

“응, 많이 먹어.”

기영도 먹음직스러운 냉면을 보자 입 안에 절로 군침이 도는 것을 느끼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혜린아!”

회사 건물 정문 앞에 서있던 기영이 멀리서 다가오는 혜린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기영을 발견한 혜린도 손을 흔들며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에게 다가왔다.

“오늘따라 더 예쁘네. 신경 좀 쓴 거야?”

혜린이 다가오자 기영이 사뭇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녀는 시합이나 결혼식 같은 행사가 아니면 편안한 캐주얼 차림을 즐겨 입었지만 오늘은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흰색 민소매 블라우스에 베이지색의 스커트를 입고 발이 불편하다며 잘 안 신던 구두까지 신고 온 것이었다.

혜린은 그가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발견해준 것이 기쁘면서도 그의 체면을 생각해 차려 입고 온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서운했다.

“팀장님은?”

그녀가 자연스럽게 화재를 돌리며 기영에게 물었다.

“식당에 먼저 간다고 했어, 우리도 가자.”

기영이 자연스럽게 혜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쪽입니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조용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일식 집이었다.

넓은 홀에는 여느 식당에서 볼 수 있는 짙은 호두나무 빛 테이블과 의자들이 있었으나 종업원이 그 곳을 지나쳐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한 다다미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종업원이 문을 열자 일본풍의 인테리어와 장식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있던 팀장이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정지훈이라고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팀장이 방안으로 들어서는 혜린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혜린도 흠칫 놀란 기색을 감추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녀는 팀장이라고 하여 나이는 한 40대에 전형적인 간부 스타일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자신의 소개를 하는 이 남자는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진 젊고 매력적인 엘리트였다.

게다가 단정한 정장차림이 너무 잘 어울려 왠지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아름다우시네요. 아, 여기 제 명함입니다.”

팀장이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며 말했다.

“예……”

예기치 못한 칭찬에 당황한 혜린이 어색하게 명함을 받아 들며 말했다.

“저도 명함 하나 받을 수 있을까요?”

팀장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네, 그럼요. 여기 있어요.”

그녀가 핸드백에서 황급히 꺼낸 명함을 내밀며 답했다.

“앉으시죠.”

그녀의 명함을 받은 팀장이 혜린과 기영을 보며 말했다.

“제가 사범님이라고 불러야 맞겠지만,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혜린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그럼, 혜린씨도 팀장님 말고 제 이름으로 불러주시겠어요? 여기는 회사도 아닌데, 조금 쑥스럽네요.”

“네, 그럴 게요.”

혜린이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지훈의 자상한 태도에 어느 정도 편안함을 되찾은 듯 보였다.

한편 기영은 옆에 앉아 묵묵히 저녁만 먹고 있을 뿐이었다.

음식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 그에겐 음식의 맛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초조해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꾸만 고개를 드는 이상한 불안감을 지울 길이 없었다.

“요즘 바둑계는 어때요? 경제가 어려워서 타격이 좀 있지 않나요?”

지훈이 기영은 안중에도 없는 듯 혜린을 보며 물었다.

“말도 못해요. 아무래도 바둑은 스폰서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스폰서들이 어렵다 보니 기전 유치가 어려워지고 있어요.”

“그럴 것 같았어요. 스폰서 없이 하는 자체적인 사업은 없나요?”

“없는 건 아니지만 아주 미미하다고 봐야죠. 사실 프로 기전이 없다면 프로 기사라는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혜린이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24만 7500원입니다.”

계산대 앞을 지나가던 혜린의 귀에 계산대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쌀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충격적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경제가 어렵다며 힘들다고 맞장구 치던 지훈이 태연한 표정으로 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식사는 잘 하셨나요?”

문 앞에 어색하게 서있는 혜린과 기영에게 식당의 매니저가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네.”

혜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기영은 짧게 대답하였다.

“저, 괜찮으시다면 제 집이 바로 이 근처인데 거기로 모셔도 될까요? 제가 좋은 바둑판과 알을 갖고 있거든요.”

계산을 마친 지훈이 그들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네, 괜찮아요.”

살짝 기영의 표정을 살핀 혜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팀장님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영이 지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혜린이 따라서 인사했다.

“아닙니다, 덕분에 저도 즐거웠어요.”

지훈이 회사에선 볼 수 없는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여기서 댁까진 얼마나 걸리나요?”

혜린이 지훈을 보며 물었다.

“글쎄요, 한 5분에서 10분?”

“정말 가깝네요.”

“네. 혼자 살다 보니 회사 가까운 곳에 오피스텔을 얻어서 살고 있어요.”

“네.”

혜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가실까요?”

“네.”

지훈과 혜린이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어가자 기영이 질세라 혜린의 옆으로 붙었다.

“여기에요. 먼저 들어가세요.”

지훈이 번호 키를 누르고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그의 집은 크고 화려한 오피스텔 건물 1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화이트 톤으로 통일 된 깔끔한 가구들과 현대적인 느낌의 인테리어, 고급스러운 가전제품들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었다.

게다가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먼지 하나 보이지 않게 깔끔했다.

“여기 사시는 거 맞아요? 집이 너무 깨끗한데요.”

혜린이 놀라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맞아요. 제 방은 조금 지저분하긴 한데, 거긴 안 보여드려도 되겠죠?”

지훈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아 저기 바둑판이 있네요.”

혜린이 거실 한쪽 구석에 있는 바둑판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외쳤다.

“네, 보시겠어요?”

지훈이 바둑판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며 말했다.

그리고는 바둑판과 알을 거실 중앙 쪽으로 옮겨 놓았다.

“커피 드시겠어요?”

지훈이 혜린과 기영을 보며 말했다.

“네, 좋아요.”

“저도.”

혜린이 대답하자 기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3점으로 배워볼게요.”

지훈이 흑돌 3개를 바둑판 위에 올리며 말했다.

“바둑을 꽤 오래하셨나 봐요.”

“LA에서 배웠어요. 아버지도 바둑을 좋아하셨구요. 사실 이 바둑판하고 알, 아버지 유품이에요.”

지훈이 부드럽게 바둑판을 쓰다듬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럼 잘 배우겠습니다.”

지훈이 씩씩하게 인사하자 혜린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기영은 혜린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조용히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혜린이 먼저 첫 수를 우하귀 소목에 두었다.

영롱한 빛의 하얀 조개알이 바둑판에 닿자 맑고 청명한 소리가 났다.

“저…이거 비자나무 인가요?”

혜린이 첫 수부터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지훈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맞아요.”

지훈이 알아봐줘서 기쁘다는 듯 미소 지으며 답했다.

“비자나무?”
옆에 있던 기영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바둑판을 만들 때 쓰는 나무 중에서 가장 귀한 나무야. 가장 탄력 있고, 나무의 결도 아름다운 데다가 바둑알을 놓을 때의 소리가 아름답거든.”

혜린이 말했다.

“그렇구나……”

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이가 좀 많이 나죠? 여기까지 배울게요.”

지훈이 허리를 피며 말했다.

“네, 조금 차이가 나네요.”

혜린이 웃으며 말했다.

“자세한 복기까지 받고 싶지만, 시간이 늦어서 가시는 게 좋겠죠?”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그럼 간단하게 여기만 말씀 드릴게요.”

“아, 거기서 제가 많이 손해 봤죠?”

“네, 맞아요. 여기서 이곳을 받지 말고 이쪽을 받는 게 정수였어요.”

“여기 수 안 나나요?”

“네, 백이 이렇게 들어가도 여기를 이어 놓으면 되거든요.”

“아! 그렇구나, 정말 그렇네요.”

지훈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무릎 위쪽을 탁 치면서 말했다.

기영은 바둑에 푹 빠진 팀장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호감을 느꼈지만 그와 즐겁게 얘기하는 혜린을 보며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였다.

“혜린아 이제 가야 하지 않겠어?”

기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혜린의 귀에 속삭였다.

“아, 이제 가보셔야죠. 돌은 제가 치우겠습니다.”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네. 이제 슬슬 가봐야겠어요.”

혜린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건 별 것 아니지만 제 선물입니다.”

지훈이 어디선가 들고 온 작은 종이 백을 내밀며 말했다.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혜린이 두 손으로 종이 백을 받으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지훈이 혜린과 기영을 현관문까지 배웅해주며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혜린과 기영이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좋은 사람 같더라.”

혜린이 기영을 보며 말했다.

“응……”

기영이 괜히 딴 곳을 보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오빠 우리 이거 풀어 볼까?”

혜린이 종이 백을 들며 말했다.

“응.”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았다.

종이 백 안에는 반짝이는 포장지로 쌓인 작은 책 크기의 상자가 들어있었다.

“뭘까?”

혜린이 포장을 뜯어보니 아담한 사이즈의 다이어리가 나왔다.

무난한 검정색 가죽에 반짝이는 큐빅으로 나비 모양의 로고가 박혀있었고 다이어리 안에는 작은 크기의 펜과 각종 스티커, 봉투 등이 덤으로 들어있었다.

“이건 뭐야?”

혜린이 온갖 작고 귀여운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기영이 한 봉투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가 열어보니 10만원권 수표가 두 장 들어 있었다.

“여기 돈도 있는데?”

기영이 봉투를 혜린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래?”

“20만원이면 조금 많은 거 아니야?”

기영이 혜린을 보며 말했다.

“그게……정말 여유 있는 분들은 그만큼씩 주시기도 하지만, 이렇게 저녁에 선물에 지도료까지……좀 많은데?”

혜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기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닐 거야.”

혜린이 걱정하는 기색을 비치자 기영이 얼른 목소리를 바꾸며 말했다.

“응, 아까 보니까 바둑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더라구, 그래서 그런 거겠지.”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기영은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팀장의 얘기를 하며 환하게 웃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그는 그녀를 집 앞까지 배웅해주며 온갖 상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저기, 나 커피 한 잔만 끓여주면 안돼?”

혜린의 집 앞에서 기영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늦었잖아. 다음에 해줄게.”

혜린이 다가오는 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

“정말 안돼?”

기영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안돼.”

그녀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잘 쉬어.”

기영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응. 오빠도 잘 쉬고, 내일 모레 우리 수업하는 거 맞지?”

“토요일? 응, 맞아. 그럼 그때 봐.”

혜린이 손을 흔들자 기영도 손을 흔들었다.

“먼저 들어가.”

기영이 말하자 혜린이 먼저 들어갔다.

아무 생각 없던 오렌지 빛 가로등이 그날따라 처량하게 느껴지는 건 왜였을까.

그는 복잡해진 머릿 속을 정리하며 쓸쓸히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