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린아,”

끙끙대며 맥 문제를 풀던 기영이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혜린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응?”

혜린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며 답했다.

“오늘은 그만 하면 안될까?”

“안돼.”

기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혜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휴……”

기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소용 없어.”

혜린이 책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오늘은 조금 머리도 아프고. 문제가 안 풀리는 것 같아.”

“오빠 숙제도 다 안 해왔잖아.”

혜린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책을 덮으며 기영에게 말했다.

“이번엔 다 해볼게.”

“내가 숙제를 많이 내주는 것도 아닌데, 매번 이렇게 안 해오잖아. 말로는 다 해오겠다고 하면서.”

그녀가 서운하다는 듯 투덜대며 말했다.

“그러게……”

“오빠 예전엔 숙제로 안 내줘도 많이 풀어와서 나한테 채점해 달라고 그랬었잖아.”

“응……”

“오빠, 혹시 바둑 재미 없어졌어?”

혜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기영을 보며 물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혹시 이게 너무 어려워?”

“아니……조금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풀 수는 있어.”

“이번엔 오빠가 정말 머리가 아프고 안 풀려서 그런다고 해도, 요즘 들어서 계속 이런 식이었잖아. 숙제도 언제부터인가 안 해오기 시작하고. 공부하는 시간도 자꾸 줄어들고.”

“응……”

“오빠 혹시 무슨 고민 있어?”

“무슨 고민?”

“바둑에 관한 고민? 누가 오빠보고 바둑 배우지 말래?”

“아니, 그럴 리가 있겠어.”

기영이 깜짝 놀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빨리 말해봐. 오빠가 얘기해 줘야 내가 알지. 바둑에 있어서 만큼은 내가 오빠 선생님이잖아.”

“사실은……음……그냥 바둑 공부하는 게 좀 답답한 것 같아.”

“답답해?”

“응…...그게, 난 잘 모르지만, 바둑 한 판을 이기려면 처음 정석, 포석부터 시작해서 온갖 행마들과 수읽기가 필요한 중반전을 거쳐 끝내기까지, 이 모든 것을 다 해야 하잖아. 그러면서 또 중간에 난관이 얼마나 많아.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음, 그렇지.”

혜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과정 중에 단 한 부분을 잘 두기 위해서 이렇게 공부를 하는데, 그나마도 바둑에 나올지 안 나올지, 혹은 언제 나올지 모르잖아. 또 똑같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는 모양이 똑같아도 비어있는 공배에 따라서 맥점이 달라지기도 하고.”

기영이 그녀 앞에서 바둑 얘기를 하는 것이 무안했는지 테이블 위의 커피 잔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오빠 말은 바둑 공부가 너무 막연하다는 뜻이지? 아무리 공부해도 바둑 한 판을 이기기에는 부족하고,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음, 비슷해. 물론 꾸준히 열심히 하면 되겠지만, 뭔가 앞에 목표물이 보이고 내가 지나온 길이 보여야지 계속 나갈 용기도 얻는 거잖아. 그런데 이건 꼭 망망대해를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야. 앞에 보이는 광경도 똑같고, 뒤를 돌아봐도 계속 똑같아.”

“맞아, 보통은 바둑 학원에서 실력이 비슷한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며 배우는 것이 자연스럽지……오빠 혼자 공부하기엔 답답한 점이 많을 거야.”

혜린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바둑 학원에 가겠다는 뜻은 아냐…어린 아이들하고 같이 배우는 건 왠지 안 내켜.”

“그럼 기원에 가보는 건 어때?”

“전에 말했듯이, 분위기가 너무 불편해. 어울리기도 어렵고 혼자 있기는 무안하고. 또 담배도 안 피우다 보니까 그런 것도 신경 쓰이고……”

“하긴……”

“가끔은 내가 바둑을 배우는 게 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질 것 같고, 꼭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바둑을 잘 두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거야?”

“응. 바둑이 늘어서 너랑 바둑에 관해 더 깊은 대화도 나눠보고 싶고, 무엇보다 너의 세계를 더 알고 싶어.”

“만약, 내가 아니라면? 내가 없다면, 그래도 바둑을 잘 두고 싶어?”

“그건……”

“바둑 두는 거 재미있지 않아? 오빠가 그랬잖아. 바둑을 두고 있으면 다른 일은 모두 잊게 되고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고, 바둑을 배우고 나서 독특한 아이디어도 생각하게 되고 회사 일도 더 잘되는 것 같다고 했잖아.”

“그건 사실이었어. 바둑을 두면 시간이 참 빨리 갔고 생각하는 자체가 즐거웠어, 또 자연스럽게 모든 일을 여러 각도로 보게 되었고, 당연히 안 될 것처럼 보여도 한번 더 보고, 안전하게 보여도 한번 더 생각했어. 바둑을 두면서……배운 거지.”

“바둑을 잘 두게 되면 오빠가 말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들을 얻게 될 거야. 말로 해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 바둑 공부가 힘들고 막연하다는 건 알지만 더 노력해 보면 어때? 오빠에겐 옆에서 도와주는 내가 있잖아.”

“나도 바둑을 잘 두고 싶어, 이 안엔 뭔가 신비로운 게 있는 것 같고, 깊은 변화와 고요하면서도 역동적인 분위기가 있는 걸 느낄 수 있어. 하지만 세상엔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게 있잖아.”

“이건 오빠가 절대 얻지 못할 그런 게 아니야, 물론, 프로기사, 아니 아마추어 강자만큼 잘 두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오빤 아직도 바둑이 늘 수 있는 여지가 많아. 내가 프로의 눈으로 봤을 때, 오빠는 가능성이 많은 학생이야.”

“그럼, 계속 이렇게 아주 조금씩 나아가면, 언젠가는 도착할까?”

“응. 나만 따라오는 거야. 무리하지 말고,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움직이는 거야. 마라톤 풀 코스보다 훨씬 긴 달리기라 생각하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 돼.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라잖아.”

“응. 다시 한번 힘을 내볼게.”

“포기하지 않으면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잖아. 오빠 파이팅!”

혜린이 기영의 앞에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 말도 있어?”

“몰라.”

천연덕스러운 그녀의 표정에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기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참, 전에 말했던 우리 회사 팀장 말이야, 혹시 기억 나?”

한바탕 웃음 뒤에 한결 밝아진 기영이 물었다.

“응, 기억 나. 오빠 못 살게 하는?”

“아, 내가 그랬나? 사실은 팀장님이 너한테 지도대국을 받고 싶다고 하던데?”

“지도대국?”

“응. 말로는 지도료도 내고 정식으로 배웠으면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 그거 안 하면 오빠가 곤란해 지는 거 아냐?”

“글쎄, 어쩌면 그럴 지도?”

“진짜?”

“나도 몰라. 그래도 너 하기 싫으면 하지마. 억지로 하는 거 싫어.”

“음......할래.”

“해?”

“응, 정식으로 배운다는데 나쁠 거 없겠지, 지도료도 낸다고 하고.”

“정말 괜찮은 거지?”

“응, 괜찮아. 근데 바둑 둘 때 오빠도 같이 가는 거지?”

“응. 같이 갈게.”

“그럼 오빠 맥 문제 풀던 거 마저 풀어. 난 책 좀 읽을게.”

혜린이 친절히 기영의 문제집을 펼쳐주며 말했다.

“응……”

기영은 혜린에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지만 혜린은 그런 기영을 못 보았는지 자신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결국 기영도 아무 말 못하고 문제집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번엔 왠지 문제들이 달라 보였다.

그를 약 올리며 웃고 있는 것 같았고 그를 지켜보며 시험하는 것 같았다.

또 그는 그들을 보며 이 정도는 금방 풀 수 있다고 큰 소리 치고 있었다.

연필을 들고 있는 그의 마음이 흥분으로 가득 찼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되돌아온 열정을 느끼며 침착하게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