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어디 있었던 것 같은데……”

기영이 다시 한번 골목을 돌아나오며 중얼거렸다.

그는 상왕십리역 근처에 한국기원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한 채 무작정 찾아 나섰다가 몇 번째 같은 골목을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혜린에게 전화를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회의 중일 것을 뻔히 알았기에 포기했다.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그가 도착한 곳은 다시 상왕십리역 앞이었다.

뭔가 실마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마침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려는 남학생 몇 명을 불러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학생!”

“네?”

“혹시 한국기원이 어딘지 알아?”

“한국기원이요?”

기영과 얘기하던 학생이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응. 한국기원.”

“여기서 쭉 가시다가요 사거리 나오면 우회전 하세요. 가다 보면 오른쪽에 보여요.”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켜주며 명쾌하게 설명했다.

“너 혹시 바둑기사니?”

기영은 어린 기사도 많다던 혜린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요, 연구생인데요.”

“아, 연구생이구나.”

“그럼 안녕히 가세요.”

낯선 사람이 자꾸 질문하는 것이 싫었는지 학생들은 얼른 고개를 꾸벅 하며 지하철 역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는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지쳐 보이는 애들을 붙잡고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길을 알아낸 것에 만족하며 씩씩하게 한국기원으로 향했다.

“드디어 왔구나”

정말 그 학생의 말대로 오다 보니 오른쪽에 낯익은 회색 빛 건물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능숙하게 핸들을 꺾으며 건물 옆으로 돌아 주차장을 찾았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건물 뒤쪽의 아담한 주차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한국기원 주차장의 낮은 언덕을 올라오자 주차장 중간쯤에 서있는 한 남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그의 차를 발견한 여자가 그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그녀가 혜린인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벌써 회의가 끝났는지 민우와 함께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차를 대충 세워놓은 뒤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오빠 안녕?”

지난 일은 다 잊었다는 듯 혜린이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만 환한 미소로 그녀의 인사에 답했다.

“오빠 이 쪽은 민우오빠야, 프로기사고. 저번에 한번 보긴 했지?”

혜린이 옆의 남자를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얼마 전 혜린의 집 앞에서 봤던 바로 그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김기영입니다.”

기영이 싹싹하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양민우입니다.”

민우가 가볍게 기영의 손을 잡으며 답했다.

“저번에는 너무 당황해서, 미처 인사 드리지 못했네요.”

기영이 말했다.

“아닙니다. 사실은 그 날 일을 얘기해 드리려고 기다렸어요. 혜린이가 괜찮다고 했지만 계속 마음에 걸려서요. 그 날 혜린이가 중요한 시합을 져서 다같이 위로한답시고 억지로 혜린이를 데려갔다가 나중에 제가 집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혹시 오해하실까 해서요.”

“아, 네.”

“혜린이랑은 워낙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남 같지 않아요. 혜린이 잘 부탁 드릴게요.”

민우가 웃으며 말했다.

“네.”

그의 태도에서 어떤 진심을 느낀 기영이 기분 좋게 대답했다.

자신이 오해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저희 저녁 먹으러 가는데 같이 가시죠.”

기영이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회의하는데 올라가봐야 해요. 아직 안 끝났거든요.”

민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래 오빠, 우리끼리 가자, 민우오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혜린이 자연스럽게 기영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좋으면서도 민우를 너무 편하게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 약간의 질투를 느꼈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혜린을 보며 웃고 있던 민우가 기영을 보며 말했다.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음에 봐”

“어, 오빠, 가서 회의 잘하고.”

혜린이 밝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는 작은 회색 문 뒤로 사라져가는 민우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또한 기영은 민우를 바라보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와, 오빠 이거 나 주려고 준비한 거야?”

혜린이 조수석 위에 놓인 장미꽃다발을 보며 한층 높아진 톤으로 물었다.

“응.”

기영이 쑥스러운 듯 괜히 먼 산을 쳐다 보며 답했다.

“오빠 너무 고마워.”

그녀가 감명 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그도 괜히 웃게 되고 마음이 붕 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게 선물하는 사람의 기쁨일까.

그는 언젠가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여자친구에게 이것 저것 선물하던 친구들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 근데 이거 웬 꽃이야? 나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혜린이 장미꽃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그에게 물었다.

“아냐, 그냥 별 뜻 없어. 우리 뭐 먹으러 갈까?”

왠지 쑥스러웠던 기영이 얼른 화제를 돌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음…오빠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가자! 신당동에, 거기 옆에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어.”

“떡볶이?”

뭔가 고급스럽고 비싼 음식을 얘기할 것으로 기대했던 그는 조금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응. 오빠 신당동에서 떡볶이 먹어봤어? 엄청 맛있는데.”

“아니, 아직. 소문은 많이 들었지.”

“정말? 그럼 빨리 가자. 오빠 거기 한번 꼭 가봐야 해.”

“그래, 그럼 가보자. 근데 어디로 가야 하지?”

“음, 아마도 저쪽?”

“확실한 거야?”

“아니, 그냥 느낌에. 길 잃으면 나도 몰라.”

혜린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한번 가보지 뭐. 길 잃으면 돌아가고. 참, 회의는 어땠어?”

기영이 시원하게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회의, 음, 그냥 평소 같았어.”

“평소 같다니?”

“글쎄, 다들 가까운데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까 회의라기 보다는 만남의 장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어떻게 보면 조금 산만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분위기가 좋은 거겠지?”

“응. 그럼 회의에 집중이 잘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런 면도 있어. 그리고 좋은 의견이 많이 나오긴 하는데, 문제는 항상 의견만 나오고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야.”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결론이 안 나면 어떻게 되는데?”

“보통은, 회의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 들어보고 나중에는 위원회를 하나 만들어서 거기서 결정하게끔 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아.”

“위원회는 어떻게 만드는데?”

“즉석에서 추천도 하고 투표도 해서. 어떨 때는 그거 하다가 시간이 한참 지날 때도 있어.”

“오늘 중간에 나와도 괜찮은 거였어?”

기영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응, 프로기사가 몇 명인데, 나 하나 없어도 별로 티 안나. 물론 이런 태도는 좋지 않지만, 원래 프로들은 데이트라고 하면 뭐든지 용서해 주는 관례가 있거든.”

“정말?”

“그럼, 물론 진심 반 장난 반이긴 해.”

“재미있네.”

“응, 오빠도 보면 훨씬 재미있을 텐데! 어, 그런데 거의 다 왔네? 어떻게 찾아왔어?”

“내가 누군데, 눈치로 잘 찾아왔지.”

“아까 내가 알려준 길 맞았어?”

“글쎄 돌아왔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잘 찾아온걸 보면 영 반대 방향은 아니었나 봐.”

“뭐?”

어이없어 하는 혜린을 보며 그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본 떡볶이 골목에서는 저마다 호객행위를 하기 위해 슬슬 가게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맛깔스러운 떡볶이 향기가 흐르는 정겨운 골목이 그들의 눈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기영은 혜린의 손을 꼭 잡으며 괜찮은 식당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