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40분,

출근 시간을 살짝 비껴난 지하철 안은 조용하고 한산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을 한 혜린은 여기저기 보이는 빈 자리를 마다한 채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시선은 창 밖을 향하고 있었지만 보이는 것은 어두운 벽과 흐릿하게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뿐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혜린은 시합을 두기 위해 한국기원에 가는 길이었다.

 이번 시합은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세계 대회에 참가할 한국 대표 선수를 뽑는 선발전이기도 했지만, 공교롭게도 상대가 그녀와 절친한 다연이었기 때문이다.

 다연은 그녀와 둘도 없는 친한 사이면서도 같은 프로기사로서는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그들은 이 승부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런 경쟁에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시합에서 마주칠 때와 친구로서 마주칠 때, 마치 다른 사람을 보듯 하는 것이 어색하고 이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런 상황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졌다.

 언뜻 스쳐 지나가는 방송소리가 그녀가 내려야 할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혜린은 침착한 표정으로 지하철에서 내렸고, 늘 그래왔듯이 한 걸음 한 걸음 한국기원을 향해 나아갔다.

“안녕하세요?”

혜린이 한국기원에 들어서며 그녀를 바라보는 경비원을 향해 싹싹하게 인사를 건넸다.

2차선으로 된 작은 도로변에 나있는 정문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갖가지 바둑용품과 서적을 파는 판매점, 오른쪽에는 경비원의 작은 보금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는 널따란 계단이 자리하고 있고 계단 옆으로 난 왼쪽 통로에는 -얼마 전 새로 리모델링 하여 무척 좋아진- 바둑TV 스튜디오가 있었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외관은 허름하고 깔끔하지 못하지만 내부는 최근에 새로 한 페인트 칠 덕분에 깨끗하고 좋아보였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중간 중간 볼거리가 있는데, -한국 바둑의 응씨배 석권, 백두산 천지대국 등- 바둑계의 역사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들이 간단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2층엔 넓은 대국장과 작은 휴게실이 있어서, 많은 프로기사들이 동시에 대국을 펼치게 되는 예선전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래서 큰 시합이 있는 날이면 이 곳이 만남의 장이 되어 북적거리고는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늘어나는 프로기사 수를 감당하지 못해 전체기사가 참가하는 메이저 대회의 경우, 예선전을 반으로 나눠 각각 다른 날 열린다.  

그리고 계속해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한국기원 직원들이 근무하는 사무국이 나온다.

예전에는 이 곳이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보안을 위해 지문 인식기를 설치하여 들어가기가 어려워졌다.

한국기원이 국내 바둑계의 전반적인 일을 다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철저한 보안이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무국까지 오느라 힘들었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서 계단을 올라가면 드디어 4층에 도착하는데, 이 곳에 오늘 혜린의 대국이 펼쳐지는 본선 대국실을 포함해서 결승전을 위한 특별 대국실, 프로기사들을 위한 기사실과 한국 여성 바둑계의 총본산인 여성연맹 본부, 그리고 대한 바둑협회 사무실 등이 있었다.

중앙에는 조금 낡았지만 그래도 푹신한 검정 가죽 소파가 작고 아담한 나무 테이블을 마주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키가 큰 괘종 시계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항상 그대로였다.

가끔씩 작은 변화들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혜린이 한국기원을 드나들었던 1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국기원은 그대로였다.

어쩌면 그 10여년간 혜린이 너무 달라져서 조금씩 바뀐 한국기원이 상대적으로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생각해보니 새로한 페인트칠에, 삐걱거리던 문이 새 것으로 교체되는 등 조금씩 더 좋아지긴 했다. 

하지만 혜린은 -욕심이란 것을 알지만- 어쩐지 뭔가 더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싶었다.

본선 대국실은 작고 아담했다.

대국자를 위한 편안한 의자와 기다란 바둑판 테이블이 주를 이루었고, 기록자를 위한 책상, 옷걸이, 신발장 등이 가구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 곳엔 한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벽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유리창이었다.

해가 뜨는 날이면 어김 없이 창문을 통해 따뜻한 햇살이 방 안 가득 들어 왔는데, 조용하고 살벌한 분위기와 묘하게 섞이면서 표현할 수 없는 엄숙함이 묻어 나오는 것이었다.

바둑에 집중하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만약 대포가 터지는 듯한 소리로 간간이 놀래켜 주시는 뻥튀기 아저씨가 없었다면 말이다.

‘이번엔 질 수 없어.’

혜린은 침착하게 다시 한번 되뇌며 본선 대국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여느 때처럼 햇빛이 대국장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으며 기록을 하기 위해 온 학생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혜린을 발견한 학생들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자 혜린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연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혜린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3달 전쯤 두었던 다연과의 마지막 대국을 떠올렸다.

여류국수전 결승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고, 그녀와 다연은 필사적이었다.

바둑은 치열했고 대국이 시작된 지 7시간이 지나도록 형세는 오리무중 이었다.

하지만 초읽기 와중에 혜린이 실수를 했고 결국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다연이 귀중한 승리를 가져갔다.

“안녕? 일찍 왔네.”

 다연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겨있던 혜린을 깨웠다.

“응.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한동안 집 안이 많이 어지러웠는데 이제 드디어 자리가 좀 잡혀가는 것 같아.”

“그럼 이제 집들이 하는 거야?”

“해야지. 오빠 친구들 먼저 초대하고 그 다음에 다른 애들이랑 같이 초대할게.” 

“같이 하지 왜?”

“집이 그렇게 넓지가 못해서. 너무 많으면 음식 준비하기도 힘들고.”

“하긴 그렇겠구나. 결혼하니까 좋아?

“응. 아직까지는.”

“왜 '아직까지는' 이야?”

“그야, 앞 일은 모르는 거니까. 참, 기영씨랑은 만나봤어?”

“응, 인상도 좋고 성격도 좋은 것 같아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바둑은 열심히 해?"

"아직 수업을 두 번밖에 안 해서 잘 모르겠어. 그치만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것 같았어."

“다행이다. 오빠가 괜찮은 친구라고 해서 널 소개해 주긴 했지만 그 것 때문에 네가 불편할까봐 좀 망설였었거든.”

“응,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10시 다 됐네. 시작할까?”

“응.”

대국이 시작되자 화기애애 했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10시가 되자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듯 친구 사이에서 적으로 바뀐 것이다. 

마치 12시가 되면 신데렐라가 공주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얼마 후 커다란 렌즈가 장착된 -아주 무거워 보이는- 카메라를 가진 사진기자들 몇 명이 들어와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카메라 렌즈를 통하여 조용히 바라보다가 누군가가 바둑알을 집어 착수를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찍어 대고는 하였다.

 혜린은 항상 기자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하였지만 속으로는 항상 무안하면서도 쑥스러운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냥 이상하게 부담스러웠고 다른 일엔 익숙해져도 카메라 앞에서 익숙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국할 때만은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허용된 10분이 다 지나가고 나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 바둑에 집중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