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판의 바둑을 두는 데는 단계와 과정이 있어요.”
혜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계와 과정이요?”
기영이 되물었다.
어느덧 돌아온 토요일 오전, 둘은 저번처럼 카페에서 수업을 하는 대신에 청계천 공원에서 나란히 산책을 하고 있었다.
지영이 갑자기 차를 빌려가는 바람에 바둑판과 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기영과 혜린 모두 편한 옷차림으로 영락없는 대학생 커플처럼 보였다.
하늘은 깊고 시원한 것이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 같았고 바람이 하늘하늘 그들 주위를 맴돌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게다가 청계천의 물줄기는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려는 듯 부지런히 따라오고 있었고 저 멀리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도심 한복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여유 넘치는 곳이었다.
“네, 바둑은 자신의 돌을 하나씩 보태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거에요.”
“그건 집을 만든다는 건가요?”
“물론 집을 만드는 게 중요하죠.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아마 차차 알게 되실 거에요.”
“바둑은 정말 벗겨도 벗겨도 줄어들지 않는 양파 같은 거군요.”
“네, 어느 양파보다도 껍질이 많을 거에요.”
혜린이 웃으며 말했다.
기영은 혜린의 수수한 미소가 왠지 자신의 기분을 설레게 만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 판의 바둑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 데요. ‘초반’, ‘중반’, ‘종반’ 이라고 불러요."
혜린은 그런 기영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둑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다.
“네. 그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네, 바둑용어 중에는 한자와 관련된 것이 많죠. 혹시 수학의 정석 이라는 책 본적 있어요?”
“그럼요.”
“그럼 어떤 일을 추진하기 위한 포석을 시작하였다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어요?”
“있고 말고요.”
“정석이나 포석은 모두 바둑에서 유래된 용어에요. 둘 다 초반에 관련된 것인데, 정석은 한 부분에서 서로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수순을 두는 거고 포석은 전체에서 두어지는 수순을 말해요. 이 두 가지를 공부하다 보면 처음에 바둑을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있어요.”
"그렇군요."
"정석이나 포석을 모른다면, 처음에 어떻게 바둑을 두어나가야 할지 막막할 거에요."
“네......그런데요, 그럼 정석이 여러 개가 모여서 포석이 되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던 기영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혜린을 보며 물었다.
“음. 아주 비슷해요. 하지만 정석은 하나도 없이 포석이 이루어 질 때도 있으니 정확히 맞았다고 하기는 어렵겠네요.”
“네, 조금 어렵긴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요.”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요, 정석은 관습 같은 거에요."
"관습이요?"
"결혼식에 갈 때는 좋은 옷을 입고, 운전을 하다가 사소한 실수로 피해를 줬을 때는 손을 들어 사과하고......관습은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형태가 바뀌긴 하지만 결국 그 목적은 같잖아요?"
"그렇죠."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행동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지켜야 한다는 법이 없더라도 잘 지키죠. 정석은 법이 아니에요.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변화들이 모인 거죠. 오래된 관습은 바뀌거나 없어지듯 정석도 오래되면 없어지기도 하고 또 계속된 연구에 의해서 변하기도 해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흑백 쌍방간 최선을 다해서 이루어지는 결과들이죠. 우리는 그걸 꼭 따르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다고 굳이 반발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게 최선이라고 오랜 세월 동안 입증이 된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에요.”
“관습이라. 당연한 것은 아니지만 당연하게 느껴지고, 자연스럽게 변하기도 하고, 또 의심을 갖고 연구해 보면 나쁜 점은 발견하기 어렵다는 거군요.”
“네. 맞아요. 와, 제가 말하고도 '조금 어려운가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제 뜻을 정확히 파악하셨네요!"
혜린이 가볍게 손뼉을 맞딱뜨리며 말했다.
"제가 원래 눈치는 좀 빠르거든요."
기영이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원래 뛰어난 제자가 선생을 기쁘게 하는 법이죠."
혜린이 즐겁다는 듯 말했다.
"그럼 포석은 어떤 거에요?"
어느 새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기영이 물었다.
"포석은 바둑의 골격을 잡는 거에요. 그 바둑의 기초가 결정되는 거죠. 포석 단계에서 자신의 계획과 상대의 계획이 처음 충돌하게 되요."
"충돌이요?"
"네, 자신의 계획을 밀고나가는 것만큼 상대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그 때문에 포석에서 이미 보이지 않는 전투가 시작되는 거죠.”
“네...그리고 포석이 끝나면 중반으로 넘어가게 되는 건가요?”
"꼭 그렇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볼 수도 있어요."
"휴...바둑은 뭐 하나 명확한 게 없네요."
"그러게요, 저도 답답하답니다."
"혜린씨도요? 프로기사에게도 바둑이 어렵나요?"
"그럼요. 알면 알수록 더 어려운걸요."
"네......어쩐지 또 걱정이 되려고 하는데요."
“겁주려는 건 아니지만, 흔히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부르는데 들어본 적 있어요?”
“음, 못 들어 본 것 같아요.”
“아마 바둑을 접한 적이 없어서 그럴 거에요. 왜냐하면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다 한번은 들었을 법한 유명한 얘기거든요."
"인생의 축소판이라, 무슨 뜻이죠?"
"바둑을 인생에 비유한다면 초반은 학창 시절이 되겠죠? 열심히 공부해서 인생의 기반을 닦는 거에요. 앞으로의 진로도 그려보구요. 한가지 다른 점이라면, 바둑에서는 항상 출발점이 공평하다는 거죠."
"아하, 그렇다면 그 다음은요?"
"졸업해서 성인이 되면 열심히 일해서 돈 벌고, 연애해서 결혼도 하고, 많은 중요한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바둑에서의 중반도 비슷해요. 초반에 만들어둔 배경을 최대한 활용해 집을 만들고, 상대의 약한 돌을 공격해 이득을 보기도 하고요. 아주 다양하고도 많은 일들이 벌어지게 되죠."
"네......"
기영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들릴 듯 말 듯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말년이 되면 지금껏 살아왔던 인생을 정리하고, 결산하는 시간을 갖게 될 거에요. 마찬가지로 종반은 중반에서 벌어졌던 전투들을 수습하고 집들의 경계선을 정하고 한 판의 바둑을 결산하는 단계에요. 하지만 모든 것이 다 비슷하다고 해도 하나 확실히 다른 점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
"인생은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바둑은 결과만 남아요. 이겼는지 졌는지.”
혜린이 말을 끝내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듣고 있던 기영도 말을 한 혜린도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아, 이건 어쩌면 프로기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인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혜린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점이 있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기영이 입을 열었다.
“뭔데요?”
“인생은 단 한 번이지만, 바둑은 져도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네, 그게 정말 중요한 거였네요.”
혜린이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자 마침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기영과 눈이 마주쳤고, 둘은 어색한 듯 무안해 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 오늘 날씨 정말 좋네요!"
기영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혜린은 그런 기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상하게 이 남자와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왠지 이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어려서부터 승부의 세계에서 발버둥치며 살아온 그녀가 이런 편안함을 쫒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오빠 배 안 고프세요?”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혜린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 때가 다 되었네요. 시간이 참 빨리 갔죠?”
“네. 정말 그러네요.”
“혜린씨 혹시 오후에 바쁘세요?”
“아니요. 오늘은 한가해요.”
“그럼 식사 후에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요?”
“좋죠.”
혜린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의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모든 것이 다 그대로였지만, 딱 하나, 햇살만은 한결 따뜻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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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김55
메이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