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작가의 상상만으로 쓴 글이며, 실제 바둑 계 에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오니 독자님들은 이점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오로 묵시록 올림
학명은 오후 두 시 약속을 산 주가 펑크 내는 바람에 느닷없는 막막함에 잠시 동안이나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하기야 급작스런 집안의 상사를 치르러 원통근처 어느 산 골로 가 버린 산 주를 나무랄 수도 없고, 상가까지 찾아가 매매를 하자고 계약서를 들이 밀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예까지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언제 또 계약이 이루어 질지 기약이 없고…
학명은 부동산 직원에게 면 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다시 오마고 시간 약속을 당부 하였다. 부동산 직원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며 몇 번이고 사과를 하며 털털거리는 봉고로 산을 두 개나 넘어 면까지 학명을 태워다 주었다.
면의 거리는 조그마했고 조용한 편이었다. 그러나 식당, 다방, 술집 등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어 하룻밤 묵기에는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여관도 정갈한 편이어서 마음에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학명을 기분 좋게 만든 것은 여관 옆에 있는 기원이었다.
학명은 여관방에 조그만 가방 하나를 던져 두고는 부리나케 기원을 찾아 갔다.
판이 열 서너 개 정도…그나마 기원은 텅 비어 있었고, 로열석에서 서너 명의 기객이 잡담들을 하다가 학명이 들어오자 일제히 쳐다 보았다.
그 중 가장 세다는 기객과 두어 판을 두었는데 그는 석 점을 놓고도 학명에게 판을 짜지 못했다.
“ 우와, 정말 쎄시다….혹시 프로 아니십니까? “
대국을 한 사람과 관전을 한 사람들 모두가 학명의 강함에 감탄을 하며 더 이상 그에게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 이분과 조씨 아저씨하고 두면 어찌될까? 누가 더 쎌까? “
관전자중의 누군가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면기 정도라면 두어점은 놓아야 겠지…생각하며 학명은 씨익 웃었다.
“ 히힛, 조씨 아저씨, 양반은 못 되네…”
누군가가 기원문을 드윽 밀고 들어 왔다. 아마도 조씨 아저씨란 사람인 모양이다.
학명은 조씨라는 사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새카맣게 탄 얼굴, 반백의 머리, 야윈 몸, 삐쩍 큰 키….건강은
안 좋아 보였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_많이 늙었군…
조씨는 학명과 눈이 마주 친 순간 움칠하는 표정이었으나,
더 이상 내색하지 않으며 뚜벅뚜벅 걸어와 학명의 앞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듯 마주 보았다.
마치 헤비급의 복서들이 레프리가 뭐라고 주의를 주는 동안 서로를 노려 보며 눈싸움을 벌이듯 어쩌면 살기가 등등했다.
문득, 원장이 둘 사이에 나섰다.
“ 저어, 두 분이 호선을 하면 될 듯 싶은데요…”
학명이 백 돌을 한 웅큼 쥐어 판 위에 올려 놓자 조씨는 흑 돌 하나를 따악~ 하며 판 위에 찍었다.
돌을 가리니 조씨의 흑 번 이었다.
백의 소목에 흑 날일자 걸침, 백의 세칸 낮은 협공….
요즈음 프로들 사이에 자주 두어지고 있는 유행서반이다.
둘은 거의 노타임으로 대여섯 수를 좌악 진행 시킨다.
학명은 상대의 얼굴을 쓰윽 쳐다 보더니 씨익 웃었다.
_ 몸은 망가 졌는데, 바둑돌은 아직도 놓지 않고 있는가 보다…
관전자가 보기에는 누가 유리 한지도 모를 판인데,
중반 언저리에서 백이 흑 대마의 급소를 찌르자 흑이 모양을 갖추었고, 흑의 정비를 기다려 백이 급소를 찌른 점을 기점으로 흑 진영 깊숙이 눈 목자로 뛰어 들자… 한참을 고심하던 흑이
“ 없구먼…”
하고는 돌을 던졌다.
두 사람은 돌을 거둔 빈 판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며 말이 없었다.
“ 소주나 한잔 하세.”
먼저 조씨가 일어섰다.
학명이 따라 일어서자 관전자들이 모두 일어 섰다.
“ 오늘은 우리 둘만…”
조씨가 관전자들에게 양해를 구하자 그들은 모두 도로 앉았다.
근처 삼겹살 집에서 서로 부딪지도 않은 잔을 둘이 동시에 비웠을 때, 조씨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 학명형, 미안 하오…”
“ 뭘, 조형 난 벌써 잊은 일이오. “
그들은 말없이 술만 마셨다.
“ 미안 하오.”
한참 만에야 조씨가 같은 말을 또 했다.
“ 조형, 미안해 할 것 없소. 그리고 그건 오히려 잘 된 일이오.
그렇게 해서 내가 입단을 했다 한 들 그 업을 지고 어찌 프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겠소…
조형이나 나나 뭐 다 그리 될 운명이었던 것인 게지….”
삼 십 년도 훨씬 지난 이야기다.
그 해 가을 입단대회의 마지막 대국은 학명과 조씨의 대국이었다. 2패를 기록한 학명이 이기면 무조건 입단이고, 지면 마지막 한자리를 놓고 삼자동률이 발생한다.
조씨는 이기나 지나 이미 입단과는 멀어진 판국 이었고…
마지막 판 전날 밤에 학명의 친구라는 사나이가 조씨를 불러냈다.
두툼한 봉투를 내 놓으며 쇼부를 보자는 것이었다.
요컨데 내일 대국에서 져 달라는 것이었다.
조씨는 참담한 표정으로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말없이 봉투를 받아 넣었다.
마지막 대국…
학명은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대국을 하였다. 그런데 갈수록 판이 묘하게 꼬여 갔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형세로 흘러 가는 것이었다. 백을 잡은 학명은 흑의 진영으로 퐁당 뛰어 들었다.
살면 이긴다.
약속을 한 조씨가 살려 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흑 진에 뛰어든 백 말은 대마가 되도록 두 눈을 못 내고 몰사 하고 말았다.
학명은 거의 심적 공황상태가 되어 돌을 던졌고, 다음 날 부터 벌어진 삼자 동률 대국에서도 힘 한번 못써보며 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학명의 입단의 꿈은 이렇게 깨지고 말았으며, 그 후 그에게는 다시는 입단의 기회가 찾아 오지 않고 말았다.
학명의 친구들이 눈에 불을 키고 조씨를 찾았으나 조씨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다시는 그를 보았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학명은 그 사건으로 근 사 오 년을 악몽에 시달리며 못 잊어 했다.
그런 조씨를 삼 십 년도 훨씬 지나 오늘 사 우연히 기적처럼 만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미움과 한은 이미 잊혀져 버렸다.
그 만큼 세월이 많이 흘러가 버린 탓이었다.
“ 허허허, 조형… 이제 우린 그만 늙어 버렸군…”
“ 미안 하네…”
“ 그런데…조형, 건강은 어떠신가?”
“ 웅, 그저 그렇지 머…
조씨는 거친 손바닥으로 주름진 꺼먼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 조형, 난 술이 좀 약하거든… 이만 잠 좀 자야 겠네”
“ 그러게… 나도 이만 들어 가겠네…미안하네”
“ 이제 미안하다는 말 안 해도 되네, 나는 벌써 잊었는데 머, “
조씨는 약간 비틀대는 학명을 여관 방까지 부축해 주고는
거리로 나왔다.
마악 지는 석양에 그의 얼굴은 거의 검은 색으로 물들어 보였다.
“ 미안하네…”
그는 허공에 대고 또 같은 말을 혼자 뇌까렸다.
그날… 입단대회 마지막 날의 전야…
학명의 친구가 다녀간 후 또 한 사람이 조씨를 찾아 왔었다.
이건 학명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는 두툼한 봉투를 조씨에게 내어 놓으며 내일의 대국에서 최선을 다해 이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기면 다시 그 만큼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학명이 지면 삼자 동률이 되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양심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조씨는 그의 제의도 수락했다.
왜냐하면 조씨로서는 한 사람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그 것이 꼭 필요 했었기 때문이었다.
삼자 동률대국의 결과는 조씨에게 쇼부를 제의한 두 사람은 떨어지고 나머지 한 사람이 입단을 했다.
사필귀정이었다.
“ 미안 하네…”
조씨는 황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자꾸만 그 말만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