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로 이사 한다는 말에 민지는 환호성을 질렀다.

“엄마 정말이지. 정말 그 고급 아파트에서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거지.”

그녀는 딸이 왜 저렇게 좋아하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요즈음 어린이들에게는 사는 지역이나 집의 평수, 자동차의 크기가 계급이었다. 그동안 민지는 집에 친구들을 데려오지 않았다.

“엄마 돈 많구나.”

“아니야, 어떤 아저씨가 도와줬어.”

솔직한 그녀의 말에 딸이 시무룩하게 풀이 죽더니 그녀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럼 나 새 아빠랑 살아야 하는 거구나.”

“아니야. 그런 일은 없어. 하지만 가끔씩은 다녀갈 거야.”

“아, 다행이네. 그런데 그런 게 가능해? 돈이 무척 많은 아저씨구나. 그러면 아저씨가 두 집 살림하는 거야?”

딸의 질문에 그녀는 흠칫 놀랐다.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애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그 아저씨도 엄마처럼 혼자가 된 분이야. 자식도 없고.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해. 네가 뭘 안다고.”

“엄마 나도 다 컸어.”

“요런 꼬맹이가.”

붙잡으려는 엄마와 달아나는 딸의 웃음이 집안에 가득 퍼졌다. 하지만 그녀의 속은 막상 편치 않았다. 언제든 어떻게든 윤철이 알게 될 일이었고, 뒷일이 걱정이었다. 그렇지만 마성이 제시한 조건은 차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월세가 굳는 것도 좋았지만 딸에게 좋은 곳에서 살게 해주려는 욕심이 더 강했다.

‘그가 이해해주려나. 내가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녀의 속은 심란했다.

‘돈 많은 지가 안 해주니 이렇게 됐지.’

약간 심통도 생겼다. 딸을 재우고 그녀는 혼자 맥주를 마시다 잠이 들었다.

이사 하는 날.

말끔하고 스포티한 차림으로 그가 나타났다.

“안녕! 네가 민지구나. 만나서 반가워!”

마성은 민지에게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민지는 깜짝 놀라서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새침해지며 휙 달아났다.

“허허 거절당했네.”

약간 무안해 하는 그를 보며 정애가 웃으며 말했다.

“민지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네요.”

“아니야, 당신도 봤잖아. 나 완전히 까였어.”

그는 진짜 머쓱한 듯 뒤통수를 극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당신은 애가 없어서 애들 마음을 읽을 줄 몰라요. 특히 여자애들이 마음을 잘 숨겨요. 엄마인 내 눈에는 민지가 ‘어머, 이 아저씨 멋지다.’ 하고 놀라는 것이 보였는걸요.”

“아! 그런 거야. 그랬으면 정말 좋겠는데.”

“맞을 거예요. 그런데 왜 왔어요. 이삿짐센터에서 잘 알아서 할 텐데. 우리한테도 걸리적거리지만 말아달라고 하네요.”

“그래도 남자가 있는 게 나아요. 그리고 이런 기회에 민지하고도 안면을 터야지.”

“그렇기는 하네요.”

“이삿짐 아저씨들에게 인사 나누고 우리는 잠시 나갔다와요.”

“안 지켜봐도 될까?”

“그럼! 내가 미리 수고비를 드려 놓으면 더 신경 써주실 거야.”

“나가서 무엇을 하려고요.”

“민지 마음을 얻어야지. 선물도 사고 구경도 하고.”

“그래도 되려나. 그럼 당신 뜻대로 해요!”

세 사람은 시내에 있는 고급백화점으로 향했다.

“염려마시고 다녀오세요. 그게 우리를 도와주시는 겁니다.”

각자에게 몇 만원씩 돌아갈 만큼의 수고비를 받은 그들은 세 사람을 밖으로 내몰다시피 했다. 마성은 정애의 조언대로 민지가 좋아하는 것들을 쇼핑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엄마! 여기 봐. 대박이다.”

한껏 흥분한 딸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천천히 민지의 뒤를 따라갔다. 민지는 곧 따라잡혔다. 마음에 드는 물건에 시선이 박혀 있었다. 그렇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딸의 어깨를 당기려하자 그가 재빨리 만류했다.

“민지가 그게 맘에 드나보구나.”

“네! 그렇지만 사지는 않을 거예요.”

민지도 가격표를 본 것이다.

“아저씨가 민지에게 점수를 따고 싶은데.”

“그럼 이거 사도 돼요?”

눈이 동그래진 딸을 그녀가 눈짓으로 만류했다. 그렇지만 민지는 짐짓 못 본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간절한 눈빛이 그의 얼굴에 웃음기를 퍼지게 했다.

“물론이지. 아마 다른 것도 더 사도 될듯한데.”

“야호!”

주변의 사람들이 돌아볼 만큼 민지는 펄쩍 뛰며 좋아했다. 옆에서 무슨 말을 꺼내려는 그녀를 그는 손을 꼭 쥐어 제지시켰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숨을 폭 내쉬었다.

쇼핑을 마친 그들은 식당으로 향했다. 정애의 손에는 쇼핑봉투 몇 개가 들려있었다. 그녀가 잡고 있던 그의 손은 어느새 민지가 잡고 있었다. 무척 행복한 얼굴로 걷고 있는 그와 딸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마음에도 따뜻함이 차올랐다.

저녁까지 마치고 돌아온 아파트는 마치 외출했다 돌아온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입주청소까지 완벽하게 해줬어요. 마치 내가 살고 있던 집처럼 만들어 놓았네. 이것이 돈의 위력인 거죠.”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다행이네. 자기가 고생하지 않아서 내일 일하는데도 덜 힘들겠어.”

“오늘 종일 쉰 기분이에요. 이렇게 편하게 이사해보기는 정말 처음이네.”

세 사람은 홀가분하게 저녁 시간을 새 집에서 맞이했다.

“오늘 자고가지 않을래요?”

민지가 자기 방 구경한다고 들어간 사이 정애가 그에게 물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민지가 신경을 쓸까 염려되네.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가는 것이 맞겠어.”

그의 자상하고 깊은 마음에 그녀도 수긍해 주었다.

“내 몸이 자기의 손길을 원하지만, 오늘은 그럼 고이 그냥 보내드릴 게요.”

장난스레 말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는 민지의 방으로 향했다.

“민지야, 방이 마음에 들어?”

“네, 아저씨. 고맙습니다. 방도 집도 선물도 모두 다요.”

“내가 오늘 민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성공한 것 같네.”

“물론이죠. 아저씨 오늘 멋지고 완벽 했어요.”

민지는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거실로 나왔다.

“엄마, 아저씨랑 데이트 해. 나는 내 방으로 갈 테니.”

“아니야. 아저씨는 자기 집으로 가겠대. 네가 신경쓸까봐.”

“아저씨, 나는 괜찮아요.”

“아니야. 아저씨는 집에 가서 할 일이 따로 있어. 엄마랑 데이트 허락해줘서 고마워!”

“그럼 다음에는 우리 집에서 저녁 같이 먹고 자고 가야돼요.”

민지의 말에 정애의 얼굴은 빨개지고, 마성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성숙이 빠르대. 감당을 못하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현관으로 향하는 그의 뒤에서 그녀가 푸념을 했다.

“민지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됐었는데 무난한 듯하네.”

“무난 정도가 아닌데요. 나도 아직 껴보지 않은 자기 팔짱을 스스럼없이 끼는 거 봐. 대성공이야. 나도 그래서 무척 마음이 놓여요.”

“우리 모두에게 잘됐어. 잘 자요.”

“여러 가지로 고마워요. 다시 봐요.”

두 사람은 아쉬움을 포옹으로 대신했다.

그가 돌아간 뒤, 너른 거실에 혼자 앉은 채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집의 크기에 걸맞게 그가 새로 들여 놓은 TV가 혼자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던 친정집을 떠난 뒤 참으로 오랜만에 얻는 여유로운 공간과 편안한 마음이구나.’

철없던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이렇게 버겁고 고단한 것임을. 동정심인지 헛된 모성애인지 모를 것으로 인해 민지 아빠와 시작된 삶부터 그녀의 삶은 어긋나고 삐걱거렸다.

‘오죽 안타까웠으면 엄마와 오빠들이 나를 버리기까지 했을까.’

그동안 서운하기만 했던 친정에 대한 감정들이 여유로운 마음 탓인지 지금 이 순간은 넉넉하게 이해되었다.

그동안 부대끼는 삶을 지탱해준 것은 오로지 그녀의 강한 자존감 하나였다. 그 자존감으로 고등학생 시절부터 일기처럼 이어오고 있는 자신의 기록은 스스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정애의 역사서’

넘치는 자존감으로 붙인 파일의 제목처럼, 자신의 일상을 기록해나가는 행위는 그녀 스스로를 긍정하고 자신의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어렵고 버거웠어도 소중한 삶의 자취가 담긴, 자신의 삶의 여정을 낱낱이 기록한 그 파일에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하여 한 페이지를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