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 댁에서 막걸리를 빚은 적도 많았다.
안방에서 이불을 덮어씌우고 술을 숙성시켰다.
예전에는 동네에서 무서운 대상이 둘 있었다.
산감과 술 조사였다.
산감은 나무를 감시하는 관리이다.
나무를 함부로 하다가 이 산감에게 적발되면 무서운 벌을 받았다.
나도 한 번 산감에게 혼이 난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인데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산감에게 적발되었다.
내가 어린 학생신분인걸 감안한 그 산감의 배려덕분에 다행히 나는 벌을 받지 않았다.
그냥 훈계만 받고는 방면되었다.
그 때 우리 동네는 7가구 남짓 하였었다.
그 7가구가 온 산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축구장 몇 개의 산림이 초토화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7가구뿐인데도 그런 판이니 전 도시가 나무를 땐 다면 산림이 과연 배겨날까?
우리나라의 산림이 녹화 된 것은 사람들의 배려 때문이 절대 아니라고 나는 단언한다.
연탄과 석유의 도입이 산림녹화를 이루었다고 확실히 주장할 수 있다.
술 조사의 무서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술동이를 나뭇간에 숨기기도 하고, 뒷동산에 숨기기도 하고, 술 조사가 떴다는 소문만 나면 온 동네가 벌벌 떨었었다.
막걸 리가 잘 익으면 용수를 박아서 동동주를 떠낸다.
그 동동주야말로 술중에서도 최고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사 지낼 때나 맛 볼 수 있다.
나는 냄새만 맡았지 그 동동주를 마신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그 냄새만 가지고도 몸이 떨릴 지경이다.
나는 어릴 때 막걸리는 별로 못 마셨지만 술지게미는 많이 먹어봤다.
술지게미에 당원이라는 감미료를 타서 먹었다.
맛 보다는 그저 배가 고팠으니까.
일 년에 한 번씩 나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시제에 참석하였다.
내가 외할아버지 댁에서 살던 동네는 충남 대덕군 유성면 죽동리였다.
동네 앞에는 논이 펼쳐져 있고, 맞은편에는 노은리의 밭들이 있고, 그 왼쪽에 인삼밭이 있고, 멀리에는 계룡산이 그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시골이었다.
나중에 인삼밭은 호남 고속도로로 바뀌었고, 노은리의 밭들은 월드컵 축구장으로 변했다.
시제에 참석하려면 뒷동산을 우선 넘어야했다.
뒷동산이라야 사실은 조그만 언덕에 불과하다.
언덕을 넘으면 남작골이라는 동네에 다다른다.
그 오른쪽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충남대학교로 바뀌었다.
남작골을 오른쪽에 두고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가면 탄동이라는 동네에 못 미치어 숫골에 도착한다.
숫골에는 큰 절이 있었다.
보통의 절들은 대개 산속에 있는데 이 절은 그냥 평지에 있었다.
무척 큰 절이고 큰 종도 있었다.
하루 중 때가 되면 그 종이 울리었다.
우리 동네에서 들리던 소리는 두 가지가 기억되는데 하나가 바로 그 종소리이고 또 하나는 호남선 철도에서 들리던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였다.
그 범종소리는 정말로 마음을 울리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유성천지를 휘 감돌았던 것이다.
기적소리는 또 어떤가?
아직 못 가본 그 곳으로 떠나가는 그 울림이라니!
못 가본 그 세상을 넘어서 이제는 태평양도 건너고, 대서양도 건너고(아, 이건 아니네?), 인도양도 접해봤으니 세상 천지에 부러울 것이 없어야하겠다.
숫골에서 큰 고개를 넘어야 시제를 여는 동네에 도착하게 된다.
그 도중에 주막이 있었다.
냉장고가 없던 그 시절에는 동이를 땅속에 묻고 주둥이만 조금 바깥으로 내민 상태였다.
주모는 동이를 휘휘 저어서 막걸리를 한 사발 외할아버지에게 내놓았다.
안주라야 김치조각 뿐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꼭 내게도 술을 한 모금 권하였다.
막걸리는 좋은 음료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외할아버지가 사랑하는 외손자에게 어찌 한 모금을 권했겠는가?
한 모금 가지고는 나는 막걸리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제대로 막걸리의 맛을 느낀 것은 한 참 자라서 고등학교 때이다.
앞집의 누나가 집에서 담근 막걸리를 한 사발 권했을 때이다.
한 사발을 벌컥벌컥 마셨지만 별로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막걸리를 마시고 나서 나무를 하러 갔는데 이상하게 땅이 빙빙 돌았다.
그 때 처음 취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