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과 가족들 모두가 탈출 비행선에 탑승을 신청하기로 했다. 성공하면 온 가족을 구하는 것이었다. 소행성이 다행스럽게도 쿠트나호라를 비켜가 다시 돌아올 경우에도 그 또한 자신과 가족들이 선족을 위해 희생을 자처하고, 족장인 아툼에게 충성심을 보여준 것이 된다. 하지만 그는 쿠트나호라가 소행성에 의해 멸망되기를 바랐고 이번의 사태는 그 가능성도 충분해 보였다. 족장의 지위가 직계 혈통으로 승계되는 체제에서 이번에 태어난 아들로 인해서 자신은 이곳에서는 영원히 2인자일 뿐이다. 차라리 모험을 하더라도 탈출 비행선에 탑승한 만 오천 명을 이끌고 지도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남자로써 보람 있고 의미 있다고 믿었다. 수 십 년만 견뎌내면 선족의 인구는 늘어날 것이고, 그때면 제법 안정을 찾은 부족의 모습을 갖출 것이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과 형제들, 심복인 히페리온에게 비행선 탑승을 명령했다.
아툼은 대장군 크로노스가 비행선 탑승을 신청한 것을 알았다.
“장군의 충성심을 치하한다.”
“족장님의 명령을 수행할 따름입니다.”
아툼은 크로노스의 야심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아들을 대장군과 같이 비행선에 태우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 다가오는 소행성은 쿠트나호라에 피할 수는 없는 운명이다’
그의 본능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다. 아들의 운명에 앞날을 걸어볼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그는 대장군의 야망이 불길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심복 트리톤에게도 비행선에 탑승할 것을 당부했다.
선족의 과학 기술은 워프(Warp) 항법이 가능한 우주 함대를 보유하는 수준이었다. 그 함대로도 20년이 걸리는 다른 은하로의 이주 시도는 서로가 다시는 볼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이 선택이 선족에게는 최대 위기이자 새로운 기회이기도한 것이다.
선족의 뛰어난 과학적인 성취는 진화의 과정에도 적용되었다. 그 결과 강장동물의 한계를 극복하는 진화를 이루어 내는 성과를 얻었다.
나무의 뿌리에 해당하는 소화기관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존재인 강장동물. 그러나 이동의 자유는 그만큼의 상실을 요구했다. 육체 안에 들어선 내부 기관은 끝없는 고장을 일으켜, 수많은 질병을 야기하며, 생명체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타가영양체(외부로부터 영양물질을 공급받아 유기물을 섭취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생물체)’ 이것은 혹독한 대가를 요구하는 자유였다. 사냥을 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사냥(1. 총이나 활 또는 길들인 매나 올가미 따위로 산이나 들의 짐승을 잡는 일.
2. 힘센 짐승이 약한 짐승을 먹이로 잡는 일.’ - 국어사전)’을 통해 다른 생명체를 죽이거나 손상시켜야 생존이 가능한 생명체의 한계를 떠안아야만 했다.
이런 수렵채집인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고. 다른 생명체의 몸을 빼앗는 일을 멈추고자 하는 선족의 노력은 마침내 그들을 영적인 존재의 수준에 근접하게 하였다. 몸 안에 있는 화학공장을 없애는 진화를 이루자 마침내 수명도 10배나 늘었다.
그렇지만, 무엇인가로부터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 ‘타가영양’을 완전하게 극복하지는 못했다. 선족은 다른 생명체의 영을 식량으로 삼게 되었다.
그들이 기지를 건설해 놓은 곳은 다름 아닌 지구의 달이다. 우주에서 찾아낸 푸른 행성 지구는 매력만점이었다. 온갖 생명체가 가득한 지구는 선족에게는 곡창지대 같은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있는 달은 뒷면을 감추어 완벽한 은신처를 선족에게 제공했다.
달에 기지를 건설하며 지구를 탐색하던 그들은 하나의 고등동물을 발견했다. 선족의 과거 진화를 이루기 전에 지녔던 형상과 유사한 동물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이었다. 선족은 이 존재의 영이 매우 다양한 특성을 가진 마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개체임을 파악했다.
사람은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이면서, 나름의 문화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선족을 가장 당황하고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사람이라는 하나의 종이 가지는 다양한 영의 존재였다. 분류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다양성을 가진 사람의 영은, 풀뿌리 하나에도 못 미치는 영양가를 가지기도 하였고, 최고의 명약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영도 적게나마 확인 되었다. 선족의 ‘영 스펙트럼’이 가지는 분류 기계의 가짓수를 훨씬 뛰어넘는 다양성이었다. 이 다양성은 풍부함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었다. 고향인 쿠트나호라에도 없는 이 생명체는 완벽한 영양의 보고였다.
“이제 이 지구가 앞으로 달에서 살아갈 우리 종족을 먹여 살리게 될 것이다.”
아툼이 떠나는 크로노스 일행에게 마지막 축사로 남긴 말은 이를 의미함이었다.
쿠트나호라를 탈출해서 지구로 향하던 크로노스 일행은 달 기지에 도착하기 전 아툼의 마지막 명령을 전달받았다.
“생존해서 종족을 지켜라. 이제 쿠트나호라의 모든 생명체는 멸망할 것이다. 소행성이 지금 쿠트나호라의 대기권을 뚫었다. 마지막 지시를 하달한다. 반드시 살아남아라.”
크로노스는 울부짖는 일행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는 쿠트나호라를 잊는다. 아툼 족장님의 마지막 명령을 지켜내기 위해 나와 우리 모두는 반드시 종족을 지켜낸다. 족장님의 명령을 한시도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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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라하시스가 서른이 되었다. 이는 선족이 달에 도착한지 어느새 10년이 지났음을 의미했다. 트리톤은 ‘아툼 족장의 유일한 후계자’를 지켜내느라 10년을 100년처럼 살았다. 크로노스는 그만큼 집요하게 아트라하시스를 견제하며 제거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의 나이가 서른이 되었지만, 선족에게는 아직 갓난아기나 다름없었다. 트리톤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죽은 목숨이었다. 부하를 보는 아버지 아툼의 믿음은 정확했다. 트리톤은 아트라하시스를 지혜를 갖춘 강인한 무사로 길러냈다.
그는 후계자 지정을 서둘렀다. 쿠트라호나 시절의 선족의 전통은 자식이 50살이 되어야 족장은 비로소 후계자 지정의식을 진행하였다. 그렇지만 크로노스의 야욕이 점점 커지고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앞으로 20년을 더 버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고 여겨 서두르지 않고 있는 지금이 적기였다. 아직은 달에 이주해 온 선족의 대부분이 아트라하시스를 차기 족장으로 여기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위험은 가중될 것이다. 지금도 일부의 선족들에게서는 조금씩이나마 크로노스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아툼족장께서 스스로를 희생하시고 우리들을 이곳으로 이주하게 하여, 우리가 목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갚으려면 우리는 아트라하시스를 족장으로 모셔야 합니다.”
트리톤이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새 족장 추대를 위한 여건 조성에 나섰다.
“지금 크로노스 대장군은 자신이 마치 족장인 듯 위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일부는 그에게 동조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위치는 더욱 강력해질 것이고 지지세력도 불어날 것입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아트라하시스님이 위험합니다.”
자리를 같이 한 모든 이들은 같은 염려를 하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음을 느꼈다. 아툼족장이 죽고 없는 지금이, 달의 기지로 이주를 하고 초기의 험난한 역경을 이겨내며 10년 동안 선족을 무난하게 이끌어 온 지금이, 부족원들에게 자신의 공적을 인정받고 차기 족장의 적임자임을 부각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크로노스대장군께서 달의 기지로 선족들이 이주를 한 뒤, 10년을 절치부심하여 안정시키고, 이주 당시에 만 오천에 불과하던 부족원을 이만에 다다르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선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족원 중의 하나로서 이제 우리에게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아툼족장의 아들이 있지만, 그는 아직 어리고 우리부족을 위해 아무런 공적도 세운 것이 없습니다. 지금의 현실을 볼 때 크로노스대장군만이 자격을 갖춘 유일한 분이십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대장군님을 족장으로 옹립할 것을 감히 주장합니다.”
크로노스의 최측근인 히페리온이 좌중을 둘러보며 위협적인 자세로 선동을 하였다. 참석자들이 모두 환호하며 박수를 치는 모습을 아버지 크로노스의 옆에서 지켜보던 딸 레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정작 좌중의 환호에도 크로노스는 어두운 얼굴로 가만히 앉아 침묵만 이어가고 있었다.
‘최대한 추대를 사양하며, 겸손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저들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신중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자칫 모든 것을 잃는다.’
“아툼족장의 아들 아스트라하시스님이 아직 건재하시고, 그에게 아무 허물도 없는데, 누가 감히 족장의 자리를 욕심낼 수 있다는 말인가. 여러분이 원하는 바가 우리 선족의 번영을 바라는 마음임을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내분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이 일은 여건이 조성된 뒤에 다시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크로노스의 말에 좌중은 조용해졌다. 그렇지만 모두는 그의 말이 거절이 아님을 알았다. 아스트라하시스가 살아있으면 내분이 발생하니,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말이고, 그가 없어야 때가 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