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비서! 지금 내게 너무 무례한 거 알아요?”
외출을 막아서는 박진수가 어이없어 정애는 화가 치솟았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제가 사다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마트에 가시거나 단지 내의 산책은 허락해드리지 못합니다.”
“내 외출이 어째서 박비서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죠?”
“지금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즉에 주의를 기울였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잖습니까.”
“지금 나를 탓하고 훈계하는 겁니까? 그리고 지금 상황이 뭐가 어떻게 변했다는 거죠?”
“사모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 사람들이 차관님을 협박하고 있어요.”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얘기를 해서 나를 막으려고 들어요. 차관님이 그런 것들에 눈이나 꿈쩍 하실 분이세요? 그분을 뭘로 보고 그래. 비키기나 하세요.”
박비서가 차관님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더 노기마저 띠었다.
“차관님의 지시입니다.”
정애는 박비서의 말에 얼굴이 굳었다.
“거짓말이죠? 내가 그이한테 확인할 거예요?”
“확인을 해도 변할 것은 없어요. 더구나 차관님은 정애씨가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제가 임의로 제재를 해도 된다는 허락까지 내리셨어요.”
그의 호칭이 사모님에서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큰 차이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놀라움과 충격으로 말문이 막힌 그녀는 그를 빤히 노려보다 휙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
김차관이 전화마저 받지 않자 정애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동안 망연자실 앉아있던 그녀는 마성에게 구조를 요청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아파트에 자신이 납치되어 있으니 구해달라고 하면 그는 틀림없이 구하러 와줄 것이다.
‘자기야! 나 납치됐어. 빨리 구해줘.’
그렇지만 그녀의 문자는 마성에 의해 곧바로 박진수에게로 전달되었다. 마성은 주말농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주는 대가로 이미 그녀에 대한 우선권을 포기했고, 그녀의 이중생활을 알고 난 뒤 애정마저 식어버렸기 때문이지만, 이 사실을 정애는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마성의 문자를 본 박진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까지 무모하게 덤비면 이 여자를 통제할 방법들이 점점 사라지게 되어, 이제는 정말 막다른 골목만 남아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여자도 김차관의 다른 여자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되겠구나.’
그동안 김차관의 여자들 중 살아있는 여자는 단 한 명뿐이다. 나머지 여자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고 지방의 일간지에조차 뉴스로 나오지 못했다. 살아있는 한명의 여자는 김차관과 자신의 의도를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철저하게 보안을 다짐하며 스스로 떠난 경우였다. 자신의 손으로 정애까지도 자살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약간 언짢아졌다.
‘처음에는 순수하고 수수하던 사람들이 권력의 작은 조각 하나라도 맛을 보고나면 돌변해버리는 현실이 납득하기 어렵고 참 싫다.’
자신이 권력자의 어두운 뒷배를 돌보며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이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경멸하는 마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런 마음은 여자에 대한 뒤처리를 김차관이 일임해 주는 순간 제거할 대상으로만 인식하게 만들었다.
‘제가 마트에 잠시 외출합니다. 10분 뒤에 문자를 보내서 여자를 구하러 사람을 보낸다고 연락하세요. 여자가 그 연락을 믿고 제가 보낸 사람들을 마사장이 보낸 사람들로 알고 따라 나서게 되면 나머지는 제가 모두 처리하겠습니다.’
박진수의 문자에 마성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로서도 이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지금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만 생각하자.’
그날 저녁, 여느 날처럼 마성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민지야, 아빠 왔다.”
“아빠!”
민지가 한달음에 와서 품에 안겼다.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냈어?”
“아빠, 당근이지! 근데 엄마 아직 안 왔는데?”
“그래? 엄마는 저녁을 먹고 올 건가보네. 그럼 우리끼리 먼저 저녁 먹을까?”
“뭘 먹을 건데?”
“우리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좋아!”
이제 정애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권력을 가진 자에게 권력을 잃는 다는 것은 곳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소한 빌미마저 용납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고, 정애는 지금 그 덫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민지만이라도 보호하고 싶은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아이와 저녁을 같이 먹는 것이었다.
다음 날 오후.
마성은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정애라는 사람을 아시죠.”
그는 그녀의 주검이 발견되었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 저와 같이 지내는 사람입니다.”
“그 여자가 골프장 주변의 외진 곳에 주차된 자신의 차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유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자살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은 최종적으로 그녀가 자살했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성급하게 자살로 결론을 내리면서 그녀의 죽음을 둘러 싼 의혹이 있는지 여부도 수사대상이 되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민지는 공황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외가 쪽 사람들의 손길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었다. 민지의 눈길은 장례식장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는 마성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따뜻한 눈빛으로 가끔씩 아이를 바라보며 안정시켜 주려 애를 썼다. 장례가 끝나고 경찰은 아이의 강력한 의지를 고려하여 마성을 후견인이자 보호자로 인정하였다. 망자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음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다시 찾은 아파트는 휑한 느낌이었다. 마성은 서둘러 난방을 가동하고 집안에 온기를 채우려고 애를 썼다. 사람의 손길이 끊겼던 집은 시간이 흐르자 다시 울타리가 되었다.
“민지야, 아빠가 재워줄게.”
“아빠! 나 무서워서 그러는데 나랑 같이 자면 안 돼?”
“그래! 아빠랑 같이 자자.”
마성이 허락하자 짧은 순간 민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앞으로도 아빠가 나랑 살아줄 거지?”
아이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엄마도 잃고 친척들도 굳이 아이를 맡고 싶어 하지 않는 현실을 아이는 이미 잘 느끼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살아나려면 이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생명체의 본능으로 이미 확실히 알고 있었다.
“민지야! 무서워하지 마. 아빠가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엄마가 없어도?”
“응, 아빠는 엄마가 없어도 민지랑 살 수 있어.”
“민지는 엄마처럼 아빠를 즐겁게 해줄 수 없어. 그래도 괜찮아?”
어린 아이의 당돌한 질문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정애의 외도를 확인 한 순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정말 이 여자를 버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답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정애로 인해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여자는 나이도 몸매도 얼굴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섹스의 맛이다.’
이미 지상 최고의 여자를 품어본 그다. 세상의 어떤 여자를 탐한다 하더라도 정애에게서 얻은 궁극의 극치감은 더 이상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제 더 이상 여자가 필요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응! 아빠는 민지만 있으면 돼.”
마성의 대답을 들은 민지가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빨리 커서 어른이 되면 아빠랑 결혼할거야.”
“우리 민지가 그래주면 아빠는 무척 행복하겠는데!”
마성은 어린 아이들이 흔히 하는 말로 가볍게 치부하며,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아이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후 마성도 잠에 빠졌다.
아이는 마성이 잠든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눈을 뜬 채로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한사코 외할머니랑 외삼촌을 따르지 않으려고 한 이유를 사람들은 이해 못할 거야. 나는 엄마가 이 아저씨와 살고 있는 이유를 잘 알아. 아저씨는 돈이 많고 자상해. 나에게 친절하게 해주는 것을 보면 분명히 좋은 사람이야. 나는 이 아저씨랑 살아야 아무걱정 없이 어른이 될 수 있어. 그런데 문제는 아저씨가 엄마랑 같이 자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는 거야. 그렇지만 지금은 내가 엄마처럼 해줄 수가 없어. 그래도 아저씨가 나랑 살아준다고 해서 다행이지만, 나는 무척 걱정이 돼. 그러니 내가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해. 그러면 엄마처럼 아빠랑 같이 자면서 행복하게 살 거야’
DNA의 요구대로 생명체가 갖는 생명 유지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는 아이의 어린 마음속에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잠드는 소녀의 눈가에 한줄기 물방울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