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부친 장례식에 다녀왔다.

망자는 상당 기간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아들에게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이셨단다.

92세의 노인이 소리 없는 퍼포먼스를 하신 것이다.

"담배 한 대 다오.."라고.

천천히 아주 맛있게 담배를 태우신 뒤에 잠에 드시어 하늘로 가셨단다.

이거야말로 '호상(好喪)'이라고 할 만하다.

장지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그리워 선친 산소에 들렸다.

집 가까이 모신 덕에 자주 찾아뵙는 편이지만

지난 11월 이후엔 뭐가 그리 빠쁘다고 가질 못하였다.

차가운 겨울 바람조차 상쾌하게 느껴지는 양지 바른 묘지엔

'박창규 요셉지묘'가 새겨진 검은 비석이 때묻은 고드름처럼 반짝거린다.

누구보다 건강하셨던 아버지가 칠순을 목전에 두고 돌아가실 때,

아내와 아들을 미리 보내긴 했지만 미련한 나는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

큰 아들이 보고싶다고 반복되는 손짓으로 애절하게 찾으셨다는데

도착 몇 십분 전에 눈을 감으셨다.

'한(恨)이 맺힌다'라는 말이 진정 무얼 의미하는지 

절절하게 가슴에 새긴지도 어언 십 년이 되어간다.

- 아버지의 겨울 묘지 -

겨울 해가 힘아리 없이 스러진 식사리 시립묘지,

푸석푸석한 하늘이 사방을 조여온다.

살아야 한다는 것이 숨막힘은 아닐진대

아버지 산소는 추워서 통쾌하다.

아버지 산소는 외로워서 상쾌하다.

늦은 깨우침은 어둠처럼 내려와 나를 힐책하지만

그것도 인생이라 용서 구한다.

그것도 삶이라고 억지 사정 해본다.

아버지는 저 차가운 땅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눈까지 나폴거리는 이 아름답고 측은한 산 중턱에

약주 한 잔 하시고 불콰한 낯으로 부르시던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이오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인데......"

백년설의 '고향설'을 눈 지그시 감고 참 맛갈나게 부르셨는데...

머리맡에 담배 한대 불 붙여 놓아드리고 감히 그 앞에서 나도 한 대 피운다.

아버지와 함께 빨아들인 담배 맛은 왜 그리 맛이 있는지 죄송스럽다.

땅거미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처럼 짙게 다가서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고향설'을 부르고 있다.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이오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눈인데

........

고향을 불러봐도 고향을 불러봐도

가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