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돌이 부딪힐 때 수읽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창을 스치는 불빛사이로 떠오르는 삶의 편린은 마치 바둑판에 얽혀 있는 바둑돌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이지만 또한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사람으로 인해 그늘지는 나날은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해도 공허한 사람과의 관계는 이루지 못하는 사랑처럼 언제나 가없는 수평선으로 이어집니다.
끝이 없는 길을 그저 처음의 마음으로 그저 어린 시절 소년의 마음으로 걸어가려 하지만 멀고 먼 그 길은 결코 평탄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어디 사람과의 관계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이 또 있을까요.
사랑과 우정만이 삶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랫동안 등지고 지내던 친구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친구였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나에게 상처를 남기고, 나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나를 외면했던 친구였습니다.
잠시라도 좋으니 얼굴만 보자는 친구와 커피를 마주하고 어색함속에 마주 했습니다.
나이 들어 재기에 몸부림치는 초라한 나의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탓에 그를 마주할  수 있었던가 봅니다.

형식적인 이야기들이 몇 번 오고갔을 뿐 나는 어떤 마음의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동안 식어버린 증오감이 더욱 살아나고 아픈 기억이 다시 떠올라 현기증마저 일었습니다.
사과의 말 한 마디 없이 한참을 그저 그렇게 있다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악수를 청해 오는 친구의 손을 형식적으로 어색하게 잡고는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친구의 부고장이었습니다.
부고장을 보는 순간 얼마 전 보았던 친구의 초췌하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고 손을 내밀던 친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오랫동안을 설명할 길 없는 감정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장례식장을 들어서며 친구의 영정을 보는 순간 나는 그것이 슬픔이란 걸 알았습니다.
증오의 끝자락을 파고드는 알 수 없는 오열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앉아 술을 마시면서도 나는 믿기지 않는 사실앞에 망연자실 말없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짐작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도 나란 존재는 삶의 가장 아픈 부분이었던 모양입니다.
도무지 나를 만나지 않고서는 그는 마지막 길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무엇이 그와 나를 그토록 오랜 세월을 갈라놓았던 것일까요.
살기 위해 그 무엇도 외면해 버리는 비정함일까요, 그로 인한 증오일까요.

별빛이 내리는 장례식장밖의 어둠속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이제 손을 내밀려해도 내밀 수도 없습니다.
악착같이 그 무엇도 내다보지 않고 사는 삶이 허황한 것이란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삶의 마지막 바둑판 앞에서 나란 마지막 공배를 메우고 그렇게 떠나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바둑판에는 그가 두고 간 마지막 한 수가 아직도 우투거니 놓여있습니다.
내가 응수해도 그는 다음 수를 놓을 수가 없을 것이기에 나도 다음 수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한 수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미안하다, 친구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