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추산>
기개있는 장수의 형상을 한 백추산 그 어께춤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던 지관 임형수는 털고 일어나 발아래 펼쳐진
풍경을 굽어보았다
봄은 '청춘'의 청색이요 여름은 붉은 '주하'이고
가을은 흰 '백추'라 하였으니
그 앞에 겨울의 검은 '현동'이 자리 한 것도
이 같은 오행의 이치가 지리명에
소리없이 녹아 있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뛰어내리면 두 발이 닿을 듯 현동땅 도평 역전이 눈아래 가까이 들어왔다
그 곳은 청송도호부에서 출발한 파발마가 부남을 거쳐 삼자현고개를
숨가프게 넘어 안덕현으로 가기위해 한숨 돌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 조금 앞에는 이곳 백추자락을 타고내린 물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깊은 계곡 여기저기에서 흘러내린 물들로 제법 너른 천을 형성했고
점차 그 폭을 넓히던 물길은 이제 길게 늘어선 논밭들을 갈라 놓았다
그렇게 현동의 젖줄이 된 눌천은 잠시 굽이진다 싶더니
어느덪 아득히 보이는 신성리 작은 고을 앞에 닿아 있었다
그곳엔 서남방에서 흘러온 또 하나의 넓은 천이 흘러 들고있었는데
청송과 영천을 경계짓는 보현산에서 출발한 보현천 육십여리 물길이었다
안덕현 명당고을에 이르러서 부터는 길안천으로 불렸으며 현동의 눌천과
합쳐져 안동 반변천으로 흘러들며 낙동강상류를 이루게 된다
임형수의 먼 시선은 길안천이 안동땅을 향하며 모습을 감추는 끝자락에 박혀있었다
그곳에는 안덕현에서 명망이 자자했던 문인 조준도가 광해11년에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어놓았다는 정자 풍수당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사친당으로도 불럿지만 후손들에 의해 지금은 그의 연호를 딴
방호정라는 편액이 정자에 붙어 있었다
임형수가 스승처럼 따르며 이시영에게 산을 배워가던 어느날
조준도의 선산 근처를 지난적이 있는데
유달리 수려해 보이는 봉우리가 있어 자꾸만 눈길이 갔다
걸음을 멈춘 이시영이 그런 그를 돌아보며 그 산의 형상을
풀어내 주던 한 때가 아련히 떠올랐다
'니가 보기에도 흡사 붓끝처럼 생겻지 않았느냐?'
'예? 그런건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요'
'허...이누미 무슨 말이 그러냐? 기면 기지 아닌 것 같기도 한건 또 뭐시냐?'
'그게..., 뾰족한 것이 창끝 같기도.. 그러니깐...'
'쯔쯔...,'
이시영이 혀끝을 찻다
'야 이누마 마음을 열고 제데로 보아야지 그정도 따라다녓으면
형상을 보는 눈쯤은 이제 좀 트일 때도 되지 않았느냐'
'제 말은 그게 아니라...,어차피 형상이라는 것이 사람이 저마다
보기 나름이 아니냐는 그 말씀입죠
명을 산이마에 써 붙여 놓은것도 아닌데 창끝이나 붓끝이나
거기서 거긴데 보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해서요'
당시 임형수는 변명처럼 내밷은 말이 자신이 생각해도 제법 정곡을
찔러간 것 같아 내심 흐뭇해 하던 차였다
그러나
조용히 타이르듯 다시 울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자신의
아집스런 선지식을 여지없이 깨트려 놓았었다
'음..., 딴엔 말이 되는 것도 같구나!
허나, 잘 듣거라 창날을 이루는 것은 쇠다 쇠는 금산이지 않더냐?
금산의 형태가 어떻고 문필봉인 목형산의 형상이 어떻다는건
궂이 내가 준 서책을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지 않느냐? 쯔쯔...'
'아...참 제가 그걸 생각 못했네요 히힛'
임형수는 금새 자신의 아둔함을 인정하는 객적은 웃음을
보이고 말았다 그런 그를 슬쩍 한번 흘겨보던 이시영이
웃음을 머금은채 다음 말을 이었다
'인석아.. 더 듣거라 목형산의 형국에 해당되는 문필의 혈에는
예로부터 학자나 환쟁이가 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저기 보이는 봉우리는 윤끼있는 청솔들로 산정까지
뻬곡히 들어 차있지 않느냐 흡사 짙은 먹처럼도 보이지 않느냐?
더 볼 것도 없이 저곳에는 학자가 날 혈이다
그러나 백호에 해당하는 산세가 혈장보다 높고 그 생김이
수려하지 못하니 집안 여인들의 대가세고 인물은 박색을 겨우 면할 정도 일 것이다'
'예...'
'뭐하고 섯는게야 어서 움직이지 않구'
임형수는 지금도 어디선가 무거워진 자신의 게으른 걸음을 재촉하던
스승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 오는 듯 했다
시선을 거둔 임지관은 걸음을 서둘러 얼마되지 않아 백추 산정상에 닿을 수 있었다
이곳 만큼이나 높이 솟은 건넛편 삼자현고개의 봉우리들 사이로 숨어있던
오두혈의 주변 산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몇해전 청송에 인접한 영양땅에서 행세깨나 한다던 남씨 일문은 안동에서 불러온
지관 고씨에게 넉넉히 노자를 주어 선친이 들어갈 묘자리를 미리부터 찿게 하였다
일감을 찿은 고지관이 해를 넘기며 부지런을 떤 끝에 이백여 리 밖
현동땅 삼자현고개 부근에서 하나의 혈자리를 보게 되니 바로 저곳
오두 혈자리였다
영양에 사는 남이수도 직접 와서 보니 자신이 보기에도 어떤 기운이 느껴지는지라
흡족해 하며 아비가 들어갈 음택의 터에 아비의 함자를 새긴 지석을 미리 넣어
타인의 범접을 막는 요량으로 가묘부터 써두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임형수가 스승인 이시영과 함께 오래전에 보아둔 혈자리였다
당시 이시영은 앞날을 훤히 내다보는 말투로 자신에게 어떤 당부를 잊지 않았다
'형수야...니도 알다시피 이곳은 말대가리 오두혈이 맺힌 자리 아니더냐
분명 머잖은 세월에 남씨 성을 가진자가 이곳에 아비의 채백을 뭍으려 할 것이다'
'예? 아니...김씬지 남씬지 그것을 어르신께서 어찌 아십니까요?
'허... 그눔 참... 음택자리를 오래 보다보면 그곳의 임자도 가끔은 보이는 법이다
군소리말고마저 듣거라'
땅을 보는 스승이시영의 높은 경지는 이미 알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그 땅에 들어설 묘지의 주인까지 알아보는 말투는 아직 임형수가
의심을 품기에 어쩌면 마땅한 것이었다
'좀전에 우리가 지나온 이십여채에 이르는 작은 촌락 또한 보았을 것이다
그곳 마을을 이루는 양택혈 또한 이곳 오두의 혈을 지나고 있으니 참으로 특이한
지형이라 할 수 있겠구나! 하여, 이곳에 묘를 쓰되 비석과 같은
지기를 누르는 그 어떤 것도 써서는 안되는 자리 이기도 하다
분명 남씨라는 자는 아비의 묘비명을 세워 밖으로 드러나게 할 욕심까지 부릴게다
그러나 그것을 막지못한다면 그 액운은 고스란히 저 아래 보이는 마을에 미칠것이다
알겠느냐?'
굳은 다짐을 받으려는 스승의 마지막 물음에 알겠다는
대답을 대신 임형수는 오히려 어떤 궁금증부터 풀어야만 했다
'어르신 그런데 오두혈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건 어떤 연유입니까?'
그러자 빙긋 한 번 웃던 이시영이 갑자기 임형수의 머리를 잡아채며 눌러뎃다
평소에도 스승은 그랬다 바위처럼 무겁다가도 어떨땐 마치 동기라도 되는양
농을 걸며 격을 두지 않았다
'이래도 모르겠느냐?'
갑작스런 스승의 행동에 '그런가부다'하던 임형수가
어느순간 자신의 허벅지를 치며 이시영을 향해 활짝 웃었다
'아..하...바로 그거 였군요'
'이제 알겠느냐? 허허허 '
'하하하'
그렇게 두 사람의 웃음소리는 거친 계곡 속으로 한동안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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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youngpan
고기뀐지
달선공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