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통화를 끝낸 후에도 싱글거리던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나는 갑작스레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짐짓 놀라고 있었다 다가온 직장동료는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건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야... 누구야?’

‘어? ..뭐?. 아... 우리 누님... ㅎㅎ’

‘친 누님?’

‘어....왜?’

‘이기...지금 누굴 속일라 카노? 커피 뻬면서 보니깐 전화 받는 분위기가 딱 불륜의

현장이 따로 없더구만.. 퍼뜩 바린데로 못 데나? ‘




현장과 사무실 합쳐도 십 여 명뿐인 몇 안 되는 직원들 중에서도 목소리만큼은

사장급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이 과장은 능글거리는 나를 다그쳤다

나는 이번 일 만큼은 회사 내에서 일명 ‘방송국’으로 통하는 이 과장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연신 번져오는 실없는 웃음은 의심 많은 이과장의

참견근성을 한층 더 가중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야..야...우리 누부가 주말쯤에 집으로 밥 먹으로 한번 오라는 전화다 불륜은 무신...’




‘햐... 니 정말 이럴 끼가? 니 하고 나 사이에 정말 이칸단 말이제? 야..야.. 그카지 말구

내한테만 속닥이 애기 해도... 내 비밀보장은 하꾸마..‘




10년 넘어 한솥 밥을 먹어온 이 과장과는 나이도 비슷해서 언제부턴가

고향친구처럼 서로 격이 없이 지내고 있었다 불과 1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두 사람은 노총각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었지만 이과장이 몽골로 장가든 후로는

하나의 유일한 공통점이 깨져 버렸다 나보다 한 살 어리다는 것을 절대 인 정치

않는 이 과장은 작달마한 체구에 동안이었다




마치 연인 사이라도 되는 양 옆구리에 달라붙으며 생글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지랄한다...비밀보장? ㅎㅎ 니한테 말할 바엔 차라리 회사 사람들 다 모아 놓고

노총각바람 낫소하고 외치것다요넘아..ㅎㅎ}







<퇴근 무렵>

나는 동료에게 업무에 대한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평소보다 일찍 회사를 빠져 나왔다

오후4시가 조금 넘은 한적한 공단도로는 따뜻한 가을볕 속에 가로수를 거느리며

길게 뻗어있었다 가을이 깊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도로변을 늘어선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지 않았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은 이곳보다 북쪽이라 이맘때쯤, 마을 어귀에 은행나무는

온통 노랗게 변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리 없이 지나가는 가을을 지키며

오늘도 그 크고 무성한 은행나무는 산골아이들의 우정과 소박한 꿈도 함께

노랗게 물들이며 익어 갈 것이다

잠시 고향의 가을풍경을 상상하며 미소 짓던 나는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룰루,,루루루 룰룰루루..’







언제부턴가 노랗게 다가오는 늦가을은 나로 하여금 아름다운 화폭에

담긴 서정시를 보듯 잔잔한 평화로움을 느끼게 했다

오늘 같은 날 그런 풍경화가 없어 아쉽긴 해도 그래도 따사로운

가을볕 때문인지 마음은 소리 없이 부풀어 올랐다

액셀에 올린 발끝에 힘을 주자 아담한 나의 애마는 부드럽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공단을 빠져나온 소형 승용차 한 대는 이젠 도시로 이어지는 대로를 접어들고 있었다

조금 열어둔 차 창밖으로 이태원의 ‘솔개’가 경쾌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노래를 따라하는 운전자의 한손은 장단을 맞추며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남자치곤 수염이 거의 없어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며 짧게 깍은 머리,

조금 크게 느껴지는 서글한 눈매 그리고 케쥬얼한 복장은 그가 30대인지 40대인지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었다. 작은 산발치를 돌아 난 도로를 빠져나온 소형차는 다시

도시를 향해 곧게 뻗은 도로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