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한동네에서 태어나 자란 철수와 영희는 소꼽장난을 한두번 했지만 초등..그것도 1.2학년 시절이었다. 그 후는 시골인 때문인지, 벌써 성별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때문인지..혹은 다른 아이들이 놀릴까봐서인지 내외하게 되었는데..그래도 영희는 몰라도 철수의 속마음은 영희를 진짜친구로 혹은 각시로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아주 어릴 때 초등도 들어가기 전에 서로의 알몸도 본적이 있었다. '어어? 고추가 없는 아이도 있네' 정도였을 뿐 서로 형제나 자매가 없는 외동아들 외동딸이라는 공통점이 작용했었달까. 서로에 대한 인식이 각별했다고 할 수 있겠다.

중학교도 남녀공학으로 남녀분리로 바뀌기 전엔 같은 반이었다. 서로의 집안 사정을 너무 잘알기에 서로에게 안좋은 일이 있으면 눈길만 스쳐도 모두 이해되고 염려해주었는데..철수는 난폭해지거나 말썽을 부리다가도 영희 눈만 슬쩍 스쳐도 삼가하고 얌전해졌을 정도로 영희를 의식했다. 

하지만 등하교길도 동행하는 일이란 없었다. 서로 동성친구끼리 어울렸어서 그럴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중학2학년 때 여름이었는데 비가 무척 쏟아진 날. 하학하는 길에 동행케 되었는데...아니 동행이 아니라 멀리 보아 영희라는 것을 알았건만..앞서가는 영희를 

굳이 따라잡아서 서로 어색해지거나 영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철수였다. 

헌데 앞서가던 영희가 멈추는 게 아닌가?

철수가 당도해보니 마을 앞 개울이 물이 넘쳐 건너기 위험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물론 철수는 그보다 더한 격류도 자신 있었지만 영희는 약한 여자인 것이다.

가방을 어깨에 멘 철수가 영희에게 등을 갖다대었다. 
"물이 점점 불어서 지금 아니면 건널 수 없어..업혀." 

영희가 망설이자.

"학교로 도로 가서 잘거야? 도중에 공동묘지도 있는데..."

잠시 망설이던 영희가 업혔다. 
철수가 주춤주춤 개울을 건너다 기웃하자 
영희가 놀라 목을 끌어안으며 "조,조심해!"
"괜찮으니까 걱정마"

"영희야 이러니까 뭐 생각나는 것 없어? "

"?"
"황순원의 소나기..."
"난 정말이지 널 많이 생각하는데 너도 그 반만큼이라도 나를 생각해줬음 하는데.."
영희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난 정말 정말..네가 내 색시가 되었음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간간..정말 난 너를 진짜로 특별하게 생각해..."

"언제라도 힘들거나 어려울때 나를 불러줘. 어디라도 달려갈게"
영희가 말했다. "다 건넜잖아, 내려줘"
"동네까지는 아직 멀었어. 좀더 업어줄게." 
"안돼.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럼 사람들 못보게 솔밭길로 갈까? "
"도대체 넌 무슨 말을..내린다니까!"
발버둥치며 내려진 영희는 뒤도 안보고 달음질치듯 가버린다. 
철수가 어디서 용기가 솟았는지 고함을 쳤다. 

"잊지마..난 네 몸무게도 알았고 체온도 느꼈고 숨길도 닿았어..영희 넌 내 애인이야!"

영희가 서두는 통에 책가방에서 뭔가 떨어져 흘려졌는데 영희는 모르고 가버렸다. 

철수가 집어드니 손수건과 작은 수첩이었는데 깨알같은 앙징맞은 글씨로 독서감상문과 메모장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증에 썼을 영희의 증명사진 한장이 끼워있었다.   

혹시 철수 자신이 글에 나와있는가 아무리 찾아도 없었는데 워낙 서로 얽힌 사건이 없어서겠지만 그래도 오늘 일은 틀림없이 쓸 건데 뭐라고 쓸지 너무 아쉬워졌다. 

엉큼하다고 쓸까, 애인이라고 소리쳤다고 천하의 미친 놈이라고 욕했을까?  

그러며 수첩을 몇번씩이나 읽었는데 정말 섬세하고 고운 마음씨의 영희였다. 

생각이 깊고 관찰력도 뛰어난 것 같았다. 잘은 몰라도 책 감상문도 수준이 있어보였다. '그래, 영희가 읽은 책 모두 구해 읽어봐야겠어'

돌려줘야 되었다. 그러나 돌려줄 기회는 오지 않았고 어느새 그 수첩과 손수건은 

철수의 보물 1호가 되어버렸다.      

다시는 사건 같은 일은 없었다. 반이 달라진 3학년 내내 기회가 오지 않았다. 

주로 엄마의 수다로 영희소식을 들을 뿐이었는데 진학도 자신과 학교가 달라진 탓도 있지만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러다 고2때였다. 여름 방학중 영희가 등산을 갔다가 큰 사고를 당해 많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사고 난지 한달도 넘어서였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간간 엄마에게 전화하면 영희 근황을 지나가는 말로 꼭 물어봤는데 하반신이 마비되어 다시는 걷지 못한다는 것이다. 방안에 콱 틀어박혀 글만 쓴단다. 본래 글은 잘쓰는 영희였었다. 공부도 잘했지만 백일장에 나가 상도 몇번 받았던 걸 기억하는 철수였다. 

엄마에게 내가 여러번 안부 묻더라고 전해달랬더니 벌써 했단다. 그러면서 너 마음 약한 것 잘아는데 행여 엉뚱한 생각말란다. 영희는 그리 시집도 못가고 평생 혼자 살거란다. 스스로 그렇게 말했단다. 어쩌면 장애인 시설로 갈지도 모른다고..

철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설날에 영희네 세배도 갔지만 영희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무심한 세월이 흘렀다. 철수는 3학년부터는 다부지게 공부하여 명문은 아니지만 지방의대에 갔다. 다시 세월은 흘러갔다. 

그 와중에 영희가 모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는 것을 알았다. 

중요 일간지라면 모를까 이류 신문이니 그리 영양가가 있을 리 없다. 

그래도 물어물어 영희가 관계일지 연재하는 아동대상 동화 사이트를 찾는데 성공했다. 영희는 촌스럽고 흔한 본명이 아닌 '채린'으로 변명하고 있었다.

독자로 가장하여 투고했다. 

제목은 [소나기]였다. 여름날 영희를 업어 개울을 건네주었던 일을 그렸고....희영으로 변명했지만..그 아이가 흘린 독서수첩을 보고 책을 모두 찾아 읽었으며 결과 전적으로 동감했으며 많은 소득이 있었다. 공부라면 지레 포기한 자신을 분발시켜 명문대에 진학케 할 정도로.. 아직도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 손수건과 작은 사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보물 특호가 되었다. 

황순원의 윤초시네 증손녀는 요절했지만 자신의 주인공 희영인 불행히도 맹인이 되는 불행이 왔지만...화가가 되어 그림을 그리는데..정말 다행아니냐. 사람들은 두눈을 멀쩡히 뜨고도 못보는 것이 많은데 맹인 화가는 비록 눈은 안 보이지만 남이 못보는 것을 보는 신통한 재주가 있다. 남이 못 느끼는 것을 느끼는 신기한 재능도 있다. 적어도 나에겐 특별한 은총을 주는 여신같은 존재다. 그래서 자신의 한눈을 희영이에게 이식하고픈데 작가님은 어찌 생각하시느냐...?

물론 채린, 아니 영희의 답변은 없었다. 

몇달 후, 다시 투고했다. 

이번에 오랜만에 시골에 가는데 희영이를 만나보고픈데 만나줄지 의문이다. 

편지도 전화도 할 형편이 안되니...매일 자정에 그녀집 창문밖에서 기다릴 것이다. 

말은 못 나눠도 얼굴만 봐도 충분하다. 아니 욕만 먹어도 정말 행복하겠다. 악수라도 나눈다면...

당연 영희의 답변은 달리지 않았다. 

추석 때 내려간 철수는 자정도 전에 영희방 창문밖에서 기다렸다. 

첫날 밤, 기다린지 30분 40분이 넘어가도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50분이 넘어가자 

본래는 한시간은 채우리라 작정했지만 두시간도 문제없이 기다릴 것 같았다. 

그러는데 창문이 열렸다. 그리고 채린 아니, 희영이 아닌 영희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철수는 천천히 다가가며 거의 십년만에 보는 영희 얼굴을 각인하듯 바라봤다. 

영희가 무표정히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쥔 철수가 두손으로 포개고는 말했다.   

"아직 약속은 유효해. 너 내 각시야. 애인이야!!"

영희가 고개를 흔드는듯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는 창문은 닫혔다.

철수의 전공은 재활의학과였다. 

의사가 되기까지 철수는 자주 독자편지로 위장하여 많은 정보를 영희에게 전달했다. 

반신마비 전신마비라도 절대 절망해선 안된다. 충분히 희망을 가질만한 사례가 많디 많다. 세상에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드는 기적인 것이다. 

설령 안된다해도 그 과정이 진짜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의사가 되자마자, 철수는 영희집을 찾아갔다. 내가 절대 자신하고 고칠 테니 영희를 맡겨다오. 영희를 거의 납치하다시피 자신이 재직한 병원에 입원시키는 철수였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르고, 많은 사연들이 있었다. 

역시 기적은 있었다. 무엇보다도 하반신의 감각이...그것도 성감대가 일깨워진 계기는 철수의 지극한 애무로 인해서였기 때문이다. 정성스런 안찰과 맛사지에 사랑이란 감정까지 추가되니 기적이 안올래야 안올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영희는 3년만에 두발로 섰으며 5년만에 스스로 걸을 수 있었다. 

지금은 웨딩마치에 남 부축없이 혼자 입장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신랑이 누구냐고?

...알고 싶음 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