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졌다.
홍설민은 세심정 부터 봉안전까지 이어지는 동선에 장애물이 없다고 했다. 역시 숲길로 이어진 바닥은 길은 아니었으나 잔디가 간혹 있거나 흙바닥으로 되어있어 봉안전까지 접근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보안시설이 있는 출입문부터 조심해야 했다. 홍설민은 봉안전 출입문과 창문에 감지 센서만 설치되어 있다고 말했다. 공간감지기와 열감지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대부분의 출입감지센서는 출입문이나 창문의 하단부에 설치한다. 그들은 창문 상단부분의 유리를 제거하면 건물 내부로 진입이 가능함을 알아냈다. 폭이 작은 창문의 상단부로 접근하는 일은 그동안 국내에서 열심히 연습하고 운동한 덕에 어렵지 않았다. 두 팔로 양쪽의 벽을 지지하며 올라선 다음, 두 다리로 벽을 지탱하며 어렵지 않게 유리를 제거해냈다.
설민국은 소리 없이 봉안전 내부로 들어섰다. 건물 내부에는 홍설민도 들어와 볼 수가 없었기에 설민국도 이제부터는 스스로의 판단에 의지해서 행동해야만 했다. 이마에 매우 낮은 조도의 전등을 두르고 그는 서두르지 않고 영새부를 살펴나갔다. 전범 14명의 명부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명부만을 골라내는 것은 쉽지 않을 듯싶었다. 신사의 명부를 관리하는 담당자가 출신국가와 관계없이 연도별로 기록하고 관리했다면 2만 명이 넘는 방대한 분량을 11권의 영새부에서 추려내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은 만약 그렇게 작성된 경우라면 명부를 봉안전 내부에서 찢어 폐기하고 상징적으로 이우 왕자의 명부만 확보하기로 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명부는 자국민과 타 국민을 분리하고 있었다. 타 국민 영새부에는 여러 나라의 명부가 섞여있어서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그는 명부 한권을 통째로 등에 진 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이곳에서 시간을 많이 소요되면 본전에서 마음이 급해질 수 있다.
본전은 봉안전과 가까운 거리였다. 건물의 크기도 훨씬 컸고 보안 시설도 내부에 잘 갖추어져 있었다. 홍설민은 그에게 본전 내부의 사진만 한 장 건넸다.
“설동지, 내가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는 없었소. 미안합니다. 본전에는 출입감지기와 열감지기, 공간감지기가 모두 세팅되어 있어요. 즉 외부로부터 잠입할 방법이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바닥이 나무마루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혹시 옛날 초등학교 교실의 마루바닥과 같은 형태를 말하나요?”
“맞아요. 본전이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이라서 바닥 마감재가 나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면 가까이에 통풍구를 설치해두었어요. 동지는 통풍구를 통해 내부 바닥으로 들어가서 마루의 나무를 뜯어내고 야스쿠니 군도를 손에 넣어야 해요.”
“그렇다면 이 사진만으로도 충분하겠네요. 관건은 군도가 놓인 위치를 정확하게 한 번에 뚫어내야 한다는 건데···.”
“그렇죠. 만약 여러 차례 시도를 한다면 경보장치에 감지될 염려가 있죠. 시간상으로도 문제고요. 저들의 순찰도 신경을 써야 하는 어려운 조건입니다.”
“통풍구로부터 좌표를 정확하게 측정하면 단 한번에도 가능합니다.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해서 몸이 익히게 해야죠.”
설민국은 몸이 기계적으로 정해진 위치에 정확하게 도달될 만큼 수없는 연습을 했다. 나무 바닥의 두께가 변수일 수 있지만, 큰 장애요인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그는 시계를 봤다. 홍설민이 세심정 담장너머에 있기로 한 시간이 두 시간 남았다. 시간에 쫒기는 상황은 아니었다. 심호흡을 한 그는 작업을 시작했다. 연습이 힘들었던 만큼 작업은 순탄했다. 마루판의 나무 두께도 예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그리고 마침내 야스쿠니 군도가 놓여 진 곳을 단번에 정확하게 뚫어내는데 성공을 했다.
세심정의 안쪽 담에 귀를 댄 설민국은 바깥쪽 담장에서 보내 올 신호에 귀를 기울였다. 홍설민이 보낸 신호가 감지되었다. 그는 명부와 군도를 담장 너머로 넘겼다. 홍설민이 다시 신호를 보냈다. 안전하게 받았다는 신호였다. 비로소 설민국은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거사에서 그의 역할이 이제 비로소 끝나자 중압감이 사라지고 피로감이 몰려온 탓이다.
담 벼락에 기댄 채 서너 시간을 비몽사몽으로 있던 그는 여명이 비치자 연못으로 향했다. 신사의 직원들과 참배객들이 움직이기 전에 매무새를 고쳐야 했다.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변장도 지웠다. 그리고 참배객들로 적당히 북적이는 때를 맞춰 그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다행히도 아직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는 별다른 동요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신사를 나서는 길에 그는 어제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전쟁기념관에 다시 들렀다.
마치 ‘우리는 제국주의 시절을 잊지 못하고 그 시절이 그리워하며, 다시 꿈꾸려 한다.’고 시위라도 하는 듯한 일본의 속내가 보여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여유까지 보이며 그가 유유히 경내를 벗어나는데 뒤쪽의 신사 내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일었다. 그는 여유 있는 웃음을 머금었다.
“저 녀석들 이제야 알아챘군.”
홍설민은 어제 낮에 도쿄 시내의 기념품점에서 야스쿠니군도를 한 자루 샀다. 그리고 설민국에게서 어신체를 받아 기념품 군도와 바꿔 포장 케이스 안에 넣은 뒤, 기념품 군도를 적당한 곳에 버렸다. 이제 어신체는 기념품인 야스쿠니 군도가 되었다. 영새부는 적당한 상자를 골라서 넣은 뒤 테이프로 봉했다. 그의 철저한 준비 덕에 일본의 출국과 한국의 입국 검색대에 무사히 통과되었다. 그는 설민국에게 거사의 모든 절차를 마쳤으니 무사히 귀국만 하면 된다고 문자를 보냈다.
설민국은 홍동지의 문자를 확인하고 으쓱한 곳을 찾아 휴대전화를 파손시킨 후 버렸다. 혹시 생길지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야 했다. 그는 도쿄 시내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공항에는 출국시간에 맞게 도착하는 것이 나았다. 식사도 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 탓에 약간의 쇼핑도 즐겼다. 공항은 붐비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아도 될 만큼 시간을 잘 맞춰서 왔네.’
그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완벽한 작전이었다.
출국 심사대에서 공항 직원이 그의 여권을 보며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설민국씨가 맞습니까?”
그는 웃음을 머금고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여권을 내밀고 있던 손이 등 뒤로 휙 제쳐 졌다. 그의 안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뭐야, 왜 이래?”
“너를 체포한다.”
그의 귀국은 불가능했다.
타이키는 오늘도 여느 날처럼 야스쿠니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중이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몇 년 만에 이모와 이모부를 만난 일이 마음에 남았다. 스스로 완전한 일본인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살아내려 노력하며 살다보니 마음은 한 구석이 허전 했었던 듯 했다. 사람 마음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가족, 친지에 대한 그리움들. 그것들이 이모를 만나고 나니 조금은 채워진 듯 마음속에 따스함이 생겼다. 뜻 모를 작은 행복감을 느끼고 있던 그의 귀에 긴박하고 분노에 찬 외침이 갑작스럽게 들려왔다.
“테러다. 신시가 테러를 당했다.”
그는 엉겁결에 시계를 보았다. 10시 3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이 이른 시간에 누군가가 신사를 공격했다는 거야?’
마치 자신을 누군가가 공격하기라도 한 듯이 타이키는 울분을 느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건물 어디에도 공략당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무너지거나 연기가 오르거나 화재가 난 곳도 없었다. 그는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직원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죠?”
“누군가 어신체를 훔쳐갔대.”
그 직원은 짧게 말하고 다시 뛰어갔다.
타이키는 멍해졌다. 신사에서 어신체가 가지는 의미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마치 사람에게서 심장을 꺼내버린 거네. 이것은 안 될 일이다. 반드시 어신체를 되찾아서 신사에 안치시켜야 한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테러분자를 색출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자원봉사 하는 일보다 더 시급했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조금 전 직원이 뛰어간 방향으로 그도 내달렸다.
그가 도착한 강당에서는 CCTV 동영상이 반복되어 재생되고 있었다. 그 영상에는 용의자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잡혀 있었다. 영상은 용의자의 크로즈업된 모습과 전체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영상을 주시하던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확신이 점점 또렸해졌다.
‘내가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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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짜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