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군,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면 우리 집으로 가서 식사를 같이 하고 싶은데.”

사무실을 나서며 최윤경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그는 반색을 했다.

“예, 저야 좋죠. 고맙습니다.”

“자네, 선미 만나는 것 때문에 그리 좋아하는 거 같은데. 맞지?”

“아, 네, 뭐···”

그의 당황하는 모습에 그녀는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좋아! 가자.”

집에서 기다리던 최 선미는 고모가 설민국과 같이 들어서자 놀라면서도 몹시 좋아했다.

“너는 나보다 설 군을 더 반기는 거 같다.”

고모의 장난에 그녀도 약간 수줍은 모습이 되었다.

“민국 씨 어서 와요.”

그런 그녀를 구해주듯이 최선애가 분위기를 얼른 바꿔주었다.

두 자매는 고모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있던 일을 말해주자 깜짝 놀라며 좋아했다.

“그럼 이 소송 우리에게 정말 승산이 있을 수 있네. 그럼 우리 형편이 훨씬 나아질 텐데.”

“그런 대단한 분이었다니! 어쩐지 소송 사례비를 이야기 할 때부터 다르더라.”

역시 두 사람의 반응은 상당히 달랐다.

최윤경은 그런 두 조카의 서로 다른 반응이 익숙하면서도 늘 재미있었다.

“참 너희 둘은 너무도 달라!”

가만히 웃고만 앉아 있는 설민국에게 최선애가 농담을 건넸다.

“그런데 민국 씨는 너무 쉽게 우리 집에 입성했네요?”

그렇게 말해 놓고는 그의 당황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 너무 쉽게는 아니지. 민국 씨가 이번 일에 얼마나 크게 기여하고 있는데.”

“너 너무 역성들지 마라. 안 그래도 티 엄청 많이 난다,”

“그럼! 나 아니면 여기서 누가 이사람 역성을 들어줘?”

“저런! 너 설군 때문에 무척 뻔뻔해졌는데. 자, 다들 배고프겠다. 저녁준비 다 됐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설민국을 최선미가 배웅하겠다며 따라나섰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최윤경은 흐뭇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좋은 사람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작은 조카생각에 흐뭇하였고, 삶이 구겨져 있는 큰 조카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것이다.

‘선애도 좋은 시절을 만났더라면 저렇게 예쁜 시작을 준비했을 터인데’

어린 나이에 소녀 가장이 되어 여린 그녀의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이 얹혔었다. 그래도 그녀는 신통하게 모든 짐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마음의 허한 부분까지 견뎌내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방황이 녀석의 삶이 구겨지게 해버렸다.

‘선미에게 좋은 날이 시작되듯이, 선애에게도 좋은 날들이 오겠지.’

그녀는 기대를 가득 담아 소망으로 빌어본다.

커피숍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제각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믿음직한 신뢰에 마음이 푸근했다. 그에게서 어떤 어려운 문제가 닥쳐도 물러서지 않을 용기와 추진력을 보았다. 고마움과는 또 다른 감정이 점점 더 자랐다.

그렇지만 앞에 앉은 그는 표정이 무겁고 심각해 있었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녀는 조금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던 그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는 듯이 갑자기 표정을 풀고 쾌활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좋아, 결심했어.”

뜬금없는 그의 말에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눈으로 물었다.

‘무슨 결심인데?’

시선을 의식한 듯 그가 배시시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 부탁 하나 들어줘.”

그녀는 그의 웃음이 하도 순박해서 피식 웃을 뻔했다.

“뭐야, 뭔데 그렇게 순진한 척 웃고 있어!”

그녀는 그의 부탁이라는 것이 어디로 여행을 가자거나 하는 남자들의 상투적인 작전이라고 넘겨짚었다.

자꾸 뜸을 들이는 그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결혼하기 전에는 어디 여행을 간다거나 그런 거 안 해요.”

“누가 그러 재?”

“그럼 뭔데 그렇게 우물거려.”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 대한독립의군부 대원이 되게 해줘.”

그가 불쑥 내민 마음에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이 사람이 이 말을 꺼내려고 그렇게 망설였구나.’

그의 태도로 보아 많은 생각 끝에 꺼낸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진지한 자세가 되어 그에게 다시 물었다.

“대한독립의군부 대원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정의롭게 살면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일본을 무찌를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해.”

그는 많이 생각을 했다는 듯이 술술 대답했다.

“아니, 틀렸어. 우리들은 조용하게 살아야해.”

그녀의 말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멈칫하는 그를 향해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 이유를 말해줄게. 우리는 숨은 존재들이야. 조직이 필요할 때 필요로 하는 일이 생겼을 때 암약해야 하는 존재야. 세상의 어떤 정보망에도 드러나 있지 않는 신분이 우리 조직원들의 필수 사항이야. 가장 평범해야해. 그리고 누구에게도 쓸모없이 생각되어져야해.”

“세상의 모든 일에서 자유로운 존재라야 조직의 명령이 있을 경우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네. 내가 바로 그 적임자야. 나는 무척 평범해. 그리고 어디에도 댓글을 달거나 흔적을 남기지 않아. 내가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이 조직에 가담 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맞아, 이 길이 나의 길이야.”

“맞아. 민국 씨가 전에도 말했었지. 나도 그런 점이 특이하게 느껴졌고. 우리 조직원들의 행동 강령을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따르고 있다고 여겼었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자기가 포기했으면 좋겠어.”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적극 찬성하며 좋아할 줄 알았던 그녀의 반응이 생각과는 달라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줄 수 있어?”

“우리 지금 연인 관계인 것 맞지? 만약 자기가 조직에 들어오려면 우리 헤어져야해. 우리가 계속 만나서 결혼까지 생각하게 될 만큼 마음이 깊어졌을 때, 조직에서는 부부가 모두 대원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두 사람 중에 하나는 가족을 보호해야 해서야. 나는 자기와 헤어지는 거 원하지 않아.”

그는 말문이 막혔다. 조직에서 어떤 임무가 개개인에게 내려질지 모른다. 긴박한 상황에서 조직의 단합에 해가 될 수 있는 요인을 사전에 없애려는 것이다. 그만큼 조직이 늘 비상체제로 유지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런 조건이 있었구나. 그러면 나는 대원이 되는 거 포기해야겠네. 자기와 헤어지는 거 원하지 않아. 그냥 지금처럼 바깥에서 응원하고, 자기를 지원하며 살아야겠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자기의 신념을 꺾을 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줘서 기뻐.”

“자기 지금 내게 뽀뽀해주고 싶을 만큼 내가 좋구나. 그래도 이런 공공장소에서는 안 돼.”

그녀는 그의 너스레에 피식 웃고 말았다.

대신에 그녀는 그의 팔을 꼬옥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