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1912년 고종황제가 살아나려는 몸부림 끝에 최후의 돌파구로 비밀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황제가 인정한 하나뿐인 독립운동 단체.

그 자부심은 수많은 독립 단체들이 사라진 지금에도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만든 자양분이었다. 이들은 아직도 조국의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 일본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투쟁을 이어나갈 것을 결사로 다짐한 조직원들이다.

최선미는 고모를 통해서 이 조직의 존재를 접했다.

고모는 몸이 온전하지 못해서 대한독립의군부의 단원이 되지 못했지만, 독립운동 이야기를 좋아하던 그녀에게 이 비밀조직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었고 그 존재를 알고 난 뒤 그녀는 오랫동안의 수소문 끝에 그곳의 단원이 되었다.

“내가 수요 집회를 참관하게 된 것도 조직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어. 진행 현황을 보고하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일에 대비하려고. 그러던 중 집회를 여러 차례 참관하던 자기를 보게 된 것이지.”

“그런데 왜 오늘은 아무 행동을 안했어?”

“오늘은 내가 활동하지 않는 날이어서 다른 대원이 상황을 처리한 거야. 그리고 이제는 내가 감당 할 규모가 아니라서 좀 더 전문적인 사람들이 활동하게 된 거야.”

설민국은 가슴에 무엇인가가 용틀임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것은 몹시 복잡하고 다양한 것들이어서 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감정도 미묘했다.

“민국 씨 얼굴을 보니 생각이 많은 것 같아. 여자가 이런 일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혹시 불편한 거야? 아니면 내가 좀 더 일찍 말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거 절대 아니야. 나는 자기가 내게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 많이 고민했을 것 충분히 짐작해. 그리고 말해줘서 고맙고. 나는 지금 내 가슴속에 뭔가가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 단정 지어지지가 않아. 무척 복잡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거 같아.”

그녀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소년이 그 흥분과 감동에 겨워 볼이 밝고 불그레하게 상기되듯이, 그의 얼굴은 지금 달뜬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의 감정이 무엇이든 부정적이거나 나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다행스러웠다.

잠시 감정을 정리하고 있던 설민국이 말했다.

“우리가 전에 ‘온라인에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어.”

“맞아! 그때 난 민국 씨를 새롭게 봤어. 나는 내게 임무가 주어지고 그 임무들은 대부분 은밀하게 수행해야 하는 것들이어서 나를 나타내지 않으려 인터넷상에 댓글 다는 것 마저 조심했어. 적들은 엄청난 정보력으로 온라인의 모든 자료를 검색하니까. 그런데 자기가 나처럼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해서 놀랍고 의아했었지. 자기도 그런 이유였어?”

“아니, 나는 그렇게 구체적이지는 않았어. 단지 내가 앞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경우, 내 정체를 추측할 정보들을 여기저기에 남기지 않으려는 생각이었지. 자기 말대로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글로벌 다국적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력은 상상을 초월하잖아.”

“우리는 그런 공감대를 공유하고 있네!”

“나는 자기에게 ‘대한독립의군부’라는 단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 깊이 찾고 있던 대상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었어. 전장을 떠돌던 외톨이 장수가 자신의 목숨을 바칠 주군을 마침내 찾았다는 행복감이랄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네.”

“더구나 그런 자랑스러운 조직이 실제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자기가 그 일원이라는 생각은 심지어 내게 어떤 운명이 지워져 있다는 숙연한 생각마저 들게 했어.”

그녀는 그의 생각이 생각보다 깊어져 있음에 놀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고모를 생각하며 나는 과거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이라는 대상에게 목숨을 맡기는 분들이 있었다.’ 는 정도의 생각이었어. 그런데 지금의 눈앞에 있는 현실에도 그런 조직이 있고, 당장 내 앞에 그런 사람이 있어. 이게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야!”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해주다니! 내가 오히려 가슴이 뿌듯해지네.”

“뿌듯한 정도가 아니라 자부심을 가져야 돼.”

두 사람은 신뢰 가득한 마음을 담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이재길 변호사의 연락이 왔다.

변론기일이 나왔으니 다시 한 번 사무실에 방문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동안에 작성한 소장과 증빙들에 대한 원고의 의견을 확정해서 법원에 제출하는 절차도 필요했다. 최선미가 회사의 업무로 쉬지 못해서 이번에는 설민국이 고모를 모시고 사무실에 들렀다. 간단하게 커피를 마신 후, 세 사람은 서류 검토를 시작했다.

“변호사님! 자료가 엄청 방대하네요.”

이재길이 가져온 서류 더미를 보자 최윤경이 말했다.

그가 얼마나 이번 소송에 대해 준비를 많이 하고 있는지 넉넉히 짐작이 되었다.

“예, 어르신. 걱정했던 것 보다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그렇게 말했지만, 두 사람 앞에 내놓은 자료는 한 눈에 봐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료가 아니었다. 특히 그녀가 십년 넘도록 지속적으로 경찰에 자신의 과거 수감 기록을 요청했던 민원 내역이 담긴 서류가 인상적이었다.

“손에 들고 계신 그 자료가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이로운 증거물입니다. 어르신은 의도하지 않으셨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주 치밀하게 소송을 준비하신 듯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녀는 지난 세월의 고생이 되살아나자 쓴웃음을 지었다.

“권철식 그자가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저는 국가가 그런 자를 공무원으로 계속 자리를 차지하도록 방치한 책임과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부족했던 점을 가장 크게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재길의 눈에는 열정이 넘쳐있었다.

“저는 변호사님을 반크로부터 소개받으면서 그런 사명감을 가진 단체에 자문을 하시는 분이라면 제가 도움을 부탁드릴 수 있겠다는 바람정도의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변호사님을 뵈니 마치 이 소송을 기다리고 계셨던 듯 정말로 열과 성을 다하셔서 감사하다는 말이 부족할 지경입니다.”

설민국의 말에 그는 말없이 일어나서 책장에 있던 족보 한권을 들고 왔다.

“저는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에 일어난 것에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최 윤경이 물었다.

“예 어르신. 이 족보는 조선의 왕실 족보입니다.”

그는 족보를 펼쳐 보였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이희'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이 이름을 고종황제는 나이 들면서 사용했었다. 그리고 그 계보의 밑에 이재길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는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손자였다.

의친왕 이강은 일제에 결연히 맞선 흔하지 않은 왕족이었다. 1911년에는 ‘11월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고, 1919년에는 대동단 총재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였으며, 임시정부와 긴밀하게 소통하였다. 그는 일제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의 창씨개명 요구에도 결연하게 거절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황실이나 왕족을 따로 예우하지 않는다. 이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정책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도 왕족으로서의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할아버지의 기개를 이어받은 듯 왕족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말하고 있었다.

“제 조상들께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잘 경영했고, 지난 백여 년의 세월동안 자신과 집안의 안위에만 몰두하지 않고 부정부패한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통치를 했더라면, 저 열등하고 미개했던 일본보다 훨씬 부강하고 부유한 나라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참담하게도 수많은 기회를 모두 날리고 나라를 잃어, 백성들이 나라를 구하러 뛰어드는 사태를 일으켰습니다. 나라를 빼앗았던 일본을 욕하기 전에 제 나라를 간수하지 못하고 빼앗긴 사람들의 잘못부터 추궁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잘못 때문에 고통 받은 이 땅의 모든 분들에게 사죄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 조상들 중 그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보잘것없는 저라도 아주 하찮은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재판을 어르신이 제게 해결하라고 준엄하게 명령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야 제 조상들의 잘못으로 고생하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사죄를 받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크게 놀랐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흔쾌히 이 소송을 맡아서 소송 수고비를 받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그저 단순히 사명감을 가진 지식인 정도로 생각했었다.

“변호사님이 그런 사연을 가지고 계신 줄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왕족으로서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이 없을 수 없겠으나, 다만, 지난 역사를 외로이 짊어지고 계시니 너무 힘이 들까봐 염려스럽네요. 역사는 어느 하나의 사건이나 개인의 의지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얽힌 사회라는 조직의 시간이 역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제 일을 감당해주셔서 저는 무척 마음이 놓이고 고맙습니다.”

“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겁니다.”

최윤경의 말에 그는 깊은 감사를 표하며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