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으로 평화로웠다. 정애는 여전히 주부처럼, 엄마처럼, 색마처럼 자신과 아이에게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그나마 이어주는 끈이 민지였다.
“애 하나를 초등학교 입학시키는데 우리가 쩔쩔매고 있네.”
정애가 시간을 너무 빼앗기고 있는 마성에게 미안한 마음에 투덜거렸다.
“우리 귀한 딸이 처음으로 학교에 가는 거야. 뭐든 최고로 해주고 싶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그가 진심으로 고마운 그녀는 그의 팔을 꼭 안았다.
“아빠! 나 배고파.”
민지가 백화점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지친 듯 마성에게 매달렸다.
“나도 배고프네. 우리 백화점 옥상에 있는 스카이라운지로 갈까?”
“응! 나도 거기 가보고 싶었어.”
마성은 어느새 정애에게 붙잡힌 팔을 풀고 민지를 감싸 안은 채 정애는 안중에도 없는 듯 둘이서만 대화를 하며 앞장섰다.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거야?”
뒤를 따르며 정애가 푸념했다. 그렇지만 앞장서서 가는 두 사람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진하게 밀려드는 소외감을 뒤로하고 하는 수 없이 그녀도 서둘러 뒤를 쫒았다.
‘저이는 민지가 진짜 자기 딸인 줄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니까.’
사실 마성이 그녀의 외도를 알면서도 이 가정을 유지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민지 때문이었다. 민지도 자신도 피로 얽혀 있지 않음을 익히 알고 있지만, 혈육이 아니라는 생각은 서로가 조금도 가져본 적이 없던 것 같았다. 그것은 마성 자신에게 자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무어라 정의하기 힘들지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사실상 의식의 수준을 넘어선 본능의 요구였다.
“주말농장에 숙박이 가능하도록 해달라는 거야? 이 남자가 숫제 협박을 하는군.”
박진수의 보고를 받은 김차관은 기가 막혔다.
“박비서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김차관은 애꿎은 박진수에게 화를 내었다. 그렇지만 그는 양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랜 동안 그 아이에게 빠져 있었구나.”
다시는 가질 수 없을 명기를 이렇게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 아쉬움은 권력과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비교대상조차 되지 않을 사소함이었다.
수도권에서 운영되고 있는 오천평 이상의 주말농장만 합쳐도 50곳이 넘었다. 전국적으로 본다면 수백 곳에 이를 것이다. 마성의 요구는 기존의 주말농장 업주들이 간절하게 바라던 숙원사업이었다. 그렇지만 정상적인 숙박행위까지는 불가능하다고 해도 유사 숙박업을 용인한다면, 기존 숙박업소들의 거센 저항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그로 인한 정치적 후폭풍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정치적인 앞길도 기약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그를 몰아세웠다.
“오늘부터 그 아이의 행동을 통제해. 만약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박비서가 알아서 처리하고.”
선택의 결과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 남자에게는 주말농장에 컨테이너를 놓는 정도의 쉼터와 오폐수 시설까지는 가능하도록 허락하겠다고 전하고.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거 단단히 못 박아 두는 것도 잊지 마!”
말을 마친 김차관이 휭하니 돌아갔다. 단단히 화가 난 것이다.
‘이 여자를 내가 가만히 두나 봐라.’
그토록 조심하리고 주의를 줬지만, 말귀를 못 알아듣고 기어이 사고를 쳐 자신까지 궁지에 빠트린 정애에 대해 박비서는 어떻게 응징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단 하루도 부대끼지 않은 날이 없었다.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같은 생을 살라고 한다면 단연코 거부할 것 같은 삶이었다. 그 인생에 단 하나의 웃음이 있다면 그것은 연지였다.
‘오로지 단 한 가지, 단 한사람에게만 미안하구나!’
골프장을 봄맞이 임시개장 한다는 단톡이 휴대폰에 올라왔다.
‘골프장을 모레 금요일부터 임시개장 합니다. 모든 하우스 캐디에게 금,토,일에 각각 1회 이상씩 일이 주어질 것으로 예상되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통보되는 스케쥴에 착오 없도록 준비하고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때가 다가왔다. 더 이상의 미련을 포기할 때였다. 현균은 문구점에서 구입한 전지 여러 장을 방바닥에 펼쳤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평등함과 공평함을 찾아 헤매는 방황을 마치려 한다. 모든 생명체들이 공평함을 누리는 세상을 꿈꾸었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곳을 찾으며 살았다. 한때 골프장의 카트도로에서 감동을 얻었었다. 부와 권력과 처지를 벗어나 하나의 규칙에 따르는 신성함과 고결함이 존재하는 곳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다른 세상보다 더 극심한 차별과 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며 알아버렸다. 얼마 전 짧을 삶 중에 얻은 작은 권력에 기대어 우월함을 누리려던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볼품이 없었다.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빼앗아 얻은 편리함과 풍요로 오직 사람만이 행복한 현실은, 권력과 부를 무기로 다른 사람을 핍박하고 궁핍하게 만드는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삶에 더 이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살아보려고 버둥거리는 것은 차라리 욕망이다. 권력을 향한 욕망과 부를 향한 욕망처럼, 삶에 대한 헛된 욕망도 졸렬하고 하찮다.
차분하게 지난 삶을 돌아보며 써내려가는 대자보는 차라리 절망으로 얼룩진 절규였다. 이 세상에 분명히 있어야 할 것들이지만 어디에도 있지 않은 허망한 바람들! 생태계의 약육강식이라 미화해본들, 성에 차지 않는 찜찜함이 남아 있는 인간들의 욕구와 허기.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가지고 횡행하는 핏물 가득한 낭만과 행복. 수 십 억년의 지구 역사에 갑자기 등장해 30만년을 생존하고 있는 호모사피엔스의 만행. 불과 몇 만 년 더 유지될 유한한 존재들이라는 것임을 애써 외면하는 이 생명체들. 그러나 이 생명체들의 유한함은 다행히도 다른 생명체들에게 희망이고 아량이다.
대자보 작성을 마친 현균은 전지를 둘둘 말아들고 한밤중에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온통 대형유리로 지어진 그곳은 대자보를 붙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휴대폰 불빛을 이용해 유리창에 붙인 대자보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가던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비통함으로 다리가 꺾여 주저앉았다.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 다시 일어선 그는 주머니에서 커터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손목을 그어 흘러내리는 피로 대자보에 혈장을 찍었다. 잘려나간 손목의 아픔마저 잊은 그는 카트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방향 없이 걸었건만 그의 발걸음이 연지와의 추억이 깃든 홀의 그린에 다다랐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잘려진 손목에서는 계속 피가 솟았고, 그 피는 카트도로에 점점이 찍혔다. 이제 그이 몸에는 피가 부족해졌다. 빙 도는 현기증이 그를 그린 가장자리에 눕혔다. 창끝처럼 날카로운 초승달이 그의 가슴을 다시 한 번 깊게 찔렀다.
이른 아침부터 캐디 단톡방이 불이라도 난 듯 울려대기 시작했다. 수 십 번을 계속 울려대는 바람에 연지는 하는 수 없이 눈을 뜨고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현균아, 왜 그랬어!”
톡을 읽어 내려가다가 멈춘 그녀의 눈에서는 마냥 눈물만 흘러내렸다. 이상하게 눈물만 흐를 뿐 충격을 받거나 놀라지는 않았다.
‘네가 이럴지도 모른다고 내 마음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구나!’
지난 며칠 동안의 행복이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았고, 불안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을 때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의식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무의식은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이다.
‘이렇게 떠나려고 네가 내게 기억과 흔적을 남겼구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면서도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는 이유다.
연지는 옷매무새와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그의 몸을 확인하고 자신의 손으로 수습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경찰들이 도착해 있었고 대부분의 직원들과 캐디들이 모여 있었다.
“연지야, 어떻게 하니.”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모두는 안타까움을 전했다. 모여들어 안타까움을 전하는 회사 사람들 덕에 경찰은 그녀를 죽은 이의 대리인으로 인정했다. 그의 피가 배인 대자보를 손수 거두고, 그가 남겨둔 핏자국을 따라 카트도로를 걷던 연지에게 그의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여기를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 길 위에서는 항상 평등해. 내가 여기에 서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고 기뻐. 지구상에 오직 여기에만 평등과 공평함이 존재하니까!”
그렇게 환하게 웃던 그가 이제는 그 길에 피를 뿌리고 떠났다.
‘아가야, 너는 이제 아빠도 없이 나와 둘이만 세상을 살아나가야 하는구나.’
아직은 상징에 불과한 생명에게 그녀는 ‘이 생명을 온전하게 지켜 키워나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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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