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시죠!”

마트에 다녀오던 정애는 갑자기 카메라를 켜고 마이크를 들이미는 사람들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오늘은 저녁을 먹고 가겠다는 김차관의 연락을 받고 저녁꺼리를 사들고 오는 길이었다. 마성과 민지에게는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고 둘러 대면 될 일이었다.

“이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시는 주민들의 민원을 취재차 나온 취재진입니다.”

당황해서 뒷걸음질 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그들은 취재진이라며 서둘러 말했다.

“아! 그러세요.”

조금 안심을 한 그녀는 그들의 질문에 성심껏 대답을 하였다. 길지 않은 인터뷰였고, 질문 내용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들이 그녀만 인터뷰를 하고 철수를 하는 것이 약간 의아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늦지 않은 시간에 집에 들른 김차관은 저녁을 먹기도 전 그녀의 몸부터 탐했다.

“배고프겠네. 자기는 내가 식상하지도 않아?”

“매번 할 때마다 색다른걸! 당신은 마르지 않는 샘물 인가봐. 자기는 아마 적절한 자극만 계속 받는 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을 걸!”

“체력이 문제지만 전 백 번이든 천 번이든 가능해요. 다 그런 거 아닌가?”

“당신만 그런 거야. 아마 천만 명에 하나 정도나 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내가 설마 그럴까.”

“그렇대도.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목을 매고 있지.”

저녁을 마치고 한 번 더 지상 최고의 극치감에 이른 뒤, 집을 나서며 김차관이 말했다.

“당신이 잘 알아서 처신할 줄 믿지만, 우리의 이곳 생활이 외부에 드러나면 내게 아주 치명적이야. 자기가 잘 하고 있겠지만 박비서가 걱정을 많이 해. 그 친구 안심 좀 하게 해 줘”

“박비서가 조심성이 과해보이고 내게 너무 꼰대처럼 굴어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다 자기를 위해서 그런다는 거 잘 아니까 제가 더 신경 쓸게요.”

“이 영상을 촬영한 곳이 정애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아파트가 맞습니까?”

마성은 사설경비업체에서 제출한 영상자료와 그동안의 보고서를 받고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의뢰를 했지만, 막상 받아 든 자료는 그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다. 그녀가 왜,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녀가 낮에 머무는 그 집에는 누가 있다는 말인가. 꼬리를 무는 궁금증에 마성은 잠복을 해서라도 자신이 직접 확인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고급 주거지로 손꼽히는 그 아파트에서 정애를 찾아내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곳이 자기 집이라도 되는 듯 산책을 하고 마트에 들르고 편의 시설을 이용하는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그곳 주민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사는 동과 호수를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일상의 아무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녀는 태평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먼발치에서도 그녀가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만족하며 지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배신감과 궁금증 중 무엇이 큰지 모를 만큼 그는 힘겨웠다. 비록 반년이 넘는 생활로 그녀에게 처음에 느꼈던 신비로움과 명품을 품는 감흥이 비록 작아지기는 했다지만, 그 느낌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것과, 상대방을 속이며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서 받는 배신감은 상상 이상의 고통이었다.

절치부심하며 여러 날 동안 수고를 한 덕에 ‘그녀의 남자’가 누구인지까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중생활이 가능하도록 곁을 지키고 있는 또 한명의 존재까지 확인되었다.

‘유력 정치인이 첩을 두고 이중생활을 한다.’

김차관을 마성은 익히 알고 있었다. 물론 김차관은 마성을 전혀 모를 것이다. 그는 레저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승의 염라대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말 한마디에 사업의 존폐가 달렸고, 그의 힘을 빌면 바꾸지 못할 정책이 없었다. 그런 사람과 이중생활을 하는 정애는 그로서는 현실을 감내하고 인정해야 하는 이겨내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날 밤 마성은 무력감과 패배감으로 이성을 잃을 만큼 술을 퍼마셨다. 그의 곁을 지키며 고통을 나누던 3명의 절친들도 그를 위로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박진수 비서님!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김차관님께 민원을 드릴 사항이 있으시면 해당 부서의 민원실을 찾거나 차관님을 직접 뵈어야하지 않나요? 왜 저를 찾으셨는지 의아합니다.”

마성은 꽤 공을 들여 박진수와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이미 정애의 이중생활은 돌이키기 불가능 한 것임을 그는 인정했다. 그렇지만 한 여자를 둘이 공유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에 걸 맞는 조치가 요구되어야만 납득되거나 인정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최종 판단을 내렸다. 사업 동지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과 의견을 나누고 숙고한 결과 적절한 대안을 찾았고 그 결과를 김차관에게 요구할 생각이었다.

“김차관님을 뵙기 전에 박비서님께 확인 해둘 일이 있거든요. 비록 제 민원이 정당하거나 떳떳한 방법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비난 할 자격이 두 분에게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는 사진 몇 장을 테이블에 꺼냈다. 박진수는 아무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고 태연한 척 커피 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렇지만 그의 손끝의 흔들림을 마성은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정 여사님과 어떤 관계이신지 물어도 됩니까?”

“사실혼 관계로 같이 생활 중입니다.”

박비서는 눈앞에 있는 정애의 남자가 이미 많은 것들을 파악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 남자의 회사가 어떤 종류의 일을 영위하는 업체인지는 예전의 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사장님은 저희와 거래를 원하십니까?”

이 남자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굳이 자신을 만나려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를 계속 온전하게 자신만의 여자로 소유하려는 목적도 아님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하는 사업에 작은 혜택을 얻는다면 차관님께서 이 생활을 계속하는데 제가 장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문제를 삼지 않고, 현재의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 가능할까요?”

남자와 여자간의 문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박진수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업이 최우선입니다.”

“그러시다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시지요.”

박진수에게 이번 건은 딜이 가능한 상황임이 파악되었다.

젊은이들에게 스키는 골프보다 더 낭만이 있는 운동이었다. 그곳의 짧은 추억이 두 사람을 더욱 끈끈하게 맺어주었다. 골프장 개장이 아쉬우리만치 행복한 날들이 이어졌다. 쉬는 날이면 수입이 생기지 않는 두 사람에게 봄은 무척 기다려지는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흘러가는 날들을 잡아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단톡방에 올라온 문자는 행복한 시절이 어느덧 끝났음을 알렸다.

“다음 주 금요일부터 예약 받는대.”

“나도 확인했어. 아쉽다. 이제 치열한 삶의 현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네.”

“너는 잘 해낼 거야.”

“너는 뭐 딴 세상으로 가냐? 우리 앞에 똑 같이 닥칠 현실인데 남의 말 하듯 하네.”

그녀의 핀잔에도 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너도 이제 2년차가 되니까 작년 보다는 한결 쉬울 거야.”

“그럴까? 이제 또 신참들도 많이 들어오겠지.”

“앞으로 며칠은 준비물 챙기고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하니 바쁘겠지. 우리 그래도 자주 문자하고 전화하기다.”

“여부가 있겠냐. 준비 잘 하고 건강하게 잘 있어라.”

“너 말투를 계속 이런 식으로 뱉을래?”

확 짜증지수를 올리는 그녀를 현균은 웃으며 달랬다.

“못 본다 생각하니 아쉬워서 그런다!”

“영영 못 보는 거 아니다. 며칠 못 보는 걸로 그렇게 찡얼거리다니! 내가 마음이 넓으니 좋게 생각하고 용서한다.”

연지는 살가운 마음으로 그의 볼에 뽀뽀를 하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보기 좋은 미소를 띠우며 그가 돌아섰다.

현균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차마 이번 봄에는 그린에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이미 무너져 있던 골프장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공정과 평등이 한겨울에 있었던 정애의 무뢰하기 그지없는 침범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이 세상 어디에 가서 이상과 희망을 되살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전전긍긍하던 그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평온해졌다. 포기를 하자 찾아온 평화는 잠시 동안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유를 선물했다. 포기함으로 얻은 마음의 평화는 그에게 스스로의 선택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망설임 없이 최후의 몸부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연지와 자신에게 허락되어준 시간에 그는 감사했다.

현균은 차분하게 삶의 마지막 여정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