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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의 죽음(5) | 나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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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베 단편소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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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의 죽음(5)
2016-08-11 오전 11 조회 2331추천 3   프린트스크랩


5. 동방의 등불

앙시베시에 돌아와서도 루이는 계속 우울하였다.
 하루는 바람도 쐬고 기분전환도 할 겸 사나리 쉬르메르 항구를 찾았다.
신문가판대 앞을 지나는 루이의 눈에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가판대 위의 신문에 ‘동방의 작은 나라의 자유 ’라는 소제목으로 한국전에 참전할 유엔 산하 프랑스대대에 자원할 현역과 예비역을 모집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루이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음, 작은 나라의 자유와 나의 자유의지라...”
신문을 잡고 있는 루이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앙시베시로 향하는 루이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머리는 맑아졌다.


프랑스대대는 마르세이유 항구에서 수송선에 승선을 하였다.
프랑스대대는 3개 소총중대와 본부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1중대는 주로 해병대 출신이었고, 2중대는 수도 방위부대출신, 3중대는 공수부대와 외인부대출신이었다.


대대장 몽클라르 중령이 소령으로 진급한 루이를 찾아왔다.
 “2대에 걸친 레종도뇌르 수훈자와 함께 활동을 하게 돼서 참으로 영광이오”
루이가 몽클라르 중령이 내민 손을 잡으며 답례했다.
“장군님을 모시게 돼서 제가 영광입니다.”
루이는 몽클라르가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몽클라르 중령은 헝가리 출신 이민자로 프랑스 육사를 졸업한 후 1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제 13외인 반 여단을 이끌고 노르웨이의 나르빅 전투에 참가하여 독일군을 무찔렀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프랑스에 남은 가족의 안위를 염려하여 본명인 라울 샤를 마그랭 베르느네를 가명인 랄프 몽클라르로 바꾸고 영국으로 탈출하였다.
드골이 창설한 자유프랑스군에 합류한 몽클라르는 북 아프리카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많은 공을 세워 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중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유엔 산하 프랑스대대를 창설하는데 많은 힘을 보탠 몽클라르는 대대를 지휘하는데 장군계급이 맞지 않자 스스로 계급을 중령으로 강등하여 프랑스대대장직을 맡았다.


수송선은 수에즈운하를 지나고 홍해를 건너 인도양으로 접어들었다.
 풍랑이 심해져서 많은 병사들이 멀미에 시달리었다.


부산 앞 바다에서 바라본 한국 땅은 프랑스 남부의 경치와 크게 다르지 않아보였다.
푸른 바다와 해안선의 절벽과 산이 잘 어울려 있었다.
다만 11월 말의 한국날씨가 프랑스보다 훨씬 더 추웠다.
병사들은 추위에 떨며 부산항에 첫발을 내디디었다.
루이는 감개무량하였다.
 마르크 폴로도 와보지 못한 신비의 땅에 발을 디딘 것이었다.


프랑스대대는 미군 제 2보병사단 23연대에 배속되었다.
 한국군 카추샤 80명과 일반병 100명이 지원중대로서 프랑스대대에 배속되었다.
 일반병들은 나이가 어려 이들을 보자 루이는 고등학교 때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2주간의 적응 훈련을 마친 부대는 북으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동안 트럭 주위에 첩첩산중의 경치가 펼쳐졌다.
한 병사가 말하였다.
 “이곳은 평평한 땅을 신이 마구 심술궂게 구겨놓은 것 같군”
그 말을 듣고 루이는 그 신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모험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산이 있으면 누구나 그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한다.
그리고 그 산 너머로 가보고 싶어 한다.
 산이 너무 높아서 가기가 힘들면 아마 처음부터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의 산들은 대개가 낮은 산부터 첩첩이 높아진다.
앞의 낮은 산에 금세 올라서면 새로운 경치와 함께 저만치 또 적당한 높이의 산이 가로놓여있다.
그 산까지는 자그마한 오솔길이 있게 마련이다.
 어찌 가보지 않을 수가 있으랴!  마치 재미있는 수수께끼를 보면 꼭 풀고 싶어지는 마음처럼 말이다.


수원에서 소규모의 전투를 치르고 부대를 정비한 다음 23연대는 중앙선의 쌍 터널 쪽으로 이동하였다.
 23연대는 미군 1,2,3대대와 프랑스대대, 105mm와 155mm의 포병대대, 방공포중대와 전차중대로 구성되어있었다.
 연대장은 프리먼 대령이었다.
프리먼 대령은 쌍터널 일대의 중공군을 격멸하고 일대의 고지를 점령하여 수원으로 가는 도로를 방어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쌍 터널 부근에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부대를 배치한 다음 제1대대와 제 2대대의 인원 일부로 정찰대를 구성하여 쌍 터널 쪽으로 보냈다.
이 정찰대는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이들을 구출하고자 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3대대와 프랑스대대를 급파하였다.
정찰대를 구출한 프랑스대대와 3대대는 그 부근의 고지를 점령하여 중공군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1월 31일의 밤이 깊어갔다.
엄동설한의 추위에 동동거리던 프랑스군은 불을 피워서 몸을 녹이었다.
몽클라르 대대장한테 무선 전화가 왔다.
 “나 연대장인데 불을 피우셨습니까?”
“예, 부하들이 너무 추워해서 잠시 피우도록 했습니다.”
 “아니 적에게 우리 위치를 노출시킬 작정이십니까? 당장 불을 끄십시오.”
 “예, 알았습니다.”
불은 금방 꺼졌다.
프랑스 병사들은 추위도 이길 겸 모두 대검을 꺼내어 칼날을 갈았다.
칼날을 갈아놓으면 적에게 빨리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사소한 차이이지만 순간에 죽고 사는 육박전에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2월 1일 새벽 2시경 중공군 제 125사단 예하 2개 연대가 공격을 개시해왔다.
프랑스대대는 연대본부에 연락하여 야포의 사격을 요구하였고 105mm포와 155mm야포가 중공군지역에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포화에 난타당하면서도 중공군은 포화를 뚫고 계속공격을 해왔다.
 박격포와 기관총과 소총이 불을 뿜었다.
적들은 시체를 넘어서 계속 전진해왔다.
마침내 수류탄이 작렬하고 적 1개 대대의 인원이 샤프롱소위가 지휘하는 소대 쪽으로 전진해왔다.
소대가 뚫리면 대대전체와 연대에게도 위험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샤프롱소위가 명령하였다.
 “전원 착검”
소대원들은 잘 갈아놓은 대검을 소총에 장착하였다.
그리고 철모를 벗고 빨간 수건을 머리에 둘렀다.
 “돌격”
샤프롱소위의 명령에 따라 소대원들이 악귀와 같은 괴성을 지르며 적군사이로 짓쳐 내려갔다.


중공군 분대장 이밍은 총신에 대검을 걸었다.
 곧 이어 있을 육박전에 대비함이었다.
 팔극권을 연마한 이밍은 이미 여러 번 미군과 국군을 상대로 한 육박전에서 공을 세워 영웅 칭호까지 받았다.
 쑤저우에서 도삭면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도삭면 기술을 배워 주방에서 일하고 있던 이밍은 형제국을 응원하자는 벽보를 보고 전쟁에 참가하였다.
 상하이에서 열차를 탈 때 홍기를 흔들면서 환호해주던 여학생들을 생각하면 엄동설한에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마침내 적진으로 돌진할 찰나였다.
갑자기 산 위에서 악마의 외침과 같은 괴성과 함께 앞서가던 병사들이 우르르 밀려 내려왔다.
 “야, 올라가라”
악을 쓰며 외쳤지만 밀려 내려오는 병사들과 부딪쳐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이밍의 몸 위로 군화들이 짓밟고 지나가고 이어서 허벅지에 대검이 꽂히었다.
 해가 뜰 무렵 이밍은 포로로 붙잡히었다.


프랑스 소대의 전면에 수십 구의 중공군 시체가 보였다.
프랑스 소대의 피해는 부상자 2명뿐이었다.
이 전투로 샤프롱 소위는 미군으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이 무모한 반자이 공격으로 쓸데없이 희생당하는 것을 본 미군은 총검돌격을 마뜩 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이번 전투 후에는 총검돌격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프랑스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총검돌격은 보병전투의 기초중의 기초인데 미군들이 너무 호들갑 떠는 거 아냐?”


루이는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중에 중공군 포로도 치료하게 되었다.
허벅지에 깊은 자상이 있었다.
상처를 소독, 세척하고 봉합한 후 소염제와 항생제 주사를 놓아주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보였다.


23연대는 쌍 터널 전투 후에 지평리로 이동하였다.
 10군단의 왼쪽 끝에 위치한 23연대는 왼쪽의 9군단과 접촉해 있었다.
 10군단과 9군단이 모두 북쪽으로 올라가 있어서 지평리는 비교적 후방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중공군의 2월 공세가 시작되자 10군단과 9군단이 남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지평리는 최전방으로 변하고 말았다.
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2사단장과 10군단장 알몬드에게 후퇴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사령관 실에서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보이지 않게 은밀히 이동하여 어디에 주력이 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보이는 곳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23연대가 철수하면 안 되었다.
 현 위치에서 버티면서 최대한 적의 주력을 끌어내야 했다.
그래야만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적을 섬멸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끌려 다닐 수는 없었다.
 23연대의 희생은 안타깝지만 승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10군단의 지휘권도 8군의 휘하에 두도록 이미 조치를 취해주었다.
리지웨이는 웨스트 포인트 시절에 읽은 '손자병법‘이 생각났다.
손자의 후예들을 상대로 손자병법의 고육지계를 펼칠 참이었다.


리지웨이는 전화기를 붙들었다.
23연대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23연대장 프리먼입니다.”
 “나 8군사령관 리지웨이요”
프리먼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8군 사령관이 군단과 사단도 거치지 않고 직접 연대장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저절로 부동자세가 취해졌다.
 “예, 말씀 하십시오”
 “23연대는 절대 철수하면 안 됩니다. 최대한 지원해 줄 테니 그 자리를 사수 하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꼭 사수하겠습니다.”
프리먼은 분골쇄신 현 위치를 고수하기로 스스로 다짐하였다.


23연대는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다.
중공군 총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팽덕회는 부사령원 등화에게 지평리의 미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등화는 중공군 제 39군과 제42군 일부를 재정비해 지평리 포위작전에 나섰다.
오천여명의 연대병력이 9만 명이 넘는 중공군에게 에워 쌓였다.
프리먼 대령은 지름이 1.5 km쯤 되는 원형진지를 편성하고 가운데에 105mm 포와 155mm포를 배치했다.
 대공포와 전차포는 모두 직사가 가능한 지점으로 옮겨서 적절히 활용하도록 조치하였다.

북 쪽은 1대대, 남쪽은 2대대, 동쪽은 3대대, 서쪽은 프랑스대대를 배치하였다.
 철조망을 이중 삼중으로 치고 철조망 밖에는 네이팜탄과 지뢰를 묻었다.
병사들은 모두 참호를 깊게 파고 대비하였다.
루이도 수술실을 깨끗이 청소해 놓고 수술도구와 의약품을 정비하여 부상자 치료에 만전을 기해놓았다.


2월 13일 밤에 중공군이 야포와 박격포의 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대거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방에 밀려오는 적의 횃불이 넘실대었다.
연대본부에 300발이상의 적 포탄이 날아들어 프리먼 대령이 부상하고 군수참모가 전사하였다.
23연대의 야포도 진지 주변에 빈틈없는 탄막을 구성하고 분당 250발의 가공할 위력으로 중공군에게 포격을 퍼부었다.


중공군은 피리와 꽹과리 소리로 서로 연락하면서 전진하였다.
몽클라르는 적이 2차 철조망에 다다를 때까지는 사격을 금하였다.
적이 일차철조망을 넘고 이차 철조망에 다다르자 사격명령을 내렸다.
철조망 사이의 중공군이 모두 쓰러지자 사격을 멈추었다.
이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 하고 적이 3차 철조망에 다다랐을 때 각 중대에 배속된 비상 사이렌을 울리도록 하였다.
‘왜애애애앵”
처절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적들의 피리와 꽹과리 소리는 금세 묻히고 말았다.
적들은 신호체계가 혼동되자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아군의 사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그러나 워낙 많은 적의 인원인지라 시체를 넘고 넘어 계속 전진해왔다.
 적이 드디어 아군의 진지로 들이닥칠 태세였다.
 몽클라르 대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전원 착검”
병사들은 대검을 소총에 꽂고 철모를 벗은 다음에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둘러메었다.
몽클라르의 다음 명령이 내려졌다.
“전원 돌격”
“이야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프랑스군이 진지 앞으로 돌진하였다.
중공군이 볏단 쓰러지듯 뒤로 밀려나갔다.
 순식간에 중공군은 패퇴하였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서 아군의 전투기와 전폭기가 적을 두들겨대어 적은 주변의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23연대는 진지를 강화하고 진지 앞에 잠복하고 있던 중공군들을 토멸했다.
오전에는 강풍과 적의 박격포 및 야포사격으로 부상병의 헬리콥터 후송마저 어렵게 되었고, 또한 강설로 기상이 악화되어 유엔 공군의 항공지원도 어려웠다.
12시 경에 헬리콥터 한대가 강설을 뚫고 기지에 착륙하였다.
병사들은 눈을 의심하였다.
헬기에서 내린 장군이 가슴에 수류탄 두발을 메고 있었다.
 리지웨이가 아닌가?
 병사들은 환호하였다.
리지웨이는 진지를 돌며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병사들은 용기백배하였다.
루이도 악수를 건네었다.
프리먼 대령은 중상에도 불구하고 후송을 마다하고 계속 지휘를 하겠다고 고집하였다.
리지웨이가 출발한 후에 날씨가 좋아져서 15시에는 일본에서 발진한 수송기 24대가 세 시간에 걸쳐 미 23연대 집결지에 보급품을 투하했다.


2월 14일 밤이 되자 중공군은 또 다시 신호탄을 올리고 피리와 나팔을 불며 야습을 시작했다.
전날 2개 사단이 동시에 공격하여 실패한 중공군은 이날 밤 2개 사단을 추가하여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날 밤의 공격에서 중공군은 23연대의 남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2대대의 G중대 진지를 탈취하기도 했지만 중포중대가 황린 탄을 집중 발사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 날 밤에는 진지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는 등 어제보다 더 격렬하게 전투가 벌어졌지만 23연대는 끝까지 잘 막아내었다.
먼동이 트면서 중공군은 물러갔다.


한편 리지웨이의 23연대 구원명령을 받은 제 9군단은 제 5 기병연대장 크롬베즈 대령의 이름을 딴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지평리로 파견하였다.
크롬베즈는 탱크 23대에 보병 160명을 싣고 지평리로 전진하였다.
 공중엄호를 받기는 했으나 강력한 중공군의 저항에 부딪쳐 지평리에 다다랐을 때에는 보병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였다.
 마침 23연대의 전차가 밖으로 나가 중공군을 협격함으로써 이들 전차 부대는 연결에 성공했다.
이 광경을 본 23연대의 장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15일 밤 23연대는 조명탄을 밝히고 중공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중공군은 공격해오지 않았다.
미군의 증원부대가 속속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한 중공군이 공격을 포기한 것이었다.
 결국 23연대는 승리하였다.
장병들에게 선물로 막걸리라는 한국 술이 몇 통씩 배달되었다.
 이 지방에서 만들어진 술이라고 하였다.
 호기심 어린 장병들이 처음에는 홀짝 홀짝 맛보다가 나중에는 사발로 쭉쭉 들이켜 대었다.
전쟁의 피로를 막걸 리가 깨끗이 씻어주었다.


지평리 전투가 끝난 후 프랑스대대는 홍천으로 이동하였다.
홍천과 인제사이의 도로를 방어하는 것이 부대의 임무였다.
전투가 소강상태가 되어 부상자가 없을 때에는 루이는 인근의 마을로 진료를 나가 다치거나 아픈 주민들을 치료해 주었다.
치료를 마치고 나서 주민들이 감사의 표정을 짓는 것이 참으로 밝고 순수해 보였다.
 봄이 되어 온산에 꽃이 피고 홍천강의 얼음이 녹아서 맑은 물이 흘러내려갔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치였다.
루이는 전쟁이 끝나고 이곳에 병원을 차려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생활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상상하였다.
 갑자기 앙시베시의 어머니가 몹시도 그리웠다.


5월초가 되어 온산과 들이 신록에 물들어있을 때였다.
의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군 2명이 중공군이 깔아놓은 지뢰에 부상당해서 위급하다는 전화였다.
급히 구급차에 올라 현장으로 달리었다.
구급차를 길에 세우고 진료가방을 들고 논두렁을 지나서 산으로 올라갔다.
두 명의 국군은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상처를 소독하고 지혈을 한 다음 들것에 실어 구급차로 운반하게 하였다.
두 명의 부상자가 운반되어간 다음 루이는 가방을 들고 논두렁 쪽으로 발을 떼었다.
발밑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폭발음이 들리며 몸이 위로 붕 떴다.
저 앞에서 줄리안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루이는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그러나 점점 발의 힘이 빠져갔다.
줄리안은 멀어져갔다.


설악산에서 홍천방면으로 오던 병석은 막국수가 먹고 싶어서 두촌면에 이르기 전에 승용차를 구 길로 돌렸다.
길가에 조그만 공원이 있고 동상이 서 있었다.
줄장루이 소령의 동상 이었다.
공원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었다.
아내와 딸은 코스모스 구경을 하러가고 병석은 동상의 설명문을 읽어보았다.
설명문을 다 읽은 병석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병석은 동상을 향하여 깊이 머리를 숙였다.


집에 돌아온 병석은 인터넷에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을 찾았다.

[ 인간애 넘치는 유능한 군의관이 한국 땅에서 34세의 생을 마감했다. 비통함을 이기지 못한 그의 모친도 세상을 떠났고 몇 년 뒤 그의 누나마저 숨을 거둬 프랑스에 그의 가족은 아무도 없지만 그는 우리 가운데,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다. 그의 희생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끝.

┃꼬릿글 쓰기
팔공선달 |  2016-08-11 오후 12:10:1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군의관 가족이 모두...
수고많았습니다  
짜베 그 분들 덕분에 현재 우리가 승용차를 몰고 여행을 다닐수 있게되었다고 봅니다
육묘법문 |  2016-08-11 오후 1:19:0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홍천에 추념비가 있군요...
덕분에 좋은 역사를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나폴레옹의 후예라는 말이 인상깊네요.. ^^
 
짜베 홍천군과 사나리쉬르메르시와 현재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홍천에서 매년 줄장루이 소령의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youngpan |  2016-08-12 오전 10:46:3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눈물이 맺히네요..아름다운 멋쟁이 군의관 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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