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하루-출근길

아침 5시45분 알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몇 번을 울리는데도 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내 핸드폰이라면 한 번 만에 즉시 스톱인데 마누라는 잠귀가 어둡다.

오사카에서 신혼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밤늦게 돌아왔는데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일어 나질 않아서 창문에 돌을 던져서 깨운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잠귀만 어두운게 아니라 TV를 볼때나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때 말을 걸면 10초쯤 뒤에야 대답이 온다.

듣고는 있는데 반응을 제때제때 하지 않는 것이다.

열이 받치고 받쳐서 손에 집히는대로 냅다 던졌더니 그 때만 조금 나아질뿐 시간이 지나면 도루묵이다.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마누라를 발로 밀어서 깨웠다.

마누라가 아침준비하러 나가고 난 후의 짧은 10여분의 비몽사몽 몸을 뒤척이는 시간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다.

6시정각에 내 핸드폰의 알람이 울린다.

1초만에 끈다.

아침은 현미죽이다.

저녁에 물을 부어 두었다가 아침에 살짝 데우기만 하면 되므로 별 수고랄것도 없다.

반찬도 맛김 한 봉지에 두부 한 조각 정도이다.

TV는 아침방송은 동해방송에 고정이다.

6시 10분에 일기예보, 13분에 스포츠와 뉴스, 17분에 화젯거리, 그리고 24분에 작은 경품이 걸린 시청자퀴즈를 시계대신으로 보고는 바로 출근이다.

화요일과 금요일은 태우는 쓰레기, 수요일은 재활용비닐, 한 달에 한 번 목요일은 폐기처분품을 들고 나선다.

6시30분 집출발.

출근은 산을 넘는 길이다.

산길 입구의 편의점까지 45분을 끊어야 산을 지나서 큰 길로 나갔을 때 차가 많이 밀리지 않는다.

이 45분을 끊느냐 못끊느냐에 하루중의 첫번째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집을 출발해서 논길을 지나고 큰길로 접어들어도 도로는 한산하다.

달릴수 있을때 가능한 한 많이 달려 놓아야 하는데 꼭 한 두 대 느린차가 있다.

느림보를 어디서 만나는가에 따라서 회사 도착시간이 10여분 차이가 난다.

오늘은 운이 없는가 보다.

큰길에 나서자마자 신호에 걸리더니 산쪽에서 트럭이 내려와서는 앞길을 가로 막는다.

보나마나 이 트럭도 1호선 바이패스가 아닌 산길을 달리겠구나....

이런 속도로 전차선로가 있는 도로까지 나가면 버스가 지나갈 시간인데 버스뒤를 따라가면 이건 최악이다.

나쁜 예감은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다 들어 맞는다.

꼭 한대의 여유공간으로 트럭 바로 앞에 버스가 끼어 들었다.

그리고 정류소에 설때마다 앞에 있는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고 똥차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끼어 든다.

으으... 간장이 찢어진다.

신호에만 안걸렸어도, 트럭만 안나왔어도, 전차도로까지 나올때 조금 더 빨리 달려서 버스만 제쳤더라도... 많고 많은 찬스중에 하나만 붙잡았어도 되었는데 전부 실패했다..... 조급한 성격탓에 인간성은 더욱 상실되어 간다.

도중에 버스가 빠지고 산길입구의 편의점을 45분 정각에 끊었는데도 앞에는 차들이 줄을 지어 달리고 있다.

산길은 10도정도 경사이다.

드라이브기어에서는 그다지 힘이 안나고 2단기어로 달리면 스포츠카의 기분을 맛볼수 있다.

1년동안 전시용으로 사용하던 차를 싼 가격에 샀는데 산지 6년에 12만 킬로를 넘었지만 스즈키경차는 꼬불꼬불 산길을 밟는대로 붕붕거리며 달려주었다.

자동차는 거칠게 다룰수록 길이 든다고 하더니... 마누라만큼이나 험하게 탔다.

제일 선두의 웨건형경차는 출근길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원래 시속 40킬로의 산길이라 빨리 달릴 수 없는 환경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모두들 60킬로 정도로 위험을 무릅쓰고 달리지 않는가 말이다.

이런 산길이나 외길에서는 선두차는 뒷차가 따라오지 못할때까지 달려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굼벵이차들을 보면 정말이지 고함을 지르고 싶어진다.

니가 무슨 기관차냐!!

산중턱의 터널을 지나면 감귤로 유명한 미카비이다.

동명고속도로의 미카비인터쪽에서 나오는 차들과 합류하게 되는데 이 지점을 6시 55분 이전에 끊어야 한다.

7시를 넘으면 차들이 갑자기 밀린다.

토요타자동차의 전장부품을 만드는 회사들이 이 지역에 군데군데 산재해 있기 때문에 8시가 가까워지면 사방에서 차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바쁜데 초등학생들까지 한 몫한다.

인솔하는 학생이 깃발을 들고 선두를 서면 그 뒤를 어린 학생들이 졸래졸래 줄을 지어 따라간다.

횡단보도까지 오면 이번에는 자원봉사하는 지역 노인들이 차들을 세우고 학생들이 안전하게 건너도록 안내를 한다.

길을 건너면 학생들과 노인들이 똑같이 차를 향해 고개를 크게 숙이며 절같은 인사를 한다.

참 살아 있는 교육을 잘도 가르쳤다.

미카비에서 회사까지는 25분이다.

이른 새벽이나 밤중에는 15분이면 되고 출근시간 제일 밀릴때는 50분도 더 걸린다.

처음 이 길을 개척할때는 지각하는가 싶어서 똥줄을 몇번이나 태웠다.

그 결과 지금은 10여분 일찍 출발해서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주차장에서 30여분간 아침잠을 즐기는 것이 일과가 되어 버렸다.

7시50분에 출근카드를 찍는다.

30분단위로 잔업시간을 계산하므로 처음 입사해서 출근후 곧바로 타임카드를 찍고는 긴 의자에 누워 잠을 잤는데도 잔업수당이 나왔길래 황송해서 그 뒤론 어쩔수 없이 차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출근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전 날 자동으로 가공했던 데이터의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다.

CAD/CAM회사가 세계에 수백개도 더 있지만 기계가공분야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아메리카의 마스터캠이라는 것이다.

우리회사는 일본에서 개발한 캬무타스(CAMTUS)라는 소프트를 사용하는데 이 CAD/CAM이란 것이 개발회사에 따라 사용법이 전혀 다르다.

마치 전혀 다른 언어라고 생각하면 될까?

A사는 영어, B사는 프랑스어, C사는 한국어....

그래서 A사의 CAD/CAM을 능숙하게 다룬다 하더라도 B사 제품에서는 선하나 제대로 긋지 못할때도 있다.

물론 이치적으로는 이해가 되므로 모르는 사람들보다야 훨씬 빨리 배울수 있지만 말이다.

2년전에 캬무타스회사가 기존의 CAD를 완전히 바꾸어서 버전엎을 해 버렸다.

SPEEDY란 이름으로 2D/3D CAD/CAM을 출시하고 있었는데 NEXT란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면서 개발환경까지 바꾸어 버렸다.

몇십년동안 사용해 온 소비자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기존의 3D는 더 이상 버전업이 없으므로 현재 사용중인 컴이 부서지면 같이 소멸할 위기에 처해져 버렸다.

덕분에 나는 새로운 NEXT앞에서 선도 제대로 긋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NEXT는 새신랑 히로가 전적으로 담당하여 능숙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고, 나는 새 NEXT를 헌 3D로 변환시켜서 겨우 회사에 붙어 살고 있다.

그래도 기계가공에서는 내가 고참이므로 애꿎은 나카무라군을 괴롭히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데, 앞으로 7-8년만 더 기존의 3D 소프트가 버티어 주면 무사히 정년으로 졸업하게 된다.

오늘은 아침 출근길부터 운이 안먹히더라니...

가공된 제품을 확인하는데 한군데 움푹 패인곳이 보인다.

이런!!

이럴 때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공구길이를 잘못재었다는 것이다.

공구길이가 틀려서 기계가 Z방향, 즉 아래로 내리 처박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공구폿트의 번호입력미스(엉뚱한 공구가 나온다), 그 다음에는 캠에서 계산할때 공구의 직경 입력미스, 가공기준지정미스, 라지어스공구의 반경입력미스, 가공제한 2D선 지정미스, 프로그램 번호지정미스....마지막으로 캠의 계산폭주로 인한 원인모를 미스(의외로 자주 발생한다).... 

다른 실수들은 공구길이를 재어보거나 데이터를 조사해 보면 확인이 가능하지만 마지막 캠의 계산폭주는 확인이 안된다.

가공궤도를 보아도 정확하게 확인이 안되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카피해서 개발회사에 보내서 분석을 의뢰하면 애매한 대답을 주기는 하지만 그도 이젠 지쳤다.

반장은 나를 의심하고 있다.

이 놈은 항시 나를 감시하는 듯한 눈으로 보고 있는것 같다.

외국인이, 그것도 나이깨나 든 놈이 늦게 입사한 주제에 운좋게 기계가공의 중추를 맡고 있으니 배알이 뒤틀릴만도 하겠다.

앞에 적은 무슨무슨 미스들을 확인하고 이상이 없는 것을 알자 혹시 모를 잘못을 내가 감추고 있지나 않는지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질타한다.

500만엔짜리 소프트가 그런 미스를 할리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상식으로는 돈을 받고 제품으로 판매한 이상 그만한 가치를 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긴 앞의 미스들중에서 나만 알 수 있는 미스들도 있다.

그러므로 혹시 내가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부분에서 슬그므니 캠이 미쳤다라고 하면 확인도 못하고 그냥 넘어 갈 수도 있다.

오늘도 그런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런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나카무라군은 아직 프로그램을 보고 캠의 궤도확인을 하는 수준까지는 안된다.

시작품(試作品)파트의 시라이군이 난리가 났다.

납기가 내일인데 오늘중으로 견본제품을 만들지 못하면 회사의 신용도에 크게 영향이 오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한것은 젊은 후계자 상무이사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영업을 젊은 상무이사가 따오기 때문에 급할때마다 나를 찾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속이 느긋했다.

엿먹어라...는 심정이 아니고 항상 여유를 두고 기계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동운전이므로 하룻밤동안 시간도 있고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안전범위를 두고 가공했지만 급할때는 눈앞에서 불꽃이 튀는것을 보면서도 대여섯배 이상의 속도로 가공할수도 있다.

오후 두 시경에 무사히 수습이 되었다.

그래도 일부러 시간을 끌어서 마치기 직전에 건네 주었다.

시라이군은 아마 밤 아홉시까지 잔업을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시작품 하나만으로 하루를 때웠다.

바쁠때는 정신없이 바쁘지만 이렇게 한가한 때도 있는 것이다.

오후 4시50분.

손씻고, 신발 갈아신고, 옷 먼지털고 대기하고 있다가 땡땡 종이 울리자마자 뛰어 가서 타임카드를 찍고는 달음박질로 주차장으로 달린다.

한국의 사무직같으면 형님먼저 아우먼저 윗사람먼저 퇴근하는것 보고 또 눈치코치보면서 안절부절할텐데 우리회사는 그런 것 일절 없다.

오늘도 제일 먼저 회사를 나왔다.

일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