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저녁 먹고 나서 가족회의 좀 할 거야.”

“엄마! 오래 안 걸리는 거지? 나 친구들하고 그룹채팅하기로 했어.”

딸 강민희는 유별나게 친구가 많았다. 그녀는 사실 대한이가 하시모토를 잘 따르고 있어서 아들에 대한 걱정은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딸애는 하시모토에게 항상 시큰둥했다. 그것은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자라온 가정환경의 영향도 크게 작용되었을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딸에게 마음의 죄를 지었음을 자인하는 부분이다. 딸이 유별나게 친구들을 챙기고 친구 욕심이 많은 것도 복잡한 가족사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녀가 하시모토와 같이 살게 된다면 미안하게도 딸에게는 세 번째 아빠가 생기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가난한 집의 소녀 가장으로 살아내느라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핑계를 대보지만, 딸에게 이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를 무척 가슴 아프고 미안하고 힘겹게 했다.

“너희들 생각을 들을 일이 있어.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생각을 말하지 않아도 돼. 생각이 정해지면 말해주면 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주기는 힘들어. 모레 저녁 먹고 너희들 생각을 들어 볼 거야. 신중하게 생각해주기 바래.”

“엄마! 너무 서두가 길어요. 본론을 먼저 말해주면 안될까.”

아들의 말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자신이 너무 긴장을 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구나. 하시모토상이 엄마와 결혼하기를 원해.”

“응,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어. 두 분의 결혼에 찬성하는지를 묻는 거야? 그거라면 나는 바로 말할 수 있어. 나는 찬성!”

딸이 ‘이제 됐지?’ 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민희야, 잠시 앉아봐. 더 깊이 생각해봐. 그 사람은 일본 사람이야. 자신이 한국에 와서 살수도 있다고는 말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 돼.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으로 가서 살아야 한다는 말인 거야.”

그녀는 말을 마치고 ‘후~’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녀로서는 몹시 어려운 말을 힘겹게 내뱉은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들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이런 어려운 판단을 해야 하는 자리를 만들었음이 그녀는 미안해서 그녀도 잠자코 앉아 있었다.

“엄마! 저 먼저 일어날게요.”

“나도 엄마, 제 방으로 가요.”

아이들은 그들이 일본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이제야 알아챘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구체적으로 현실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에 생각이 정리되자 두렵기까지 했다. 아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친구들이었다.

강민희는 자신의 성이 원래는 ‘유씨’임을 알고 있었다. 어른들 누구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엄마 방에서 오래전 중학생 시절에 본 서류 하나에서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았다. 그때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지만 동생과 그녀가 아버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의미함은 알았고, 혼자서 현실을 삭혀 내느라 무척 힘겨웠었다.

그 시절에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친구들이었다. 가족에게서 얻지 못한 위안을 친구들을 통해서 얻고, 그들과 점점 끈끈하게 맺어졌다. 친구들을 두고 혼자 외국에 가서 살 자신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지금의 가족이 하나가 아닌 둘이었기 때문에 가족에게서 온전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가족이 세 조각이 되려는 것이고, 거기에다 한국이 아닌 일본에 까지 가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에 간들 자신은 세조각의 가족과 살아야 하고, 가지 않는다면 엄마도 없이 혼자 남아야 한다는 현실이 무서웠다.

‘내가 가지 않으면 엄마와 대한이는 지금처럼 두 조각의 가족 속에서 살 수 있어. 내가 가지 않으면 엄마는 세 조각의 가족을 꾸려나가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거야.’

막상 그렇게 다짐을 해 보았지만, 그녀는 현실이 막막하고 두려웠다. 갈 수도 없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현실이 힘겨워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다.

방에 들어온 강대한은 책상 위에 걸어둔 액자를 손에 들고 바라보았다. 사진은 자신과 하시모토상 둘이 놀이공원에 가서 찍은 것이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떴다.

그는 아버지에게 다른 가족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처음에는 어렴풋했다가 점점 구체적인 현실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그를 힘들게 만들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아버지를 마냥 따르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의 생각에는 언젠가는 다른 가족에게 돌아갈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아버지는 그의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처음부터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 앞에 하시모토가 나타났다. 차라리 그는 생소한 하시모토가 아버지보다 나았다. 이 사람도 아버지처럼 다른 가족이 있을 것이기에, 적어도 기대를 가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에게 하시모토에 대한 기대가 조금 생겼다.

‘하시모토상은 가족이 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내게 잘해주고 있구나. 어쩌면 이 사람이 아버지보다 나을 수도 있다.’

그의 생존본능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아직은 필요한 시기였기에 본능의 요구는 강렬했다. 그는 하시모토상이 좋았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 큰 회사가 있는 부자라고 했다. 엄마가 돈을 벌려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자신도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가정에서 살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그는 엄마가 그와 결혼해서 자신도 일본에 가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액자를 잘 닦은 후, 소중하게 제 자리에 다시 걸었다.

설민국을 찬찬하게 바라보는 최선미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비밀 조직에 가담한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자신도 이미 비밀 조직의 일원이 아니던가. 문제는 두 부부가 모두 비밀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문제들···

“자기도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구나. 잘했어.”

“당신은 내게 잘했다고 말을 하면서 얼굴 표정은 정 반대야.”

“나는 당신이 다혈질인 것 이미 알고 있잖아.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경우가 있어.”

“당신 생각에 내가 조직원이 된 것에 문제가 있다는 말투네.”

“다른 사람들에게나 외부에 드러나는 데에는 아무런 일도 없지. 다만 당신과 내가 존재하는 우리 가정에만 해당되는 작은 문제점이 생기는 거야.”

“나는 문제가 생긴다는 당신의 말이 잘 이해가 안 돼. 우리는 지금과 조금도 다름없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게 될 거야.”

“나도 지금이 무척 행복하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그래서 더욱 문제인거야. 당신은 우리가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는 그녀의 말에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우리 서로는 앞날에 생길지도 모를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어디에도 신상이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제야 내 말 뜻을 이해했나보네. 민국씨, 나는 만약에 내가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하고 가정을 지킬 수 없는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이 가정을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할 것이 없다고 믿었어. 그래서 다른 가정들처럼 아이도 낳고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갈 희망을 가졌었어. 이제 그 희망은 버려야해.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비밀 조직원이 된 것을 반대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야. 내가 비밀 조직원이 아니었다면 나는 당신의 결정이 훌륭했다고 자부심을 가졌을 거야. 자식을 낳고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는 없잖아. 이제 우리는 두 사람 다 가정만을 선택할 수는 없어. 조직에 충성하고 몸과 마음을 바쳐야해. 언제든 어떻게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우리가, 조직이 필요로 하는 순간에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물러서거나, 임무를 거절할 수는 없잖아.”

그녀는 안타까운 얼굴로 호소하듯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미처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보니 모두 맞는 말이야. 나는 그렇게 까지는 생각 못했어.”

“당신이 괜찮다면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어. 자식을 낳지 않는 가정도 많잖아. 우리는 서로의 이상을 공유하는 매우 특별한 부부야. 자식을 두고 사느냐, 이상을 담고 사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췄다. 그리고 서로를 탐색하듯이 살폈다. 서로의 눈빛은 신중했으며, 감정도 고요했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예전과 다름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를 사랑하고 원했다.

“나는 굳이 자식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 삶에서 당신만 늘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나는 그것 하나로도 충분해.”

그의 말에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우리는 부부이자 동지네. 자식을 두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우리의 꿈과 이상을 더 가치 있게 여기자. 그것으로 우리의 가정을 채워도 충분하게 행복할 수 있어.”

두 사람은 더욱 커진 신뢰와 사랑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