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 탄신일이라고 2년 전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한때 젊어 팔팔 할 때 잠시 인연이 되어 가까이 뵐 수 있었던 분.
그 분의 음성, 그 분의 모습을 다시뵈니
그 분이 말하셨던 가르침보다는 시간의 헛됨이 새삼 서글프다.
언젠가 스님이 내게 장난같은 꼴밤을 주며 해주시던 말...
쓸데없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어 괴로운 것이라...

***

내 유년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보광동. 저녁이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놀곤 하던
공터 위 언덕에 작은 절집이 하나 있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처음 만난
그 절 집은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지만 늘 두려움이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절문을 지키고 있는 거인보다도 훨씬 큰 먼지 뒤집어 쓴 사천왕상.
튀어나올 듯 부릅뜬 눈으로 온갖 고통스러운 괴물을 밟고 선 모습.
일년 사시사철 절 안을 메우고 있던 메케한 향 냄새 .
방마다 울긋불긋하면서도 색 바랜  탱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색의 단청 불사.
그리고 허리가 너무 굽어 보기에도 늘 불안했던... 몇살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던...
쉰 목소리의 보살 할머니... 보살 할머니의 짙은 먹색의 헐렁한 바지...
그런 것들이 어린 시절 내게 절이란 곳은 아주 무서운 곳으로 각인시켰었다.

철이 들고 나서도 절이란 곳은 내게 늘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그 덕에 사람들이 그리 맛있다 칭하는 절밥이란 것은 먹어볼 생각도 못했다.
결혼 전 일때문에 승주 송광사에 계시던 법정스님을 만나뵈러 자주 내려가곤 했다.
승주 송광사의 공양간은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공양간 밑으로 맑고 세찬 계곡물이 흐르고 그곳에 앉아 공양 준비를 하는
碧眼의 스님들을 보고 있노라면 평화로움과 정다움이 절절하건만
막상 그 절의 절밥은 죽어도 넘길 수가 없었다.
밥을 못먹고 절절맬 때면 법정 스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관념 때문이라며
구박을 하시곤 했다.
그리고 불일암에 데리고 올라가 국수를 삶아  차가운 우물물에 헹구어내어
참기름 한방울 떨어뜨려 비벼주시곤 했다.
송광사에서는 단 한숟가락도 넘어가지 않던  밥을 단청도 불상도 탱화도 없는
스님의 그 정갈한 山房에서는 맛나게 먹곤 했던 기억이 있다.



천안에 각원사라고 하는 동양에서 제일 큰 청동불상을 자랑한다는 절이 있다.
그 절의 일년 캘린더를 만드느라고 일년 사계절을 주말마다 내려가
사진을 찍는 일을 했던 적이 있었다.
새벽 사진을 찍으려면 더러는 토요일에 내려가 자고 새벽에 일어나 움직였어야 했는데
그렇게 지내면서도 일년 동안 그 절의 밥을 한끼도 먹지 못했었다.
아침 나절 내내 사진을 찍고 허기진 배를 시내에 내려가 채우고 돌아와
다시 사진을 찍곤 하던  미련한 시절도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파 어찌 좀 먹어볼까 시도를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입안에서
뱅뱅 돌다가 넘기지 못한 웃지 못할 기억도 몇번인가 있다.

내가 향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혼 후였다.
혼자 지내던 목동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때론 끔찍하고 몸서리쳐지게 고독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시간을 또한 사랑하기도 했다.
향이 타오르면서 집안에 향 냄새가 퍼지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잠시 잠시 고독의 절망도 잊었고 심지어는 아득한  꿈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기도 했다.

쉬는 날이면 인사동에 나가 비싼 돈을 들여 좋다는 향을 사는 사치를 누려보기도 했다.
진관, 보림, 다보...내게는 전혀 생소했던 이름의 향을 사 모으고
연꽃 잎 위에 작은 향꽂이가 앉혀진 청색 도자기 하나를 발견해
내 것을 만들고 행복했던 시간도 있었다.

향을 피우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절집의 이미지를 거부할 수없다.
내게 있어 절집이란 아주 오랜 세월동안 무서움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에
나는 절집과의 새로운 조우를 하게 된다.
이혼 후 일산 작은 절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러 다니면서 나는
비로소 오랜 시간 나를 잡아두었던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다.

납골 사찰에서 사무일을 보던 친구와 가끔씩 속내를 들어낸 이야기가 위안이 되던 시절
그 친구를 만나러 갔던 어느 초여름날 늘 공양을 권하던 발간 볼의 젊은 비구니 스님이
그날은 이상스러울만큼 점심 공양을 하고 가시라 권하고 또 권했다.
그 절 뒤 텃밭에서 스님이 솎아낸 남새를 넣고 고추장 한 숟가락에
참기름 한방울 떨어뜨린 그 밥 한끼 ,
그 밥 대접을 받아들고 난 참 많이도 망설였고 어리석은 내 속내를 알고 있던 친구는
먹으라 말라 소리도 없이 그저 웃으면서 자기 앞의 밥그릇을 비워가고만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보살님...이란 호칭을 쓰며 밥그릇을 밀어 놓는 발간 볼의 젊은 여승
그 스님의 웃음이 너무 고와 사실 그 밥그릇을 다시 물리지 못하고
결국 한숟가락 떠 넣게 되었다.
그게 나의 첫 절밥 경헙이 되었고 비로소 오랜 시간 아무것도 아닌 관념이
나를 옭매고 있었다는 헛헛한 웃음과 함께 실로 오랜만에
정말 정성스럽고 소박한 맛있는 식사 한끼를 먹게 된 셈이다.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던가...
젊은 시절 방방곡곡 쫓아다니며 좋다는 절을 다 다녀보고 굿판을 구경하고
사진 찍기를 즐겨했으면서도 왜 그렇게  어리석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지난 몇십년동안 부질없는 관념에 젖어 어리석음을 헤매이던 내게
작고 허름한 납골사찰의 때묻지 않아보이던 젊은 여승의 밥 한 공기가
내게 더할 수 없이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나이 사십을 넘기고 불혹을 넘겨서야  부질 없는 관념에서 벗어나 비로소
작은 깨어남을 맛보게 된 그 소중한 기회에 더할 수 없는 감사를 느꼈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이제  속절없이 흐른 시간 뒤에 아직도 끝없이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연연하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지옥을 오가고 죽고 살기를 반복하는 미련 한 삶.
오늘,  가신 스님이 땔나무로 만들었다는 투박한 의자 하나를 보며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이길,
그리고 부질없는 관념 따위에서 또 한번 벗어날 수 있길 잠시 희망해본다.

또 다시 가을이 온다. 나뭇잎은 단풍이 들고 비바람에 낙엽이 되어 떨어지지만 벽돌틈을 비집고 작은 새명이 또 모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