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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한수.. |
| 글쓴이 음모자 조회 437 |
작성일 2003-05-26 오후 2:3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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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을 배웠을때가 초등학교 시절이니 20년보다는 30년쪽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성정이 급하고 어질지 못하여 어렸을때부터 뭐하나 진득하니
마쳐보질 못했으니 바둑이라고 어딜 갈까요.
지금까지 차분하게 독파한 바둑책 하나 변변히 없는 형편이고
보니 지금의 실력도 과분하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예전 바둑 텔레비젼에서 '내인생의 한수'란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었는데요.(지금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요즘은 보질
못해서요....)
프로기사가 자신의 인생에서 추억에 남는 한판을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복기해 보던 프로그램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내리던 어제의 흐림은 온데간데 없이 화창함으로 둘러쌓인
월요일의 한낮에 오로바둑에 접속하여 생중계를 틀어놓고 차
한잔을 마시다 보니, 제 자신에게도도 기억에 남는 한판이 있
었는지를 더듬어 보게 되는군요.
내 인생의 한수라..
기억이 나는군요.
철책선 경계를 맡았던 군대시절 입니다.
바둑의 룰, 그러니까 축이나 장문정도나마 알고있는 중대의
두사람인 저와 바로위 고참은 자연스레 라이벌이 되었습니다.
라이벌 없는 바둑은 김빠진 맥주요, 빤쮸없는 고무줄이자, 김치
없는 밥상이지요.
쫄병 시절이야 시간이 없었지만 둘다 제법 고참이 될 무렵부턴
그와 많은 시간을 바둑으로 소일했습니다.
둘다 기력이(사실 기력이라고 말할것도 없었지만요) 엇비슷하고
스타일도 뚝딱뚝딱 장작패는 폼새라 3분에 한판, 5분에 한판도
예사로 나오곤 했던 그때였습니다.
선작오십가도 대충 버티다보면 뒤집어지기 예사였고, 서로 자존심
을 내세우며 패를 안받고 역전당하기도 일쑤였지요.(뭐, 바둑은
져도 패라도 이기면 기분 좋더라고요)
서로 말년에 접어들고 제대를 코앞에 둔 무렵, 밤10시 취침
시간이 되도 하늘에 백돌 흑돌이 어른거리던 순간 그와 저는
의기투합 쫄병들의 경계근무를 대신 맡아들고 가슴속엔 문방구
표 접이식 바둑판과 양 주머니엔 바둑알을 듬뿍 집어넣고 초소로
향했습니다.
중동부 전선의 험난한 산줄기를 따라 끊임없이 이어진 철책의
흐름과, 정해진 간격대로 환하게 불을 비추고 있는 투광등의
불빛은 남과북의 가슴아픈 현실은 뒤로한채 장관의 모습을 보
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철책로를 끊임없이 이동하는 순찰식 근무가 아닌
초소에서의 고정형 근무였기에, 둘은 총구를 북으로 돌려놓은
채 바둑판을 펼쳤습니다. (부모님은 그때도 두다리 뻗고 잠을
잘 주무셨는지....)
후레쉬를 켜지 않아도 어렴풋이 흑과백을 구별할수 있는 적당한
어둠과 멀리서 들려오는 대남방송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응원
삼아 그야말로 手談이 펼쳐졌습니다.
뚝딱 뚝딱 장작패는 소리는 초소를 휘돌고, 부지런히 오가는
손놀림의 경쾌함. 그리고 이따금씩 터져나오는 탄식과 웃음.
정말 시간가는줄 모르겠더군요.
바로 마지막이 되었던 대국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팽팽하게 맞섰던 가운데 이른바 결승전이었다고 할까요.
초반 사귀생에 마지막 변수인 변쪽에 있던 생과사가 아슬아슬한
상대의 미생마가 살기만 하면, 천지가 진동하고 지각이 무너지는
상황이 설사 오더라도 제가 질수밖에 없던 형세 였습니다.
후절수.
후절수를 완벽히 이해하면 3급이라고 하던가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3급은 언감생심이고 두자리도 한참 18급
쪽에 속했던 시절이니 후절수를 알턱이 있었나요.
이도 저도 안되니 상대의 집속에 죽어있는 돌을 못먹는감 찔러
나 보자고 움직였고 회심의 미소를 지며 수순을 진행시켜 제돌을
따냈던 바로 그 순간.
제눈에 들어오는 단수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후절수.
 
사활문제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고급전법. 즉 자기의 돌들
을 특정한 수순에 의해 키워 죽인 다음, 다음 순간에 상대방
의 돌을 단수로 몰아 떨구는 것
즉 [1도] 흑1,3이 후절수를 유도하는 교묘한 수순으로 백6까
지 필연의 수순을 거친 다음[2도] 흑7의 후절수로 백 대마를
잡는다. 환격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
<자료출처:http://gobaduk.com.ne.kr>
하지만, 회심의 미소와 함께 제손을 떠나 단수를 치려는 돌은
바둑판에 놓이질 않고 공중부양을 하더군요.
중대장의 군화발 이었습니다.
난가(爛柯) 바둑이라...도끼자루 썩는줄도 모르는데 중대장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습니다.
이후 겪었던 근무 태만에 대한 말년의 고초야 더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군화발에 차인채 공중으로 날아가버린 그 한수는, 제
인생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기회는 역시 존재
한다는 뜻있는 교훈을 저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옆에 놓아놓은 차가 채 밑바닥도 보이기 전에 식어 버리는군요.
더 늦지않게 마셔야 차에게도 저에게도, 또 정성스레 타준 여자
친구에게도 고마움의 표시가 될듯 싶습니다.
기우분들 즐거운 오후 되시고, 좋은 취미생활과 함께 두고두고
기억나는 인생의 한수를 남기시길 빌어 봅니다.
덧글) 지난번 제가 거지된 사연의 글에 위로의 말씀을 전해주신
바둑톡톡님, 밝은 눈을 선물해주신 천년후애님, 베팅팁을 도움
주신 초대해줘님, 그리고 동병상련인 산타페님께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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