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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밖에서 보는 탄핵과 선거 |
| 글쓴이 -_- 조회 377 |
작성일 2004-04-04 오전 9: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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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한겨레신문 임혜지(imhana)님의 글
http://bbs.hani.co.kr/Board/ns_kpoll/Contents.asp?STable=ns_kpoll&RNo=65&Search=&Text=&GoToPage=1&Idx=66&Sorting=2
해외에 사는 나는 고국의 소식에 항상 정통하지 못하다. 한국의 소식은 일상 속에서 저절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 봐야 하기 때문에 내가 바쁠 때에는 오랜 기간 한국의 시사에서 단절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판 돌아가는 상황이 좀 급한가? 오랫만에 인터넷을 통하여 고국의 소식을 접하자면 그 사이에 새 당이 생긴 건지 당 이름이 바뀐 건지 뭐 모를 일 투성이이다. 밀린 뉴스를 찾아서 감이라도 잡는 사이에 계속해서 또 다른 일이 벌어지므로 진도 따라잡기가 힘겹다.
게다가 인터넷뉴스라는 것은 유행성이 강해서 어떤 사안은 반복해서 알려주면서도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만한 기본적인 뉴스는 생략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전적으로 인터넷에만 의존하는 나는 앞뒤의 정황을 대략 눈치로 짐작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에 다녀온지 오래된 나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야당 대표라든지 유명한 정치가들을 동영상으로 본 적도, 토론이나 연설하는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누가 인간적으로 카리스마가 있는지, 말투가 얄미운지, 멋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여자라서 내가 막연히 관심을 가지는 강금실장관이나 추미애의원의 사진을 보면 둘 다 예쁠 뿐 누가 어째서 더 매력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런 이유로 내가 한국의 정치가들을 평가할 적에는 그가 지향하는 노선과 그가 장시간에 걸쳐 이룩한 공와 과만을 가지고 따지는 수밖에 없다. 정당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인간성에 대한 직감과 호불호의 감정이 없이 단순히 업적만을 따져 정치인과 정당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나같은 사람의 눈에는 이번의 탄핵정국이 어떻게 비추어졌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후끈 달은 분위기를 매일 몸으로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해외동포의 시각이 이채롭기도 하겠거니와,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양쪽의 시각이 어떤 점에서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비교해 보는 것도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사물은 다각도에서 관찰해야 입체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개개인의 의견이 국경을 넘나들고 지인의 범위를 벗어나서 활발하게 교환될 수 있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우리의 찬스라는 생각이 들고 이 고마운 기회를 잘 이용하자는 의미에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이번에 대통령 탄핵사건을 한국의 뉴스를 오랫동안 접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알게 되었다. 내가 전후 상황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받은 탄핵에 관한 첫인상은 이랬다. "와, 현직 대통령의 불법자금을 캐어내어 탄핵에 부칠 정도라면 우리나라의 정치도 많이 맑아졌다. 청렴한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가는구나. 대통령의 위법이라니, 법치국가에서 대통령이 그러면 안되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 탄핵의 이유가 좀 이상했다. 대통령이 쓴 불법자금의 액수가 야당이 쓴 불법자금 액수의 십분의 일보다 조금 더 많다는 것이 그 이유의 하나란다. 또한 대통령이 법을 어기긴 했지만 그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사과를 제대로 했으면 탄핵은 없었으리라는 말도 공식적으로 나왔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상식이 존재하는 독일의 정치 분위기에 익숙한 나는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기사를 제대로 이해한 건지 갑자기 나의 한글 독해력에 대한 의심이 들어서 말투가 다른 여러 신문들을 죄다 검색해 보았다.
나라를 뒤흔드는 대통령 탄핵이 아이들 장난인가? 탄핵을 해야 할 일이면 대통령이 사과 아니라 거적을 쓰고 빌더라도 탄핵해야 하는 것이 국회의원들이 할 일이다. 탄핵해야 할 일을 가상하다고 봐준다면 국회의원들의 직무유기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입으로 말한 대로 안할 수도 있는 사안을 얄밉다고 탄핵에 붙인 것은 직권남용이다. 국회의원더러 직무유기하고 직권남용하라고 국민이 그 많은 월급을 주는 거 아니다.
또 하나 나를 어지럽게 만든 것은 불법자금의 액수에 대한 논란이었다. 대통령의 불법자금이 야당의 불법자금의 십분의 일을 넘겼다는 게 탄핵의 이유라니 이 무슨 논리인가? 언제 여당과 야당의 불법자금의 비율을 일 대 십으로 조절해서 합법화시킨 걸까? 야당이 고생한다고 국민들이 프레미엄을 얹어주었나? 자기네는 열 배가 아니라 아홉 배밖에 안 썼다고 큰소리치는 논리가 도대체 어떻게 성립이 되는지 나는 매우 혼돈스러웠다.
내가 가장 의아했던 점은 정치가들이 그런 말을 국민에게 떳떳하게 공식적으로 했다는 사실이다. 내게 있어서는 새까만 자유당 시절에 있었던 사사오입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불성설 논리가 국민들에게 통할 거라고 믿었던 정치가들! 국민을 우습게 보는 그런 오만한 판단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 혹시 그 오만함은 옛날에 툭하면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내렸던 안하무인적 오만함과 같은 본질은 아니었을까? 현재의 야당정치가들이 옛날과 같은 권력을 손에 쥐었었더라면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하여 옛날과 같은 권력의 남용을 감행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가치판단에 혼돈이 오기 시작한 나는 혹시나 우리 국민들이 이 탄핵의 이유를 수긍하거나, 수긍은 안하더라도 과거와 같이 울분을 안으로 삼키며 체념할까봐 마음이 절박해졌다. 아니면 그 반대의 현상으로 혹시 국민들의 폭동이라도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또 국회가 해산되고 비상사태가 선포된다면? 아아, 또다시 뒤로 돌아가는 역사의 바퀴. 훗날 다시 이만큼 오려면 또 얼마나 많은 피를 요구할 것인가?
그러나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한국민들은 속지도 않았고 움추려들지도 않았지만 과격하지도 않았다. 식사 때 수저 집어들 듯이 당연스럽고도 자연스럽게, 국민들은 그와 같이 허술한 탄핵의 이유를 수긍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현하였다. 국민은 자신이 뽑은 정치가들을 계속 주시하며 일 잘하고 있는지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평화적 시위를 통해서 보여주었다. 대통령을 하야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국회보다 더 위에 있는 기관은 바로 국민이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국민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였다. 윗사람답게 당당하고 의젓한 모습이었다.
화염병 대신에 이제는 촛불을 손에 들고, 그 많은 사람들이 연일 모이는데도 집단흥분 상태에 빠져서 폭력으로 연결되지 않고 끝까지 질서와 유머를 유지한다는 것은 국민의 성숙도가 보통 이상으로 여물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예전에 월드컵 때 범국민적 축제의 모습을 서방세계에서는 매우 경이로운 눈으로 보고 감탄했었다. 어쩜 저렇게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나와서 진정으로 긴장을 풀고 마음껏 즐기면서도 어쩜 저렇게 질서와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지, 감성와 이성의 완벽한 조합을 보는 듯하다며 메스컴과 친지들은 칭찬에 입의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나는 그때 속으로 "좋은 일로 모였으니까 그렇지 그 군중들 화나면 다르지. 화염병 던지고."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의 촛불시위를 보고 우리 국민도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일로 모이지 않고 분노로 모여도 그렇게 감성과 이성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 달했다는 것을 보고 콧날이 시큰해졌다. 피를 보아야만 했던 암담한 시절이 우리나라에서는 이제는 막을 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시작은 이제부터이다. 시위는 공감대를 확인하는 과정이자 민주주의에로의 의지를 서로 확인하는 약속일 뿐이다. 시위로서 국론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국민의 힘은 한 표의 행사에 있다. 그러므로 국민의 성숙도를 보여준 뜨거운 시위에서 냉철한 선거로 이어져야 한다. 진정한 성과는 불꽃처럼 후끈했다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장기전에서 나타나야 한다. 국민 무서운 맛을 여실히 보여준 촛불시위가 선거의 결과로 연결되지 않으면 모양만 요란하고 방울소리만 크지 하나도 힘이 없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그런 국민들을 정치가들이 무서워할 리 없다.
멀리서 마음으로만 촛불시위에 참가했던 나는 이제 또 마음으로 선거에 참여할 것이다. 이에 내가 이 선거를 통해서 이루지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리해 보았다.
그간 급하게 높이 쌓아올리느라고 소홀했던 내실을 뒤늦게나마 다지기 위하여 우리가 시급히 막아야할 구멍이 여러 개 있다. 부정부패의 척결이 그 중의 하나이다. 이는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경제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장사하는 데에 신용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이다.
세계화는 우리가 원하든 거부하든 이미 우리의 담장을 넘어와 버렸고, 우리도 벌써 세계 안에 뛰어들어 돈을 벌고 있다. 이때 한국의 사업풍토가 혼탁하면 외국 사업체들은 불안해서 투자나 동업을 꺼린다. 그들은 자기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편법이 성행하는 풍토에선 불안감을 느낀다. 외국 사업체가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정정당당한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불안감, 사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정도와 상식을 통해 앞날을 예측하고 계획을 세울 수 없다는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여러가지 다른 매력 때문에 심각하게 투자나 동업을 고려하다가도 이런 결정적인 결점 때문에 특정한 나라와의 사업을 포기하는 일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부지기수로 있는 일이다.
안정세력, 우리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들 오해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이것이다. 기존의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안정이고 국제적인 신용성을 높이는 일이며, 개혁이란 나라 안팎으로 불안감을 조성하여 경제적 불이익을 초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외국의 투자자들이 가장 꺼리는 현상이 바로 불투명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이므로 그러한 그들이 부정부패에 종지부를 찍는 개혁을 불안해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선견지명으로 남보다 한발 앞서 투자하는 일이 생명인 이들 투자자들은 우리나라의 개혁의 조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개혁이란 투명한 사업 풍토를 알리는 전종이라 여기고, 드디어 투자하기 위한 명분으로 보고 기다리고 있다. 외국에서 지금 대한민국의 개혁을 주시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가 집권 1년만에 경제파탄을 몰고왔다는 주장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는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첫째, 지금의 어려운 경제상황은 위와 같은 이유로 진작에 시행되었어야 할 개혁이 역대 정치권의 우유부단으로 인해 미루어지느라고 도약의 시기를 놓쳐서 오는 결과는 아닐까? 둘째, 지금의 이 현상이 개혁의 초반기에 필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거품이 빠지는 현상은 아닐까? 성장율을 조작하던 거품이 빠지는 동안에 경제가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째, 부정부패의 근절을 국민경제를 이유로 들어 반대하는 사람들이란 혹시 개혁 이후에 잃을 것이 있는 사람들인지 한번 의심해 봐야 한다. 권력이든 재물이든 정당한 방법으로 취득한 것이라면, 공정하고 투명한 세상이 온다고 해서 빼앗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먹고 살기가 사상 최악으로 힘들어졌다는 말은 문민정부 이래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항상 돌았던 소문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경제는 꾸준히 성장해왔다. 언론의 자유가 없었던 군사정부 시절에 국민들이 큰소리로 불평하지 않고 조용했었다고 해서 그때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군사정부 때랑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진 인권상황도 따지고 보면 순전히 노무현 정부의 공로는 아니다. 그 이전부터, 문민정부 이래로 꾸준히 발전해온 것이다. 이렇게 긴 세월에 걸쳐 진행되는 일들인데도 우리는 공로건 과실이건 대통령 개인의 능력이나 인덕과 결부시켜 속단하는 버릇이 있다.
지속되는 국제적 불경기로 인하여 모든 선진국들의 경제가 바닥을 기고 있는지 오래이고, 나날이 증가하는 실업율과 저임금국을 향한 생산라인의 이동현상 등은 지금 세계가 공동으로 앓고 있는 고질병이다. 이를 어떤 이들은 국가원수만 갈리면 다 해결될 듯이 선전하고 있다.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하나 있는 것은 국민의 정신건강에는 좋을지 모르나 본질을 파악해서 대처하는 일에는 방해가 된다.
박정희 대통령시절의 급격한 경제성장과 지금의 저조한 경제성장을 비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든지 무에서 처음 출발할 때에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나면 성장이 완화되거나 멈추는 게 국민경제의 원리이다. 현재 경제대국의 경제성장율과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율을 서로 비교해 보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가진 자들이 허가내놓고 도둑질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검찰의 개혁을 추진한 노무현 대통령은 그 개혁이 결국은 자신을 다치게 했다는 교훈을 얻었다. 바야흐로 제 구실을 하는 검찰이 대통령 자신의 비리까지도 파헤쳐서 야당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국민의 차례이다. 국민이 진정으로 오래동안 바래왔던 것이 그런 정직한 개혁었다는 것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사업을 벌이는 대통령은 국민이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교훈을 국민이 보여줄 차례이다. 개혁의 결과가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더라도 국민은 그의 개혁의지를 높이 사서 그를 계속 지지한다는 교훈을 보여주어야 다음 대통령들도 마음놓고 부정부패의 근절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그 대신 여당의 불법자금은 조만간 반드시 응징되어야 한다. 야당의 불법자금 역시 공정하게 응징되어야 한다. 무슨 조폭의 세계같이 당수 하나만 대표로 책임을 지고 자리를 내놓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연루된 모든 정치가와 기업에게 개인적으로 책임을 물어 징역을 살리고 벌금을 물려야 한다. 일반국민들의 사기죄가 응징되는 것과 꼭같이 처리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잘잘못이 뒤늦게라도 반드시 가려지는 투명한 사회라는 것을 정치가들이 믿게 된다면 그들은 앞으로는 정정당당하고 깨끗하게 정치판을 벌릴 궁리를 할 것이다. 부정만 했다하면 필히 호적에 빨간 줄이 쳐지고 앞으로의 정계진출의 길이 막히는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는 보스가 "뒷일은 내가 책임질테니 당신은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라고 명령하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100년 전에는 국부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던 우리네가 이제는 전직 대통령들을 법에 따라 감옥에 척척 보낼 만큼 법치국가가 되었다. 이제는 불법자금의 근절은 모든 국민이 열망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을 정치가들에게 이해시키는 일만 남았다.
범국민적인 촛불시위로서 우리 국민은 얼마나 부정부패의 근절과 정의실현을 열망하는지를 매우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민의를 읽는 일이 민주국가 정치가들의 생명이거늘 이로서 국민은 정치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숙제 하나를 대신 해준 셈이다. 이제 선거를 맞아 여당이고 야당이고 그 민의에 화답하는 방법을 궁리하는 일만 남았다.
만약 여당이 약점이 잡힐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미 시작한 검찰개혁을 결코 중단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면 국민들은 이번 선거에서 희망의 한표를 선사할 것이다. 더불어 나는 대통령이 자신의 위법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앞으로는 어떠한 사소한 법이라도 솔선수범해서 준수하겠다는 겸허한 약속을 하고 또 지킴으로써 우리나라가 법치국가임을 증명해줄 것을 기대한다.
대통령은 국부가 아니라 일꾼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나라에서 대통령이 배짱으로 법을 어기는 것은 국민 앞에 오만한 것이지 카리스마가 아니다. 자라 보고 놀란 국민은 솥뚜껑만 보아도 "권력을 잡고 나면 그 놈이 그 놈일까?"하는 의심을 대뜸 떠올린다는 사실을 대통령이 알았으면 좋겠다. 이번에 국민이 단결해서 보여준 시위는 대통령 개인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정의실현 의지를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국민의 이러한 열망을 대통령도 잘 새겨들어야 한다.
지금 궁지에 몰린 야당에게는 요술 부리듯 마지막 판뒤집기를 이룰 수도 있는,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히든카드가 하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역사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 사실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대를 물린 권력층의 집합군이므로 구린 구석이 유달리 많은 야당 쪽에서 솔선수범해서 역사청산의 의지를 천명한다면 국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을 것이다.
많은 범죄들이 역사 속에 묻혀서 공정한 심판을 피하고 있는 일은 부정의 온상이며 부패의 근원이다. 모든 사건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는 한, 일련의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은 이를 계속해서 감추기 위해 새로운 부정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역사청산이 없이는 역사에서 배움을 취할 수도 없고 미래의 청렴결백을 기대할 수도 없다.
지금 야당이 보이고 있는 상징적인 사죄의 제스처는 나에게는 설득력이 하나도 없다. 공인들의 삭발이니 삼천배 절이니 하는 이런 감성적인 표현은 나에게는 도대체 낯설기도 하거니와, 정치가들이 국민에게 보이는 의지표현으로는 이건 뭐 개인적인 애증의 관계도 아니고 도무지 실속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제까지 잘 쓰던 멀쩡한 당사를 놔두고 갑자기 천막을 치고 이사를 하는 모습은 나에게 국비의 낭비라는 생각과 함께 저들이 국민을 좀 쉽게 본다는 느낌만 들게 할 뿐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건축인인 나에게는 수도 한복판에다 도시미관을 해치는 대형 가건물을 그리도 쉽사리 허가해주는 건축법이 존재하는 문명국가가 불가사의할 뿐이다!!!)
진정으로 국민들에게 실속이 있는 의지의 표현이란, 야당이 과거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목록을 미리 공개하고 나중에 오리발을 내밀지 않는다는 담보로서 그 내용을 미리 공표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과궤짝이건 차떼기건 근래에 죄지은 사람들은 근래의 죄를 이실직고하고, 책상을 한번씩 탁 칠 때마다 일억씩 뛰었던 뇌물사건이나 국민의 목숨을 파리목숨 보듯이 했던 시절의 크고 작은 인권유린의 사건들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은 그때의 진실을 자진해서 낱낱이 드러내는 일만이 국민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약속이다.
그러면 국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야당에게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이번 선거에 이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영원한 걸림돌이 제거되는 역사적인 사실로 남아서 후손들도 두고두고 고마워할 일이 될 것이다. 진실이 남김없이 드러난 이후에는 용서와 화합도 가능하다.
야당은 자신들이 현재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참회와 과거청산의 의지를 국민이 무조건 믿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일이 아니다. 여러 인격체들이 모여 합동으로 이루는 정치는 정으로 하는 사업이 아니라 계약서를 확실하게 쓰는, 빈틈없는 사업이어야 함을 국민들이 역사를 통해 배워서 아는 것 뿐이다.
역사청산의 작업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최선의 정당은 일차적으로 내막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야당일 것이다. 그러나 야당이 구체적인 계약서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그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공은 차선인 여당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역사청산을 아예 안하는 것보다는 조금 못하는 것이 더 나으므로.
또 하나 이번 선거를 통해서 우리 국민이 꼭 이룩하여야 할 것은 1년전에 일 시키려고 뽑은 대통령을 되도록이면 알뜰히 부릴 방안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집권당이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야당은 선거 후에 행여 거대여당이 몰고올 횡포의 위험성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행여 거대야당이 국정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나라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국민에게 심어주어야 선거에 승산이 있다. 집권당을 철저히 감시하고 견제하는 동시에, 국민이 일하라고 뽑아준 대통령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함으로써 나라의 발전에 협조하는 야당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을 국민은 없다.
선거는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국민은 대통령을 뽑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선거란 완벽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 실행을 미루며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때 출마한 인물들 중에 가장 나은 인물을 하나 선택하는 것이다. 변변치 못한 인물이라도 타후보가 더욱 변변치 않으면 뽑히는 것이다. 변변히 못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대안이 없어서 뽑아줬으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다 같이 사는 길이다. 일을 습득할 시간도 주지 않고 변변치 못하다고 사사건건 방해만 하는 풍토에서는 변변한 사람이 나올 수 없고 변변한 사람도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다. 우리 사회의 성숙도만큼 우리의 대통령도 실력발휘를 할 수 있다. 대통령에게 월급 주면서 실력발휘를 못하게 만들면 손해는 국민이 본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 해도 국민이 납득할 만한 사유가 없는 한 다음 대통령 선거까지 공덕을 쌓으며 기다리는 게 성숙한 야당이 할 일이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대안도 없으면서 힘으로 뒤집어엎기만 하는 후진적 방식일랑 이만 청산하고 우리도 이제는 정도를 걷는 정치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젠가 죽 쒀서 개 준 경험을 갖고 있다. 국민이 유월의 뙤약볕 아래서 목숨을 걸고 지어준 귀중한 죽이었다. 이번만큼은 정치가들이 죽 속에 들은 밥알 세는 일에 정신이 나가서 죽그릇을 쏟지도 말 것이며, 또한 남이 쑤어놓은 죽을 먹은 개라는 소리도 다시는 듣지 않도록 노력할 일이다.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국에 계시는 여러분들의 귀중한 한표의 행사에 저는 마음으로 참여하며 응원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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