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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모없는 지식을 찾아서' 책머리에 |
| 글쓴이 사색의길 조회 189 |
작성일 2004-03-09 오후 11: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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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추기는 참으로 힘들다.
그런 지식에 대해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그것을 얻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은 점점 가파른 절벽으로 솟는다.
그것은 당연히 방대해서 누구도 그것을 쉽게 얻을 수 없다.
사람들이 힘들게 지식을 얻는 길 대신 돈오를 겨냥한 수련이나 신비주의에 기우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아울러 그런 지식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핵심적 지식은 그가 전공한 한두 분야에, 많아도 서너 분야에, 몰리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치우치게 된다.
만일 그가 지식의 습득과 이용에 관한 방법론에 관심을 둔다면, 한 분야의 깊은 지식에서 얻은 통찰은 다른 분야들을 살피는 데도 큰 도움이 되므로, 사정은 생각보다는 상당히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많은 분야들에 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많은 분야들의 지식을 얻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과학의 발전으로 지식들은 점점 많이 생산되므로, 전공 분야를 넘어서는 지식을 얻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게다가 전공 분야 자체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설령 전공의 울타리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너른 지식을 찾는 이들은 머지않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놓인 심연을 만나게 된다.
그 심연은 하도 넓고 깊어서, 과학혁명 뒤로 그것을 건너뛴 사람들은 드물었다.
그런 심연을 건너뛰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심연의 한쪽 분야만을 제대로 아는 것도 무척 어려워진 지 여러 세기가 되었다.
그런 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를 우리는 18세기의 사회과학에서 찾을 수 있다.
17세기 서양에선 사회학과 경제학에서 자연법적 접근 natural approach이 종래의 번쇄철학적 분석 scholastic analysis을 밀어냈다.
그래서 사회과학은 자연법학 natural jurisprudence 으로 통일되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법학의 체계였고 법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들과 지식들도 그 속으로 수렴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엔 그런 법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들과 지식들이 아주 커져서, 자연법학의 틀이 부서졌다.
그런 분야들과 지식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준 새로운 틀은 도덕철학 moral philosophy이라 불렸다.
그 이름은 물론 자연철학 natural philosophy의 대칭이었다.
도덕철학은 주로 자연신학, 자연윤리학, 자연법학, 정책과 수입(현대의 경제학과 재정학)을 주요 구성 분야로 삼았다.
그래서 도덕철학은 지금의 사회과학과 대체로 같았다.
그러나 도덕철학도 일관된 체계의 모습을 오래 지닐 수는 없었다.
자연법 체계를 부쉈던 힘이 그것에도 작용한 것이었다.
도덕철학의 모든 분야들에서 새로운 자료들과 지식들을 정리하고 습득하는 일이 너무 커져서, 전업이 요청되었다.
자연히, 도덕철학자들은 모두 좁은 전공 분야에만 매달리게 되었고, 다른 분야들이나 도덕철학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포괄적 원리들은 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이런 현상이 나온 때는 상당히 정확하게 표정할 수 있다.
글라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던 프란시스 허치슨(1694-1747)은 말년에 《도덕철학의 체계 system of moral philosophy》를 썼고 그의 대표적 저작으로 꼽히는 그 책은 그가 죽은 뒤 1755년에 출간되었다.
허치슨은 주로 철학을 연구했고 그의 공헌은 윤리학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졌지만,《도덕철학의 체계》는 도덕철학을 총체적으로 다루었다(허치슨은 뒤에 제레미 벤담이 보급시킨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the greatest happiness for the greatest number 이란 표현을 맨 먼저 생각해낸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허치슨 아래서 도덕철학을 공부했고 허치슨이 차지했던 도덕철학 교수직을 1752년부터 1764년까지 맡았던 애덤 스미스(1723-1790)는 도덕철학을 총체적으로 다룬 저작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의 모든 저작들은, 《도덕적 감정들의 이론 Theory of moral sentiments》(1759),《국부 The wealth of nations》(1776),그리고 《철학적 주제들에 관한 논문들 Essays on Philosophical subjects》(1795)을 포함하여,도덕철학이란 체계에서 잘라낸 부분들일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18세기 전반에 도덕철학의 붕괴를 일으킨 전문화가 갑작스럽게 나왔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전반은 프란시스 베이컨이 "나는 모든 지식을 내 영역으로 여겨왔다"고 말한지 겨우 2세기가 지난 때임을 생각하면,그런 갑작스러움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러나 과학의 분화만으로 너른 분야들을 잘 아는 석학들이 드물다는 사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여러 분야의 지식들을 고루 갖추어서 세상을 개관할 수 있는 사람들보다는 아주 좁은 전공 분야의 지식을 상대적으로 깊이 가진 사람들을, 이른바 전문가들을, 훨씬 높이는 풍조도 큰 몫을 했기 때문이다.
과학의 분화가 진행될수록 그런 풍조도 따라서 깊어지고 존경받는 과학자의 심상은 아주 좁은 분야에 관해서 깊은 지식을 쌓았지만 그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현상이 우리 시대에서만 나온 것도 아니다.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이 융성했을 때,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은 엄청난 양의 지식이 모인 곳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뛰어난 지식인들이 모인 곳이기도 했다.
그 뛰어난 지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에라토스테네스(기원전 273-기원전 192경)였다.
그는 참으로 뛰어난 학자였다.
그는 지리학에서 큰 업적을 남겼으니 구형 지구의 수리지리학 mathematical geography를 확립했고 해의 남중을 이용해서 지구의 크기를 놀랄만큼 정확하게 쟀다.
수학 분야에선 정입방체의 배가(倍加)문제를 다루었고 소수(素數)를 찾아내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를 생각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훌륭한 언어학자이기도 해서 고대 희랍의 희극에 대한 그의 연구는 후대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
그리고 과학사의 선구적 업적들인 철학사와 지리학사를 썼다.
한 사람이 그렇게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들을 남겼다는 것은 놀랍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경멸을 받았다.
그에게 붙여진 별명들인 'beta'와 'penthathlos'가 그 점을 유창하게 말해준다.
'beta'는 '제2인자'나 '2류'를 뜻했다.
'penthathlos'는 원래 5종 경기(penthathlon)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린 사람들을 가리켰는데,차츰 여러 것들에 손을 대서 많은 것들을 잘하지만 한 가지 일에도 전문가가 못 되는 팔방미인을 뜻하기도 했다.
여러 분야에서 실질적이고 뛰어난 업적을 쌓은 에라토스테네스에게, 단지 그가 여러 분야들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별명들이 붙여졌다는 사실은 2300년 전 과학의 분화가 상당히 진행된 헬레니즘 문명에서 너른 분야들을 섬렵하려는 동료들을 얕보는 풍조가 학자들 사이에서 깊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너른 분야들에 관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그렇게 푸대접을 받는 사정은 물론 복잡할 것이다.
그러나 좁은 전공 분야를 벗어난 지식은 일상 생활에서 쓸모가 거의 없다는 생각이 한몫ㅇ르 하는 것은 분명하다.
좁은 전공 분야에 관한 지식이나 기술을 충실히 갖추었으나 전공 분야를 조금 벗어나면 아무 것도 모를 뿐 아니라 모르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과학자나 기술자를 만나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공 분야 밖의 지식이나 기술이 자신들에게 무슨 가치를 지니리라고 생각지 않으며 실은 그런 지식들을 얻는 것이 전공에 방해만 된다고 여긴다.
어떤 뜻에선 그들의 생각이 옳다.
전문화가 크게 진행된 사회에선 지식의 생산과 소비도 매우 전문화되어서 어렵게 얻은 비전공 분야의 지식을 실제적 일에 쓰는 것은 아주 드물고 힘들다.
그런 뜻에서 그런 지식은 쓸모없는 지식이다.
이렇게 보면,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들은 대부분 쓸모없는 지식들인 셈이다.
아마도 그래서 조지 오웰이 좀 서글프게 말했으리라, 지식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질은 쓸모없는 지식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세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문자를 세워야 한다고, 특히 문자를 옳게 세우는 길을 따지는 방법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고집한 한 지식인이 모은 쓸모없는 지식들이다.
주제는 주로 과학과 기술이지만,내가 가장 큰 흥미를 느낀 부분은 단순한 과학 지식의 이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지식들이, 자연과학 지식들과 사회과학 지식들이,나아가서 과학 지식들과 예술 지식들이, 어울려 작용하는 모습들이다.
그래서 내 마음은 늘 점점 정교해지는 사회공학,미래사회의 모습,그리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담긴 함언들을 드러내는 과학소설로 끌린다.
여기 실린 글들이 비슷한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만나기를 바랄 따름이다.
1996년 봄
복 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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