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발렌타이데이





                                              김선미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발렌타인데이!

그 해, 마흔을 눈 앞에 둔 나이에도 들뜬 마음이 남아 있어 괜스레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며 걸었다. 



거리마다 넘쳐 나는 쵸코렛의 무한대 변신. 어느 광고 카피처럼 '여자의 변신은 무죄'고 

쵸코렛의 변신은 황홀한 유혹이며 사랑을 향한 여자들의 달콤한 경주라고나 할까?



예년보다 쵸코렛 포장이 더 화려해지고 그 쵸코렛을 담을 바구니 또한 호화 찬란한

장식을 주렁주렁 달아 한껏 뽐내는 틈바구니로 나이를 잊은 여자들의 더 눈에 띄는

모양을 고르려는 손길이 분주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느새 나도 그 무리 속에 

휩싸여 여러 모양의 쵸코렛을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작은 바구니가 쵸코렛으로 가득 찰 무렵, 

"샥시, 워떤게 이쁘우?"



돌아 보니 칠순을 넘긴 듯한 할머니께서 여러 개의 쵸코렛을 손에 쥔 채 난감한 

표정으로 서 계셨다.



"할머니, 어디에 쓰실 건데요?"

"......"



아무 말씀없이 손에 꼭 쥔 대여섯 개의 쵸코렛만 쳐다 보고 계셨다. 생각해 보니 

할머니는 꽤 오랜 시간 사람들 속에 계셨던 것 같다.



"할머니, 여러 종류인데 맛은 거의 비슷비슷해요."

"영갬 주려는데... " 말끝을 흐리신다.



"할머니, 이건 그냥 쵸코렛이구요. 이건 땅콩 크림 들어간 거구요. 아참, 술이 들어간

것도 있어요."

"그려? 영갬이 술을 징허게 좋아혔써.."



'혔써??...' 왠지 가슴에 쏴한 무언가가 훑어 내려 가는 기분이었다.



"할머니, 제가 몇 개 골라 볼까요?"

"그래 줄라우..." 그제서야 표정이 밝아지시는 할머니.

"할머니, 할아버님께서 좋아하시는 색은요?"

내 바구니에 가득한 쵸코렛을 쏟아 부어 놓고 이것 저것 고르기 시작했다.



"영갬은 유난히 누런색을 좋아혔구먼."

그러고 보니 할머니 손에 올려져 있는 쵸코렛의 포장은 모두 금빛 계열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신다는 금빛 계열과 조화를 맞추어 한 바구니 가득 담아 계산대로 

가려는데 할머니께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손에 꼭 쥐어 주신다. 반으로 곱게 접힌 

오천원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 들어 계산대로 갔다. 



"돈이 모자라진 않았수?"

"네, 할머니, 점심은 드셨어요?"



"샥시는 먹었수? 아직 식전인게비네? 나가 국수 사 줄틴게 먹어."

"아니요. 전 됐어요. 할머니."



"샥시? " 

"네? 할머니.."



"기왕 고생한 거, 이렇게 만들어 줄 수는 없는감?."

할머니는 진열대위에 놓은 장식 바구니를 만지작거리셨다.

"네에, 그러세요."



아이보리 한지 위에 금빛마로 장식한 바구니와 구슬장식 리본, 테잎, 무색 셀로판지

 

팽킹가위를 사 들고 한가한 식당 구석진 자리에 짐을 풀었다. 



할머니는 당신 그릇의 국수를 연신 내 그릇으로 넘기시며

"미안하우. 샥시, 가는 길도 바쁠틴데.."

"할머니. 저 이렇게 생겼어도 많이 안 먹어요. 그러니 좀 드세요."



자꾸만 미안해 하시는 할머니에게 너스레 떨면서 포장하고 있는데, 혼잣말처럼 

입을 여셨다.



"영갬이 일 년 전에 교통사고 났다우.. "

"네에. 후유증은 없으세요?"



"아녀, 시방 뱅원에 있써. 자석들은 틀렸다고 포기하라지만 난 못 하우. 금방이라도

'할멈' 부르며 일어날 것 같아서 " 말끝을 흐리며 눈물을 훔치신다.



"샥시, 우리 땐 말이우. 목구녕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기 바빠서, 사랑이 다 머시당

가. 

젊어서 고약한 자기엄니 땜시 고생 혔다고 늘그막에 귀경이나 다니자며 운전 배웠는데... 

그려! 난 포기 못혀..."



할머니는 나약해지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라도 하시려는 듯, 이미 식고 불어버린

국수를 국물까지 모두 잡수셨다.





"샥시. 자석들은 몰러. 제 아버지 때문에 들어가는 병원비만 크지 내 찢어지는 

가슴을 모른다우. "

"...."



"사고 나기 전에 말이우. 다시 태어나면 나랑 살겠다는 영갬한테 고생하는 거 징혀서

싫다고 했수. 호강하며 살고 싶다고, 그 말이 맴에 걸려."   

자꾸만 목이 따끔거려 왔다.



"간호원 샥시들 혀는 야그 듣고 나왔는데 막막하데, 뭘 알아야제 챙기면서 살아 

봤어야 알제. 아첨부터 있었는데 못 골랐써."

"네에."



"고마우, 샥시. 줄 껀 없구. 이거라도 받우. 돈 많이 썼을꺼구먼. 세상 물정 모르는

늘근이라두 오천 원 가지고 어림없제." 

하시며 손에 끼고 있던 은가락지 한 짝을 빼어 주신다.



"할머니, 전 할머니 통해서 전하는 거예요. 저도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줄 수 

없거든요. 그러니 할머님이 제게는 고마우신 분이세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물이 흐른다.



서른 여덟의 여자와 칠순이 넘은 여인은 둘이 그렇게 한참을 마주 앉아 있었다. 

서로 다른 자신들의 사랑이 잘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사람살이 굽이굽이 사연도 많다더니, 우연치 않은 곳에서 마음을 다져 본다.

그대 살 중에 살로 뼈 중에 뼈로 만나서 그리움 올올이 풀어내며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아니, 그건 너무 큰 욕심이고 그저 그렇게  곁에서 웃음이고 이야기이고 

여자이고 싶었는데...





행복한 바구니가 되어야 하는데 괜스레 눈물 바람이 된 것이 못내 할머님께 죄스러웠다.

"할머니 어떠세요? 맘에 드세요?.."

"쩌그 가게에 있는 거 보덤 이쁘네. 샥시, 장사혀도 되것써. "

"다행이예요. 마음에 드셔서 할아버님도 할머님 마음 알아 주실 거예요"

"건강혀서 댕길 때  한 번이라도 혀 줄걸. 이러코롬 이쁜데..." 바구니를 부둥켜 안

고 자꾸만 혼잣말 하신다.



"샥시, 고마우." 연신 고맙다며 손 흔드는 할머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젊어서 장사하느라 팔도를 제 집 드나들듯이 돌아다녀 팔도 사투리가 섞여서 

나온다는 할머니를 보며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는 듯 마음 한 켠이 아려 

왔다. 미련 남은 이야기도 아쉬운 몸짓도 못하고 '싫다', '좋다' 마음 조차 

열어 보지 못한 채, 표현하지 못한 사랑이 시위를 떠난 화살에 실려 세월 

저 편,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망각의 시간 속으로 사라진 것에 안타까움을 

더하는 살았던 여자들, 

우리 어머니들, 그 여인들은 이 시대의 사랑 풍속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래, 사랑은 나이나 살아온 연륜에 상관없이 애달픈 것인가 보다. 

누구나 그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아 사랑이 멀어지고 난 후에야 마음이 

아린가 보다. 그림자가 아침과 저녁에 가장 길고 정오에 아주 짧거나 

없는 것처럼...





나는 꿈 꾼다. 거친 숨소리로 다가 오는 열정적인 사랑보다 

늘 곁에 있기에 애달프지 않는 고향 같은 그윽한 사랑을, 



하늘가에 잠시 피어난 황홀한 무지개 보다 

맘껏 쳐다보아도 질리지 않는 쪽빛 하늘 같은 사랑을, 



채우지 못하는 텅 빈 그리움 보다 

찻잔 가득 채워진 따스한 온기의 헤이즐넛향 같은 그리움을, 



큰 꿈 잃어버린 패배자의 슬픈 절규보다 

내 안의 희망을 소중히 여기는 모래알 같은 작은 꿈의 사랑, 





나는 그런 사랑을 꿈꾼다.

인간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아름다운 진심, 미학의 절정, 

삶이 지나는 길목 어디쯤에서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詩와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