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 일본 바둑계를 天下統一하다

전관왕 위업을 달성한 趙治勳 九段
[제 7기 일본 棋聖전 도전 7국]

▲ 한국의 청년 기사 조치훈과 일본 바둑의 자존심 후지사와의 대결

침묵이 감도는 일본기원 대국장에 두 남자가 들어선다. 젊은 쪽은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는 20대 청년. 맞은편에는 백발(白髮)의 남자가 가느다란 담배를 태우며, 명상에 잠긴 청년 곁을 살며시 지나친다. 바둑 팬들의 마음을 들썩이는 그들. 도전자 조치훈(趙治勳) 9단, 기성棋聖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9단이다.

1983년 3월 16, 17일 사이에 벌어진 기성전 마지막 7국이 끝난 초저녁.

“치훈군, 축하하네.”
조치훈 9단이 일약 일본 바둑의 일인자에 오르는 순간이다.

두 남자, 그리고 사투. 전관왕을 달성하기까지 단 하나의 타이틀이 필요한 조치훈. 이에 맞서, 단 하나 자신의 보루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후지사와. 그들의 대결은 입담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
호기(豪氣)로 가득한 도전자의 말이었고, 기성은 잠시 생각하였다.

“조치훈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한 가닥만 보지만, 나는 두 가닥을 본다.”
바둑의 진수는 실력 외에도 인생에 대한 통찰이나 깨달음을 수반한다는 발언이었고, 전국 각지의 바둑 팬들은 환호하였다.

그들의 대국은 치열했다. 흑번黑番의 후지사와는 호방한 기풍에 걸맞게 중국식 포진을 들고 나왔고, 조치훈은 두 귀를 모두 삼삼에 착수함으로써 승부의 투지를 불사르고 있었다.
13수가 지난 포석에서 바둑의 노선이 정해졌다. 실리와 세력의 균형을 알맞게 유지한 棋聖, 그리고 배석을 전부 3선에 포진한 도전자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백 14의 걸침에 棋聖은 신수를 들고 나왔다. 흑 15의 수는 대개 프로라면 두지 않는 발상. 그러나 필자는 지금까지 棋聖의 대국에서 자유로운 수법의 전환을 종종 봐 왔다.
결국, 15의 수로 흑은 우하에서 실리의 손실을 봤다. 그러나 25 어깨짚음 한 수로 전세를 역전한다. 역시 ‘괴물 슈코’라는 그의 별호가 무색하지 않다. 어깨를 곧게 편 기성은 태연히 담배를 한 개비 물었고, 도전자는 연신 투덜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95수 째 중반에 이르러 흑을 든 후지사와의 반면 열 집 우세가 확립되었다. 도전자의 공세를 버텨낸 기성은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치훈은 마치 비장의 보검처럼, 역전의 한 수만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전자는 142수로 상대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에 기성은 즉각 반발했는데, 바로 그 판단이 화근이었다. 그는 필요했던 선수 자리를 행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추어는 함부로 결행하다 지고, 프로는 아끼다 패한다고 했던가? 도전자의 교묘한 수순으로 바둑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덜컥 슈코’… 일본기원의 검토실에서는 탄식이 흐르고 있었다.

164수를 두는 조치훈의 손길이 야무지다. 그에게서 어떤 승리의 기운을 감지한 것일까? 기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도전자가 마지막 공배를 메우면서 대국이 끝났다. 계가 작업이 남았지만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진기자들을 위한 배려일 뿐이다. 268수 끝, 백 1집 반 승.

“축하하네, 치훈군.”
“선생님, 고맙습니다.”
바둑계 최고 권위인 기성을 쟁취한 조치훈. 이제는 완전한 일인자가 된 청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노장, 후지사와. 한일 바둑계의 두 영웅이 악수를 하는 장면에 이르자 기자들은 일제히 셔터를 눌렀다.

비록 승자와 패자는 나뉘었으나, 그들이 보여준 집념과 열정, 그리고 세대를 뛰어넘는 혈투는 바둑 팬들의 가슴에 오래 남게 될 것이다.
개인적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유감없이 승부한 두 기사에게 갈채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