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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리. |
| 글쓴이 파계승21 조회 2926 |
작성일 2002-08-21 오전 7:3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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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존경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어릴 때는 근면과 정직이 강조되어 교과서에 실렸던 에이브러햄 링컨과 인간의 한계와 불가능을 넘어선 헬렌 켈러였다. 청소년기에는 인생을 지성과 감성의 이분법으로 통찰한 헤르만 헤세,영국에 대해 무저항으로 버틴 ‘비폭력 운동’의 창시자 마하트마 간디가 위대했다. 분만실에서 산고를 치를 때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위대했고,운전교습소에서는 자동차 운전면허 소지자가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며칠 전,어느 상가 주차장을 나서며 아들아이가 말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저 분이에요”
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아들은 주차요금 정산대에서 맞인사를 나눈다.
“즐거운 시간 되셨습니까. 안녕히 가십시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정산대 안의 남자 음성은 밝고 정중하다. 앵무새처럼 외워대지도,녹음테이프처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지도 않는다. 그의 환한 미소에는 진심이 있다. 한결같은 직업의식으로 자신을 당당히 지키고 있다. 자신의 자리에 대한 자긍심은 겸허한 행동으로 옮겨지고,그것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자존심으로 빛난다.
자신의 일을 철저히 사랑하는 사람,그러므로 행복한 사람,그러기에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 상대적 빈곤감으로 스스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현실에서,아들의 지적대로 그 분은 존경받아야 할 사람임이 분명하다.
나는 유신체제 아래서 ‘인권’이라는 말을 무조건 맹신하며 젊은 날을 보냈다. 개인보다는 대중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제는 설전(舌戰)에 능한 큰 목소리보다는 제자리에서 따뜻한 인간애를 주변에 나누어주는 작은 목소리를 존경한다. 여성성(女性性)을 지나치게 호도하는 섣부른 페미니스트보다,아내와 어머니로 당당하게 지신의 위치를 지키는 한 여자의 주부라는 자리를 존중한다．
주부를 경제적 가치로도 환산하나,아내와 어머니로서의 가치는 무한대다. 그들은 ‘살림’의 주체자이기 때문이다. 여성 스스로 격하시켜 권리를 포기하는 ‘살림’은 ‘살리다’의 명사형으로,죽어가거나 죽을 수 있는 존재에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넣는 부활의 신적(神的) 행위인 것이다.
남녀 평등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북유럽 여성들은 검소하고 강건한 모습이다. 그곳에서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우리에 비해 현격히 높다. 그러나 인격적 동등권이나 가사와 육아의 분담뿐 아니라,생활비도 확실히 분담해야 하기 때문에 남자와 같이 일할 수밖에 없다．
제자리를 잃어버리거나 망각한 우리에게 내일은 있을 수 없다. 학문은 정치에 팔리고,명분 좋은 자리는 거간으로 전락하며,신성한 결혼을 앞세워 조건이 거래된다．
모든 존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만이 의미 있고 아름답다. 강물은 하염없이 흐르므로 존재하고,사랑은 사랑하므로 존재한다. 산마루와 들녘을 지난 한 줄기 바람이 여름에 지친 도시를 지날 때,아직도 어느 몽상가는 세월에 부대끼면서도 꿈을 꿀 수 있어,세상은 더 아름답다．
이옥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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