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혜빈의 엄마는 평소와 다른 혜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혜빈 삼촌을 찾았다.

"혜빈 삼촌! 삼촌, 큰일 났어요. 혜빈이가 이상해요. 밥도 안먹고 말도 안하고 멍하게 앉아만 있어요."

그렇게 시작한 엄마의 말은 상당한 다급함과 걱정이 담겨있었다. 혜빈이 바둑을 열심히 두는가 싶더니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혜빈아~ 뭐해?"

혜빈삼촌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혜빈에게 말을 꺼��다. 엄마의 걱정과 달리 혜빈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안정된 억양으로 말을했다.

"삼촌!~ 이상해!~"

"뭐가?"

"나 못 이기겠어!"

학교에서 신입생 선발전이 있어서 바둑을 두는데, 첫판은 쉽게 이겼는데 그뒤로 다른 동기들과 도저히 이기지 못하겠다는 푸념이었다. 그후 매일 매일 바둑 공부도 했는데 선발전 뿐만 아니라 선배들과의 연습 대국에서도 지기만 했는데 화가 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동기들이 혜빈보다 나아 보이는 것도 없고, 선배들과의 연습대국에서도 분명 바둑이 유리한 것 같은데 자꾸 진다는 것이었다.  삼촌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혜빈에게 물었다.

"혜빈아~ 너 하루에 바둑 몇 판 두니?"

"두 판 정도 둬, 친구랑 한 판 정도 그리고 선배들이랑 접바둑 한판정도..."

"그렇구나, 그럼 이제 학교에 가지말고 매일 10판씩 바둑 두도록 해"

"집에서 누구랑 둬?"

"컴퓨터 있잖아. 컴퓨터로 바둑을 10판씩 두고 저녁에는 삼촌이랑 바둑을 두고... 삼촌이 원고 교정 봐준 것 때문에 특별히 가르쳐 주는거다"

바둑이란 그랬다. 공부를 해도 늘지 않는 것이 바둑이고 공부를 안해도 느는 것이 바둑이었다. 초반 정석을 아무리 외운다 한들 바둑판 전체의 승부를 가리는 실전에서 도움될 일이 없으며 또 바둑을 접고 몇년을 바둑을 두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이 성숙해지고 인생의 연륜이 쌓이면 그동안의 바둑이 인생과 같이 녹아들어 화합하여 좀더 상수가 되는 것이 바둑이었다. 그런 바둑을 며칠 시험공부하듯이 하여 초보자가 먼저 바둑을 배운 사람에게 한판을 우연으로 이길지 몰라도 매번 이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초보자에게도 초보자에게 맞는 융합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혜빈의 삼촌은 혜빈이 비록 익힌 것과 인생의 경험이 적더라도 그것을 용광로에 들어간 금속들처럼 녹아 섞어 강한 합금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다음날 저녁,

"혜빈아. 삼촌왔다"

혜빈삼촌은 혜빈의 모습을 보고 그만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혜빈이는 의자에 앉아서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는데 여기저기 긁은 흔적으로 머리를 산발하고 있는 푸석한 얼굴이 마치 조치훈과 같아 보였다. 옷도 그날따라 유독 고등학교때 부터 입어 축 늘어진 체육복에 여자아이가 세수도 안했던지 피난민의 모습이었다. 삼촌은 놀라움반 걱정반의 목소리로 혜빈에게 물었다. 

"혜빈아. 도대체 몰골이 그게 뭐냐?"

"응? 삼촌 왔어? 일찍왔네? 몇시야?"

"시간도 모르면서 무슨 일찍왔다고 말하는거야?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

"응? 바둑 뒀지. 그냥 삼촌 말대로 바둑뒀어"

혜빈은 전날 바둑을 진 이유를 생각하느라 멍하게 있던 모습과는 달리 피곤에 절여져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눈에는 작은 빛이 빛나고 있었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듯, 또 잠을 자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이 말한대로 컴퓨터로 10판의 바둑을 두었던 것이다. 금새 둘 줄 알았던 10판의 바둑은 의외로 적잖은 시간이 들었다. 오전과 오후 절반씩 나눠두려고 했으나 오전에 겨우 3판의 바둑을 두었고 삼촌이 퇴근할때까지 중간에 쉬면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서 그자리에서 앉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냐리 7판을 다 두어버렸던 것이다. 아침부터 두기 시작한 바둑이 잠시 점심 먹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바둑을 두었으니 몰골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정도 고수였다면, 쉬면서 놀면서 설렁서렁 두었을 바둑인데 한판의 바둑을 두면 반상의 혼란함에서 헤엄쳐야하는 수준에서는 10번을 물에 빠져 물을 먹어가며 죽다 살아나기를 10번을 한 것과 같은 정신적 육체적 소모가 있었을 것이다. 아직은 바둑 두는 사람을 몰입하게 만드는 바둑에서 벗어나 자신의 바둑을 다른 사람 대국 구경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두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바둑에 몰입 되었다 한판의 바둑이 끝이나면 이완이 되고 또 신경을 조이는 몰입을 하고 그것이 10번이 되었다는 것은 고수가 피를 말리는 계가를 하면서 승부의 바둑을 두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바둑은 고수건 하수건 나름대로의 바둑이 있고 그 가치는 동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촌? 이렇게 하면 바둑이 늘긴 느는거야?"

"당연하지. 조금만 지나면 걸어다면서 바라보는 땅바닥에 누워서 바라보는 천정에 바둑판이 나타날꺼야. 그러면 분명 너는 네가 이기길 원하는 모든 상대를 물리칠 수 있을꺼야!"

"삼촌, 오늘은 피곤해서 도저히 삼촌이랑은 더 바둑을 못 하겠어. 그냥 잘게..."

혜빈이는 저녁도 먹지 않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이 들었습니다. 아직까지는 혜빈에게 삼촌은 바둑의 신과 동격입니다. 아마 오늘밤 꿈에라도 바둑판이 땅바닥에 천정에서 보이길 기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모르고 자는 어린아이처럼 자는 혜빈을 바라보며 혜빈삼촌은 혜빈이 정말 뭔가를 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혜빈삼촌도 스스로 혜빈처럼 하면 지금이라도 바둑이 늘까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그날 밤 혜빈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혜빈은 이 꿈을 여러번 꾸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꿈이란 것이 대부분 꾸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고 잠에서 깨어나고는 생각이 나더라도 대부분 금방 잊어지는 속성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꿈속에서 예전에도 이런 꿈을 꾸었는데 하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혜빈을 당기는 힘이 있었다. 혜빈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여러갈래가 있었다. 차들이 다니는 대로를 따라서 가는 길도 있었지만, 둘러가는 큰길보다는 조용하고 지름길인 골목길을 좋아했다. 승용차 한대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길이라 자전거나 보행자만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그 골목길에는 초등학교 동기네 집도 있고 아주 작은 교회도 하나 있었다. 횡한 대로에 매연을 뿜어내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보다는 혜빈은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골목길은 이상해졌다. 다니는 사람도 없어졌고 왠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무서운 느낌의 힘은 교회옆에 위치한 집에서 나오고 있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의도적으로 그 길을 피해서 옆의 골목길로 다니는 혜빈에게 그 어둠의 강력한 힘은 혜빈을 당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장력한 중력처럼 혜빈의 발걸음을 옮기게 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힘이 약해서 조금의 인상만 찡그리고 가던 길을 갈 수 있었으나 며칠 꿈이 반복되자 그힘은 혜빈의 심장을 옥죄왔다. 수중에서 수압에 의해 찌그러지는 철통들처럼 눌러왔던 것이다.

혜빈은 무서웠다. 꿈속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꿈을 꾸다 사람이 죽는다고 하더니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생각했지만 여전히 꿈임을 인식하고도 꿈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혜빈은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혜빈은 잠에서 깨었다. 안도의 긴 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의 시원한 물을 한잔 마시고는 다시 편안한 잠을 생각하며 자리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