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한 사람에 빠져있었다. 오래전 사람으로 동양 사상의 흐리고 탁한 물줄기를 맑고 차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사람의 책은 참으로 독서의 고단함을 덜어주고 격려가 되기도 했다. 이사람의 이름이 왕필이고 두권의 저술을 남겼다.

왕필(226-249)은 위진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노자주'라는 저서를 통해 오늘날 세상에 전하는 노자 담론의 팔할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그 어떤 학자가 노자를 운운 해도 결국은 왕필의 보법안에서 좌충우돌 할 뿐이다. 왕필은 또 다른 저서 '주역주'를 통해 4세기에 이미 상수주역의 견강부회와 치졸성을 털어 내는 혁명적(?)인 주역관을 펼쳐낸다.

 -올무는 토끼를 잡기위한 목적이니 토끼를 잡으면 올무를 버려도 좋고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위한 도구니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버려도 좋다. 언어는 象의 올무이고 象은 意의 통발이다. 하여 언어에 집착 하면 象을 얻기 어렵고 象에 집착 하면 意를 얻기 어렵다.

득의망상(得意忘象).

저 유명한 득의망상은 동양 철학사의 한 축으로 군림 하며 아직도 전혀 식상 하지 않은 담론이다. 노자와 주역이란 담론안에서 왕필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학문적 업적을 이룬 그가 죽은 나이는 23세다. 왕필은 23세에 이미 공자를 심각 하게 몰아 부치며 유가보다 학문적 우위에 섰던 사람이다. 적어도 당대에 그를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양철학사의 왕필의 독주는 공자를 부각시키려는 유가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하는 것이었다. 유가의 주역해석은 왕필사후 오백년후 정이천에 와서야 왕필을 극복하게 된다. 도가철학의 관점에서 주역을 해석한 왕필은 유가에게 사문(斯文)일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사전에 시지덕원이신(蓍之德圓而神)이 나온다. 시책의 성질이 원융하고 신묘하다는 의미로 주역점법을 말하는 것이다. 시책점법을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주자인데 다산선생은 '주역사전'에 이렇게 말한다.

-7x7=49 원융(圓融)하여 반으로 나눌수 없고 4로 쪼갤수 없고 6으로 풀수없고 8로 10으로도 3등분 할수 없다. 하여 주역 50수에서 하나를 덜어 49로 시책(蓍冊)을 삼은것이다.

다산은 1801년 강진 유배를 간 후 처음 4년간 온힘을 기울여 주역저술에 메달린다. 다산은 4년간의 시간도 부족하여 보강에 보강을 거쳐 1808년에 주역사전의 결정판을 탈고한다. 다산은 자신의 모든책중 이것만 보존된다면 나머지는 모두 불타없어져도 좋다고 했다. 천년후라도 이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있다면 그사람은 자신의 자손이고 친구라 한다.

주역사전은 학자의 고군분투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노작이다(참고 소명출판 주역사전 전8권 344쪽) 다산은 주역사전안에서 뜬금없이 공자가 개입된 주역의 견강부회를 털어내고 고증에 고증을 거친 엄격한 글쓰기를 보여준다. 주역을 해석하는 시각도 독창적이다. 그러나 다산마저도 독단이있다. 다산의 독단은 참으로 면구(?)하다.

-한나라 진나라이후 수백명의 주역학자가 있었지만 가장 볼것없는 인물이 왕필이다. (그런데도)왕필만이 전할뿐 다른 인물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유가의 액운이다.

(漢晉說易之家不下百數而最無狀者王弼至于後世諸家書廢唯王學獨傳斯文吾道之厄運. 주역사전)

나는 안목이 짧아 다산의 '주역사전'이 왕필의 '주역주'보다 월등하다 보지 않는다. 다산의 주역이 왕필의 주역보다 찰지고 깊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다산의 왕필의 평은 냉혹하고 독하다. 이건 평이 아닌 비난이다. 사상의 자유가 없던 시대라는 것을 이해하고 읽더라도 적어도 한분야의 대가(大家)의 필설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다산의 필설에 사연은 있을것이다. 다산은 스스로 유가의 종통이 되고자하는 자존이있었다. 유가의 자존은 주역의 이해와 해석에 수준이 갈리던 시대 다산이 왕필을 견제한것은 유가의 생도지망이자 다산의 학문방식일 것이다. 나는 억지로 그렇게 이해를 한다.

다산은 청나라학자 '모기령'을 미친놈(?)으로 치부한적도 있다. 고증으로 치열한 글쓰기를 하는 모기령이 주자의 학풍을 흔들자 여름매미가 아무리 나무를 흔들어도 밑둥은 끄덕하지 않는다며 질타를 가하기도한다. 비평은 사람을 키우는 힘이다. 비평은 할수록 칭찬을 받고 받을수록 내공이 깊어진다. 비난은 반대일것이다.

비평과 비난은 힘든일이다. 천하의 다산선생도 그점에서는 무오류하지 않다. 인터넷글쓰기는 참으로 가볍고 허접하다. 그러나 문사연하고 구태연한 종이 글쓰기를 반성케하는 장점도 있다. 세상이 변했다. 인터넷글쓰기는 이미 덕(德)과 문(文)이 피어나는 경성(京城)이 된지 오래다. 우리는 조금더 분발이 필요하다. 나작(我作)의 명칭을 고치기전에 나작을 지키고 다듬는 노력과 반성이 있어야한다. 이여름 나는 나작에서 그것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