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가장된 조우(遭遇)

“사람 살며 가고 오고자 하는 일만이라도 뜻대로 된다면 좋을텐데

내 발 내가 달고 다녀도 인간사 그것 하나 여의치가 않군요“

아! 이제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얼마 남지 않은 그의 글을 다시 읽어 갔다

“오고 싶어 온 길은 아니었지만 속죄를 원하는 부정하고 싶은

세월에 찍힌 발자국들은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있고

그곳에서 갯벌의 진흙처럼 내 발끝에 묻혀온 사연들이

걸음을 떼기 어렵게 배달려 있어 등에 옮겨 등짐으로 바꾸어 메어 보기도 했지만

후회와 번민의 무게는 하나도 줄지 않고 매달려 있습니다“

"내 손으로 짤라낸 손가락은 .다시 자라지 않았지만

남의 것을 허락 없이 가져오는 허튼 마음은 뿌리도 없이 밤사이면 무성히 자라나

내 발을 묶어 속죄를 허락하지 않고 있읍니다"

내게도 세월에 짐이 얹혀있고 때론 힘겨워 그냥 주저앉고 싶어했다

그러나 명섭氏의 편지를 읽으며 내가 지고 온 불효의 짐은

그가 등에 걸머멘 무게보다 작은것 인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저울을 만들고 있었다

“가고 싶어 했던 순탄한 길보다 더 많은 거리의 길을 빙빙 돌며 걸어와야 했던

나의 길은 어쩌면 운명이 이미 깔아 놓은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곳저곳에 내 모습을 흘리고 지나다 돌아보니 그곳에서도

또 다른 사연들이 따라 붙어 지고 다니기에 너무 힘겹기에

참사람 소장 앞에 이제 그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남은 길을 다시 갈까 합니다“

장황 할수도 있는 그의 편지는 끝나 있었지만

나는 그대로 편지를 손에 쥐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까닭모를 슬픔이 밀려오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족쇄처럼 나를 묶던 의문의 수갑은 풀렸지만 명섭氏가 던진

사연의 올가미 속으로 들어갔던 내 발은 발을 뽑으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많이 엉켜있는 넝쿨 속으로 한발 두발 빠져 들어갔고

나보다 세월을 10년은 앞서 지나간 그가 지고 다녔던 삶이 얹힌

짐의 무게를 달아보고 싶은 엉뚱한 호기심과 어쩌면 그가 온길을 되짚어 다녀오면

내가 지고 있는 짐을 내려 놀것 같은 작은 희망의 촛불을 들고

어둡고 희미하지만 이제 내게서 떠나려는 그가 걸어온 길속으로 들어가
그의 모습이 되어 그의 옛일 속으로 함께 되돌아 가보기로 했다

*명섭氏가 편지로 알려준 그의 얘기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명섭아!
내가 살아온 사연들을 구구절절 책으로 써 내리면

아마 열권도 더 나오겠지?“

틀니를 빼내면 오물오물 거리는 입으로 훌훌 풀어내던 할머니의 웃음을 산에 묻고 돌아와

다리 뻗고 울새도 없이 어머니와 나는 이삿짐을 꾸렸다

70년대 말미에 서울에서 벽지나 다름없던 제천 남당 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은

어머니의 낙담은 이만저만 큰것이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아버지 없이 두 모자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교사직을 버리지는 못하고

햇볕 따라 뚜껑을 열고 덮던 할머니의 낙(樂)이 담긴 장항아리들도 버려두고 가는

단출한 이삿짐 차안에서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우리 두 모자는 제천으로 그렇게 이사를 떠났다

제천은 중앙선 한 구역에 중심지로 동쪽으로는 영월,사북을 넘어 황지를 거쳐

북평으로 이어지는 태백선(太白線)과 영동선(嶺東線)을 끼고 있고

남서쪽으로는 음성,충주 ·청주를 거쳐 조치원으로 통하는 충북선을 거느리며

영동과 중부 충청 내륙을 이어주는 분기점인 제천역을 안고

교통의 요충지임을 자랑 했지만 서울 도심의 풍경이 익숙한 내 눈에는

그저 그런 한적한 동네에 갑자기 어디선가 버림받은 듯한 기분이 되어

휑한 거리를 바라보며 익숙하지 않은 제천 바람에 몸을 떨어야 했던
낯설고 외진 곳에 불과했다

출근길을 멀리 두지 않은 역전 로타리 근처의 집으로 이사 한것을

돌아가는 날까지 가슴을 쾅쾅 치며 후회 했던 어머니는

세파(世波)를 헤치며 아들이 떠돌게 될 작은 배가 나루터 노릇을 하던
제천역에 떠있었고 울리는 기적소리가 출발을 재촉하던 신호였음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배로 손을 잡고 나를 건네줄 길라잡이가 이사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에 모습을 곧 드러낼 것 이라곤 생각치도 못했을 것이다

급하게 구해야 했던 제천의 새집은 약간의 옆 공간을 일정하게 두고

윗부분을 세모로 깍아 만든 작은 나무 널빤지로 깔끔하게 둘러친 담장과

그 안에 잔디가 3~4 평쯤 깔린 작은 정원으로 눈길을 끌었고

그때론 보기 드물었던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되어있어

어머니의 마음을 한눈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큰길로 나가는 입구에 허름한 집 한채가 경관을 해치고 있어

마음에 걸린다고 하시면서도 지금의 아파트 지구처럼 10채씩 줄지어

5개의 골목을 이루는 동네의 모습은 아름답게 까지 보여 그 유혹을 떨구지 못했겠지만

결정적으로 그집을 택한 어머니의 마음은 부촌처럼 보이는 동네로 이사와

교사의 품위를 높이는데 한 몫을 할것 같은 자리로 옮기는데 드는 비용이

서울 집을 판돈과 거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것이다

그럭저럭 몇 달을 제천에 몸을 맞춰가다 별나게 눈에 띠는 한 사람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사 오기 전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하던 그 허름한 집앞에 해바라기를 하며 앉아있는

자신이 사는 집처럼 허름한 중늙은이가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60은 않되 보이지만 50중반은 넘어 보이는 그는 햇볕이 잘 쪼이는 자리를 찾아 옮기며

늘 접이식의 작은 바둑판을 앞에 두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했던 것은

마주 하는 상대가 한번도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 판에는 언제나

몇수 두지 않은 돌 깔림만 있었는데도 그는 그것을 쉬지 않고 들여다보며

이웃 어른에게 인사를 부치던 내게 한마디 답례의 말을 건네지 않는 괴팍함을 부렸고

더욱 괴이한 것은 바둑판 옆으로 다가서면 자리 걸침을 묵인하고

손으로 몇수 않되는 것을 복기 또 복기를 하다

내가 그의 손길을 따라 눈길을 주면 가끔 내 눈길을 바둑판으로 유인해

턱을 치켜들고 자신의 눈과 내 눈을 합쳐 다음 수를 움직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바라는것 같은 몸놀림을 보인다는 것이다

알수없는 그의 행동은 강한 빨판의 흡인력으로 점점 내게 다가 오며 힘을 내고 있었고
나는 한발두발 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다가서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