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아! 내가 이렇게 불러  본지도 벌써 7년의 세월이 흘렀구나.

 정말, 물같이 흐르는 게 세월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지켜보면 꼼짝도 않다가도 한눈만 팔면 어느새 저만큼 물러가 있으니 말이다. 사실 우리가 세월속에 살고는 있지만 이처럼 참으로 모르고 사는 게 또한 세월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내가 영천에 있는 너희 집을 찾았었다.

 그곳에도 세월이 많이 흘렀더구나. 그 많던 개들은 다 어디가고, 지금은 집지킴이인 듯, 두 마리밖에 없었다. 그 공간을 닭들이 메우고 있더구나.

 그러나 닭장에서는 공산품이 아닌 살아있는 닭들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한쪽에는 어른들이 모이를 쪼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젊은것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으며, 구석진 곳에서는 아기들이 어미를 따라다니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대가족의 전형이었다. 역시 대가족은 사람이든 가축이든, 살아가는 냄새가 나고 생명력을 느낄 수가 있나보다.

 집 앞의 연못은 고기들의 천국이었다. 전에는 황소개구리가 연못을 차지하고 있어, 소위 생태계 파괴를 걱정했었는데 그동안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 황소개구린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잉어와 붕어들이 평화를 구가하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더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비가온 뒤라 황톳물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던져준 개밥을 먹으러 고기들이 유영해오는 모습은 영락없이 물위로 부상하는 잠수함들이었다. 여기에도 아기고기들은 있었지. 아직은 개밥이 너무 커 주둥이로 밀고만 다녔지만, 먹이보다 평화만 먹어도 쑥쑥 자라나 곧 이곳의 주인이 될 것만 같았다. 

 네 아버지가 아침마다 잠에서 깨면 맨 먼저 닭장을 찾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개밥과 닭 모이를 주고 있더구나. 밤새 산짐승들이 내려와 무섭지는 않았는지, 밥과 물이 모자라 배가 고프고 목이 타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개에게는 늘 닭들을 잘 지켜주라고 당부하고는, 개밥을 한웅큼 들고 연못으로 가서 휘파람을 길게 분다. 고기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다.

 이때 네 어머닌 사과즙을 만들어 연못까지 내 오고, 뒤 미쳐 아침 드시라고 동은이가 구르듯 쫓아 나온다.

 할아버지 할머니 진지 드시라고 고하기 전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잊지 않는 게 있더구나. 먼저 안녕히 주무셨느냐는 아침 문안인사였다. 매일 잠에서 깨어나면 빠트리지 않고 하는 동은인 누구에게서 인성을 배우고 있었을까? 바로 너희 집의 사랑과 평화가 그렇게 키워가고 있지 않았나 싶었다.

 미영아, 이게 바로 너희가족 3대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평화스럽고 지혜 스러우냐? 할아버지에게 제 부모가 하는 것을 그대로 배우고 있었고,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산교육은 초등학교 3학년인 민선이, 1학년인 동은이, 유치원에 다니는 민경이를 통해 그대로 나타났으며 이들 3남매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티 없이 맑고, 밝고 반듯하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도 요즘 아이들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예절바르고 기개 찬 서당 아이들이었고, 요즘 눈으로 보면 영락없는 문화재들 감이었다. 아침부터 밤늦도록 학교와 학원으로만 내 몰리며, 오히려 친구를 경쟁대상으로 보고, 자신도 모르게 우정보다는 이기심을, 믿음보다는 의심하는 마음을 키워가는 도시아이들과 어찌 비교될 수 있을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어나 닭장과 텃밭에 나가고, 어머니가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할 때, 요것들도 일어나 감기는 눈 비비며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문안인사부터 올린다. 방에 있으면 방으로, 텃밭에 있으면 텃밭으로 찾아 나와 밤새 안녕히 주무셨느냐고 꾸벅 절하는 모습은 보지 않고는 사랑을 느낄 수가 없다. 느끼는 게 아니라 퍼가는 느낌이다. 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아끼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나 기특하냐?

 아침상을 들고 내는 것도 막내삼촌인 현학이와 동은이 몫이다. 다 큰 삼촌과 꼬맹이 조카가 10여 명분의 밥상을 둘이서 맞들고 뒤뚱대며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해보아라. 미울까? 고울까?     

 엄격히 절제된 예절에서 사랑을 끌어내고, 넘쳐나는 사랑 속에서 호연지기를 키우고 있는 게 그래도 남자라고 동은이더구나. 상을 물린 후에는 여자라고 민선이가 커피주문을 받는다. 엄마가 타준 커피를 쟁반에 받쳐오는 민선이의 미소가 어찌 그리도 맏이답더냐?

 마침 방학 때라 종일 집에서 놀았지만 조금도 찡그리지 않고 잘도 어울리더라.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는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며, 마당에 나가 흙과 어울리기도 하고, 벌통과 닭장 그리고 연못을 돌면서 자연을 살피고 얘기를 나누며 깔깔대는 그들도 영락없는 자연이었다.

 할아버지가 기(氣) 치료를 끝내고 마지막 순서로 환자의 등을 두드려 줄 때에는, 어디서 놀다가도 두드리는 소리만 나면, 이를 듣고 달려온 동은이가 할아버지 등에 바싹 붙어 앉아 할아버지 흉내내듯, 타 닥 탁탁 하는 장단에 맞추어 할아버지 등을 두드린다.

 나무등걸의 매미처럼 달라붙은 꼬맹이 동은이가, 두드리는 소리와 힘은 어찌도 할아버지의 장단과 꼭 같더냐? 두 사람의 장단이 어우러지니 그대로 2중주가 되더라.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지고, 동은이 얼굴엔 자랑스러움 같은 게 감돌더구나. 여기에서도 동은인 할아버지의 사랑을 먹고, 할아버지는 동은이가 주는 믿음에 행복해 하고 있더구나. 

 이기심을 불태우며 자란 영악한 도시 아이들이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어 매 마르게 안겨주는 성취감과 동은이가 안겨주는 이 행복은 같을 수가 없다.

 심성도 다듬어 지기 전에 지식부터 뽐내는 아이들과 어릴 때부터 인간으로서의 예절을 익히고 호연지기를 기른 아이들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느냐?

 도시아이들의 성취는 대부분 자신만의 것이 될 테지만, 동은이는 필히 이웃과 사회를 위한 성공이 될 것이다. 오늘날 동서를 막론하고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자식 교육이란 동양철학을 실천한 나라들이 하나같이 선진국이 되고 있다. 이들 나라의 어린이들은 지식부터가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질서부터 배우고 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예절과 의무를 익힌 후에 문명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배우게 한다. 바로 동은이같이 키우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옳은 까닭은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 해도, 또 아무리 아니라 해도, 인간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하는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영아,

 여기 동은이가 커가면서 할아버지에게 안겨드리는 이 행복이야 말로 어른들이 누리고 싶은, 작지만 참으로 소중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이번 너희 집 나들이는 나에게도 행복한 나들이가 되었다. 고맙다 미영아. 바로 이런 게 자식들에게서 나오는 어른들의 진정한 행복인 것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