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비 (10)

治善 노인이 내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손을 포개며 감싸왔다

깡마르고 야윈 손은 차가웠지만 마음을 지나는 그의 눈은 따듯하게 느껴졌다

“살다 보면 어느 날 운명처럼 마음을 꽉 채우며 눈에 들어오는

멋진 인생의 길이 보일 때가 있다네

어떤 길이던 그 길에 오르면 독한 술처럼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魔性(마성)의 꽃이 화사하게 향내를 풍기며 피어있고

그저 꽃길 따라 걷기만 하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세상 이상향 (理想鄕)에서 살 수 있다고

화려한 유혹의 손짓을 해대지

그러나 그저 쉽게 지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낙원 같은

魔性(마성)의 꽃길은 수없이 많은 고개고개로 이루어져있고

고개를 지날 때 마다 통행세로 젊음의 피를 뿌려야만 지날 수 있는데

그 꽃길에 피어있는 꽃들은 젊음의 피와 진액을 마셔야만 살 수 있기 때문 일세

그 꽃들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잃었는지 아무 것도 생각지 못하게

화려하게 피어난 꽃잎과 이상향 (理想鄕)의 향기를 뿜어

인생 항로를 수정할 방향키를 자아의식 속에서 뽑아내 외길만을 걷게 하며

꽃길에 들어 선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젊음의 세월을 모두 빨아들이지

사람의 힘이 떨어지고 지쳐 젊음의 진액이 모두 떨어지면 모두 꽃들은

내 뿜던 향기를 멈추고 화려했던 꽃술과 꽃잎을 거두어

젊음을 잃은 자를 추방하거나 작은 이성이나마 남은 자를 스스로 떠나게 만들고 마네

꽃잎이 말라 바닥에 떨어져 바람에 쓸려가는 너저분한 길을 보며

숱한 가시의 스치고 베이고 찔렸던 상처가 쑤셔오는 통증을 느낄 때

풀잎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침 햇살에 마르면 사라지는 이슬처럼

이상향 (理想鄕)또한 한낮 꿈과 같은 것을 알고 처음 시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한 장 뿐 이여서 다시는 다른 길을 걸어볼 수 없다네"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지

서로 같은 시절을 살지 않은 사람끼리는 세월이 벌려 논 거리감이 있으면

어떤 이야기가 되던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많은 법인데

하물며 아직 성숙치 않은 약관의 자네에게 너무 이르고 무겁지 않을까 하고 말일세“

마른기침이 터져 나오며 잠시 끊어졌던 治善 노인의 말은

한 컵의 물을 여러 번 나누어 마신 후에야 간신히 다시 이어져 갔다

“굳이 다시 뒤져보고 싶지 않은 젊은 날을 뒤돌아보기 시작 한 것은

옛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을 너무 많이 닮아 있는 자네를 만나고 난 후부터였네

사람들 모두가 지나 왔고 가야 하듯 내게도 지나간 젊음이 있었지

격동의 세월을 지나야 했던 나와 자네 부친 그리고 그 세월을 지나야 했던

그 시대 우리 깨어있던 젊은이들은 일제의 압정에 시달리는 나라 잃은 3000만 동포라는

연인을 사랑하는 애국애족이라는 집단 열병에 걸려 있었네

아마 그때 우리는 어느 것이 진정 바른 길인지 가늠도 해보기전에

한 나라의 운명이 우리 어깨에 걸린 양 독립해방과 건국이란 골인 지점을 향해

죽자 사자 뛰던 마라톤의 주자들과 같았을 것이네

옆에서는 천둥 벼락이 치던 처자식이 죽어 나가는 줄 도 모르고 주위를 살피지 않고

앞에 설정된 목표 지점만 바라보고 죽어라 뛰던 머슴 돌쇠처럼

너무 곧고 순수한 우직함으로 그저 바쁘게 마구 뛰기만 해 댔던 것 같으이

어리석음이 섞여 있어 길을 벗어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으니 말이야"

오늘 내일 하며 중병을 앓고 있는 중환자라 믿기 어렵게 차분한 어조의

겉모습과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깔린

治善노인의 조급함은 잠시 숨을 돌리고 다음 말을 잇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급변 하던 격동의 대한제국시절과 깨지도록 몸을 부부딪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던 일제의 탄압 시절의 바람 속을 함께 뚫고 지나온

자네 부친과 나는 시대의 변혁을 이루고자 했던 시대의 동지쯤으로 보면 될께야

그때 러시아에서는 볼세비키당이 이끄는 레닌 주도하에 러시아혁명이 거센 파도처럼

시베리아 벌판을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폭풍으로 휩쓸어

철옹성 같던 대륙의 왕정 붕괴를 이루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던 독립이라는 희망의 촛불을 하나씩 켜기 시작했고

내 한 몸 촛농이 되어 녹아 내려도 좋다

민족을 위해서라면 내 한목숨 따위는 개의치 않을 확고한 신념으로

단단히 무장 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네

그 당시 공산주의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상이 아닌

체계의 모순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모두를 위하고 함께 공생하는

가장 이상적인 대중을 위하는 방편으로 젊은 우리들에게 다가 왔었지

대의를 위해서 左(좌)던 우(右)던 사상이란 작은 흐름쯤은 지류의 줄기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 앞에서 다 녹아들어 한 강물이 되어

독립과 건국이라는 바다로 나가리라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처음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한길로 뭉쳐졌던 힘의 물결이

점차 거세져 가던 좌우익 대립에 극심한 흑백논리로 갈라져 안타까울 때

게이오와 와세다를 나눠 다니던 자네 부친과 내가 만나게 된 건 몽양 때문 이였지
좌(左)의 뿌리를 두기는 했었지만 흑백의 극명성을 보완해 절충을 이뤄낸

여 운형 선생의 중도주의 노선은 우리에게는 한 줄기 빛이 였었지“

힘겹게 이어가던 과거의 회상은 기침으로 미뤄뒀던 목을 끓여오는 가래로

길이 막혀 더 이상 나오지 못하고 멈추어 지자

다시는 토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응어리진 恨(한)의 기억들은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튼 기침으로 길이 뚫어지지 않자 안간힘을 쓰다

결국은 시뻘건 핏덩어리를 입을 막은 수건에 쏟아내게 하며 몸부림을 쳐댔다

“그냥 두게!”

너무 놀라 간호원을 부르려 뛰쳐나가려던 나는

생명을 쥐어짜며 떨어진 치선 노인의 만류로 멈추어 서고 말았는데

왜 그랬는지 다는 알 수 없었지만 한 번의 응급조치 보다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최우선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 이였던 것 같다

입가에 남은 피 자국을 닦아내고 시작한 노인의 남은 이야기로 나는 보았다

왜 내 아버지가 고급 인적자원이 귀하던 시절에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일본 전집류 등의 번역 일만을 고집하며 칩거의 가까운 세월을 살다 가셨는지

간혹 숨기다 보여 지던 진한 한숨의 의미가 무엇 이였는지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모든 역사는 후인들의 개인감정이 배제된 냉철하고 객관적인 평가로

잘 잘못을 가려 정확한 기록으로 남겨지고 있는 듯하지만

시대와 시대를 지나는 당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순수한 열정이 담겨있는

진정성을 간과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아쉬움과 愚를 범하기도 한다는 걸 잊기도 하지

그런 측면에서 左도 右도 아닌 기회주의자로 몰려 테러의 희생당한 몽양이나

그를 따르던 추종인 들의 잃어버린 세월도 언젠가는 재평가를 받게 되겠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얽혀 二代를 거쳐 함께 끈이 매어져 있던 기연(奇緣)은

옛 일속으로 돌아가 묻혀있던 사연을 전하기 위해

治善 노인이 꽁꽁 졸라맸던 매듭을 느슨히 풀어헤치려는 기미가 보이자

억지 잠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던 과거 보따리에 묶여있던 기억들이

세월의 먼지를 털어내기도 전에 서로 앞서 나오려고 마구 비집고 튀어나와

治善 노인의 메마른 기침 소리를 앞세우고 죽자고 퍼 붓던 장마 비와 어울려

전해올 사연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없는 다져지지 못한 내 정신의 물고랑고랑을

가득가득 채우고 옆 뚝 마저 허물고 넘쳐갈 기세로 밀려오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기폭에 달고 世波(세파)를 떠돌던 나룻배가

이제 긴 항해를 끝내고 죽음의 부두에 정박 하려 한다

닻을 내리려는 그의 옆을 지키던 내게 그는 진정 무엇을 남겨주고 싶었을까?

나와 해인 이를 만나게 하기 위해?

아버지와 맺어졌던 인연의 끈 그 후인과의 해후를 위해?

아니면 정해준 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인간사의 가엾음을 비웃는 운명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인연 이라는 것이 내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 이었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유리창을 건너오려는 병원앞 가로등 불빛은 쉬지 않고 퍼붓는
비의 물결을 넘지 못하고 뿌연 빛만을 간신히 퍼 넘기며
비가 잦아들기만을 창틀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