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라고 하면, 말만 떠올려도 푸근하고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믿음 때문이 아닌가 싶다. “눈만 감으면 코 베 간다.”는 얘기를 들은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으니, 지금쯤은 코가 아니라 목이 달아나는 세상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제는 밖은 고사하고 사랑과 평화가 씨앗으로 잉태되어야 하는 가정에서조차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간에도 불신과 반목을 지나 죽이고 죽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인정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세상이 갈수록 험해져서인지, 믿음이 이토록 소중하고 따뜻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인자한 형님처럼 푸근하고 따뜻한 친구의 우정(友情)이 이토록 그리운 것은 순수한 생각에서라기보다는, 어둡고 쓸쓸해진 세상을 보게 된, 이 같은 외로움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나는 소위 둥글둥글한 성격이 못되다 보니 남들처럼 친구가 그리 많지는 않다. 더구나 인사기록카드나 신상명세 같은데 자신 있게 올릴만한 친구는 더욱 그렇다. 더구나 우리들에게 사표가 되고 있는 관포지교(管鮑之交)같은 우정은 입에 올리기조차 송구한 형편이고 보면 친구를 함부로 들먹일 주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나에게도 소중한 친구는 있다.

 휴일이 되면 등산도 함께해주고, 비 오는 날에는 바둑도 같이 두며, 꾸꿉할 땐 가족과 함께 나들이도 해준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같이 먹자고 불러도 주고, 서점에도 들러 책을 사서 나누기도 한다. 상추, 머위, 돌나물을 뜯었을 땐 손질까지 해서 갖다 주고, 기쁠 때나 울적할 땐 외식도 같이 하며 많은 얘기들을 나눈다. 아마도 내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아닌가도 싶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다정했던 사이가 서먹해져, 요즘은 만나는 것 자체가 거북해지고 말았다. 딱히 싸우거나 다툰 일도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이처럼 어정쩡하게 지내고 있는지가 벌써 몇 달이 되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미안하기만 했고, 바라는 것 하나 없는데도 그저 서운하기만 했다. 그래서 어쩌다 통화가 될 때에는 대화는 나누지만 감정이 말라있어, 마음은 보이지 않고 겉말만 오갈 뿐이다.

 처음엔 갑자기 밀려오는 외로움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도 나를 피하는 것 같았고, 모두가 한 통속이 되어 나만 소외시키는 것 같았다. 마치 세상에서 왕따가 된 그런 기분이었다.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힘들었고, 그래서 무기력해졌고, 저리도록 고독했다. 그야말로 헤어날 길 없이 홍역처럼 앓아야 했고, 바로 이럴 때 친구의 도움이 필요한데도 오직 혼자서 일체 유심 조(一切唯心造)만 되 뇌이며 이겨내야만 했다. 나에게는 왜 포숙아(鮑叔牙)나 한음 같은 친구가 없는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처음에는 친구인데 무슨 말을 못하랴 싶어 차일피일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멋쩍게 되었고 자신도 잃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받기만 했지 별로 준 것이 없었다는 생각에 친구의 처분만 기다리게 되었고,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래서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된 몸살을 앓듯이, 마음을 몹시 앓고 난 뒤에야 비로소 문제가 보이는 듯 했다. 바로 친구(親舊)에 대한 관계 인식이었다.

  우리들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다. 술친구, 바둑친구, 등산친구처럼 취미를 같이하는 생활친구도 있고,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戰友)들도 있다. 동문수학한 학우(學友)도 있고, 같이 자란 죽마고우(竹馬故友)도 있다. 하나같이 잊지 못할 벗들이요 보고 싶은 얼굴들이다.

 그러나 이런 우정들도 결국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소리 없이 씻기고 말지 않을까 싶다. 생활이 만들어 준 만남이기 때문이다. 생활이 만든 만남은 생활이 변할 때 따라 변하고 만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 자체가 생활이기 때문이다. 죽어도 변하지 않을 전우나, 같이 자란 죽마고우도 자주 만나지 못하면 잊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모두 다 인지상정이라 탓할 수도 없다. 술친구가 술을 끊으면 만날 기회가 없어져, 잊혀져 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관계도 있을 것 같다. 바로 마음의 친구들이다. 이들은 관중과 포숙아 나, 오성과 한음에 비교될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이 아닐까 싶다. 이들에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믿음이 주는 관계라고도 한다.

 믿음은 따뜻해서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고, 그것이 되돌아 믿음을 또 데워주기도 한다. 그래서 변함없는 마음의 친구를 만나면 마냥 행복해 진다. 무상(無常)한 세상 안에서 유상(有常)한 것을 찾는다는 게 될 법이나 할까 마는, 그래도 보다 긴 우정은 생활에서 보다는 사상(思想)으로 만나는 친구여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몸이 변화무쌍한 생활의 지배를 받는 쪽이라면, 정신은 쉬 변하지 않는 사상의 지배를 받는 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가려면 자꾸 만나 믿음을 쌓아가는 수밖에 없다. 흐르는 세월에 씻기지 않는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속담에도 멀리 있는 친척은 가까운 이웃보다 못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생각이 같은 친구가 자주 만날 수 있는 삶은 축복이라고 한다. 친구에게 들려줄 땐 신이 나고, 친구의 얘기를 들을 땐 행복하다. 더구나 대화가 그리운 세대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누군가가 인생살이는 “성(sex)”에서 “돈(money)”을 거쳐 “대화(talking)”로 흘러간다고 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넘치는 에너지 때문에 성이 전부였다면, 돈 쓸 일이 많은 중년에는 돈이 제일이라 했고, 노후에는 인정이 그리워 친구간의 대화가 생활의 중심이요, 삶의 전부라 했다. 참말이구나 싶었다. 지금은 성을 구가하던 청춘도 지났고, 돈에 탐착하던 중년도 지났다. 이제는 대화가 그립고, 말벗이 그리운 노후가 되어 있다. 무엇을 주저하고, 무엇을 망설였는가 싶었다. 어쩌다 이제 와서야, 하는 후회스런 생각에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정신적인 희노애락은 육신의 것과는 다르다고한다. 정신에서 생각이 우러난다면 같은 생각이 오랜 세월에 쌓일 때 믿음이 싹틀 수밖에 없다. 이때의 믿음은 계산이 아니라 신념이요, 사랑이다. 사랑은 주는 것을 본질로 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리워만했고 외로워만했지, 내가 나서서 줄 줄을 몰랐다. 

 몇 달째 계속된 고민이 이렇게 숙성되고 보니, 나도 내 친구에게 책선(責善)이나 보인(輔仁)은 하지 않느냐며, 먼저 다가서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책선이나 보인은 선(善)과 인(仁)을 권하는, 친구 간에 마땅히 나누는 덕목이라 해서이다.

 이렇게 좋은 명분을 두고서도 먼저 다가서지 못한 게 정말로 부끄러웠고, 후회스러웠다.

 먼저 주는 게 사랑이요, 먼저 다가서는 게 친구간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