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원주에 볼일이 있어 서둘러 집을 나서다가, 차에 연료마저 떨어져 급한 마음으로 주유소에 들린 적이 있었다. 바쁠수록 꼬이는 현상을 머피의 법칙이라 했던가? 이날도 밤늦게 영화를 보다가 늦잠 자는 바람에 약속시간에 촉박하게 일어나, 차를 몰고 집을 나서기까지 콩을 볶았는데, 막상 나서보니 연료마저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오늘따라 주유 시간은 왜 이리 긴지, 한참 만에 주유를 다한 여직원이 연료통 뚜껑을 닫으면서 47.000원이 나왔다고 한다. 조급한 마음으로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만원권 5장을 꺼내 주었더니 한참 만에 돌아온 여직원이 “손님이 주신 돈은 만원권 6장이었습니다.” 라면서 거스름돈과 만원권 한 장을 되 돌려주는 것이다. 어! 순간 감동 같은 묘한 기분이 일었다. 

 모르고 더 준 돈은 설사 돌려주지 않는다 해도 알 수 없는 일인데, 굳이 이를 되돌려 주다니 여간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더구나 요즘 젊은이들은 유흥비 때문에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세상이 되고 보니 감동이 더 진한 것 같았다. 아침부터 희귀한 문화재를 본 기분이었다.

 결국 그날은 일이 꼬여 가는 와중에 느닷없이 한 건강한 젊은이를 만나는 바람에 구겨가던 기분이 완전히 반전된 하루가 되기도 했다.

 약속시간에 닿지 못하는 초조함과 쓸데없이 늑장피운 자책감, 그리고 머피의 법칙으로 오는 짜증이 일시에 사라지고, 오히려 그날은 어쩐지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앞장을 섰다. 기분도 좋아지고 마음도 느긋해지니, 늦으면 늦는 데로 해도 되고, 이르면 이른 데로 해도 문제없을 것만 같았다. 서둘러도 하루가 24시간이요 서두르지 않아도 그 시간뿐인데 무엇이 그리 급할까 하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유까지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참으로 신기하기만 했다. 시야로 들어오는 사물의 색채가 갑자기 선명해지고, 온 세상 만물이 모두가 다 축복 속에 서로 어울려 있는 것만 같았다. 여유란 바로 이런 마음에서 생기는 것일까? 여유가 생기니 문제가 풀린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원주에 갔던 일은 늦게 도착했지만 만사형통이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늦은 것도 전혀 지장이 되지 못했고, 멀리서 왔다고 오히려 특별한 대우까지 받기만 했다. 늦은 것이 이렇게 좋을 때도 있구나 싶을 뿐이었다. 그저 신통하기만 했다.

 또 얼마 전에 신문에 난 오늘의 운세를 보고도 하루를 신나게 보낸 적도 생각났다. 그날도 “만사가 형통하니 망설이지 말고 행동하라” 라는 그 한마디 글귀에 나도 모르게 새벽부터 좋은 예감으로 기분을 띄우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뜻밖의 영감으로 마음에 드는 글도 한편 건지기도 했다. 뿐만이 아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귀한 분을 만나 아주 유익한 대화도 나누었고, 그날 꼭 해야 했던 일상의 일들도 하나같이 척척 풀려 모처럼 살맛나는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좋은 기분은 즐거운 하루를 만드는 시작이고, 즐겁게 보내는 하루가 자꾸 쌓여가기만 하면 인생이 또한 바뀔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진하게 다가왔다.

 도대체 기분이 무엇이길래, 꼬여가던 일들이 저절로 풀리기도 하고, 생각지도 않던 일들이 다 일어나면서 축복을 내리기도 할까? 인간의 숨어있는 능력은 예측할 수가 없다고 하더니 그야말로 상식 밖에서 자유자재 하고 있는 이 변화들은 참으로 신비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신비는 하루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아주 다르게 나타난다는 말이 참말이구나 했다. 이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무형의 힘이 사람의 마음을 타고 흐르기 때문이라고 해서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말을 건네기 전에도 활짝 웃는 얼굴이 되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기분 나쁜 사람을 만나면 인상에서부터 먼저 기분을 잡치고 만다. 있는 대로 전달되는 상대방의 기운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 먼저 거울 앞에 서서 익살스런 표정으로 웃기부터 하라는 것도 사실은 나보다 나를 대할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구나 했다. 웃음이 기분을 조정하고, 뜬 기분은 하루를 띄울 수밖에 없겠구나, 라고 이해되기도 했다.  

 세상사가 복잡하여 늘 기분에 따라 거볍게 살 수는 없지만 인생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지금 처해있는 순간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면, 기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와, 그 하루하루의 방향타가 되어주는 마음은 우리네 인생살이의 시작이고, 결과이며, 이유도 된다는 것이 정말로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그간 살면서 무심히 대해왔던 밝았던 표정들, 웃는 모습들이 이처럼 소중한 것인 줄 미처 몰랐고, 남의 기분은 생각지도 못한 체, 내 기분에만 갇혀 헤어나지 못한 옹졸한 내 이기심도 더욱 나를 부끄럽게 했다.       

 누군가의 하루를 위해 나도 늘 내 마음속에 좋은 기분을 채워놓아야겠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