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동료하나가 며칠 동안 보이지 않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삼베리본을 달고는 조금 초췌해진 얼굴로 인사를 왔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외롭게 자라났는데,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는 8순 노모마저 여의게 되었단다.

 누구나 겪는 과정이지만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고아신세가 되었다며,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어디 가서 뵈어야 할지, 마치 조실부모한 어린아이처럼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잡은 손을 놓지 못한다.

 요즘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호상(好喪)보다는 악상(惡喪)이 더 많아, 문상을 가보면 빈소 앞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젊은부인과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놀고 있는 어린 것들이 민망하여, 문상을 가서도 애도하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분향만 하고 묵묵히 돌아서고 말던 터라, 모처럼 보는 호상이기에 그저 가보지 못한 미안한 마음으로, 내가 가까운 사람의 안부를 소홀히 하

다가 이처럼 본의 아니게 예를 잃게 되었다고 가볍게 건넨 인사에,
"그까짓 것이야 무슨 문제이겠느냐, 잃은 예는 찾을 수가 있지만, 아주 가신 어머님은 어디 가서 찾느냐"며,
지금 생각하면 병석일지라도 계셔주시기만 하는 바람만 간절할 뿐이란다.

 병 구환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그래서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부모와 영원한 이별 뒤에 오는 적막한 슬픔과 위선으로 얼룩진 부모 공양이 후일 가슴을 도려내는 비수로 변하기 전에는 아무도 깨닫기 어려운 일이란 걸 비로소 알았단다.

 가벼운 마음으로 무심코 한 얘기가 무색해 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처럼 심각한 대화가 되리라고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어머니를 아주 떠나보낸 후에야 어머니는 자신의 전부였고 자신 또한 어머니의 전부였는데도, 그저 일반적인 모자관계로 지내온데 대하여 더욱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30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꽃다운 청춘을 어린 자식에게 던지기로 한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당시 불확실성의 인자로 던져진 자신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할수록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단다.

 정말이지 당시에는 식량이 절대 부족했던 전쟁 직후라, 그때 고아가 되었더라면 오늘 자신이 다니고 있는 이 좋은 직장과 사랑스런 아내, 그리고 토끼 같은 자식들 속에서 피어나는 이 행복은 과연 어디 가서 얻을 수 있었을 것이냐며, 자신은 어머니의 전부요, 어머니는 자신의 전부였는데도 남들처럼 상식선에서 맴돈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이제 와서는 가슴을 도려내는 비수가 되어 버렸다는 얘기다.

 물론 이러한 뒷얘기는 그때 자리를 옮겨 차 한 잔을 나누며 나눈 얘기였지만 부조하지 못한 실수로 같은 처지의 나 자신을 뜬금없이 그것도 제대로 반성해 보게 되었으니, 이런 실수는 그리 해로운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고마움이 인다.

 지금 나에게도 9순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계신다.

 내 어머니 역시 서른세 살에 나 혼자만을 낳고 그길로 혼자되어 당신의 타고난 미모와 정숙함으로 숱하게 들어오는 재혼자리 마다하고 갓 태어난 핏덩어리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분이시다. 본인이 선택한 이 자식이, 우량품인지 불량품인지 그런 건 안중에도 두지 않고, 오직 따뜻한 가슴으로만 생각하면서, 가시밭길도 결코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해방 전에 태어나 한국동란을 거쳐야 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남들처럼 큰 출세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대학물도 먹어 보았고, 건강한 몸으로 군에도 갔다 왔으며, 직장도 얻었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하여, 한때 잃어 버렸던 가정도 되찾아 놓았다.

 젊은 시절 위험천만한 선택으로 형극의 길을 걸어온 결과치고는 별로 자랑할 것은 못되나, 잘못될 경우를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어머니가 선택한 인생이요, 보람이기도 하며, 고통과 눈물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본의 아니게, 어머니의 청춘을 철저하게 갉아먹은 주범이 되고 말았다. 젊었을 때는 가시밭길 같은 험한 세상과 온 몸으로 부딪쳐야 했던 말 못할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고, 지금은 부서질 듯한 몸을 억지로 추슬러야 하는 육신의 고통까지 안겨주고 있는데도 이 고통하나 어떻게 해 드리지 못하고 그저 보고만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 희노애락이 담담하게 흐르는 평범한 인생이라고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도록 만들었다.

 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고생하여 키운 자식이, 아직도 당신의 고통을 젖혀두고 자식의 건강만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슴조이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그 자식은 이미 지천명하는 나이가 됐어도, 늘 안타까워하는 제 어미의 마음하나 헤아려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 드시라고 사다드린 사과를 “애비가 튼튼해야 한다.”며 떨리는 손으로 힘들게 깎아 내어놓는 것도 얼른 받아 맛있게 먹어주지도 못했고, 한밤 TV앞에 앉아있는 자식을 보고는 “밖에 나가 일 할 사람이 푹 자야 하는데.”라며 걱정할 때, 보던 TV도 선뜻 끄지 못했다.

 한술 더 떠, 오늘아침처럼 밥상머리에서 “애비가 한 술만 떠가면 남기지 않을 것 같다.”며 건너다보시던 그 어머니의 속마음을 읽어보기 전에 “많으시면 그냥 남기세요.” 라고 한 말이 결코 퉁명스럽지는 않았지만 강정 같은 감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청춘을 담보하고 형극의 길을 걷게 한 보답인가 싶어 가슴만 미어진다. 무엇보다 상식을 벗어나지 못한 자식의 도리가 더 가슴 아프다고 말을 잇지 못하던 그 친구의 모습에서, 어른 섬기는데 마음을 헤아리기 전에 먼저 물질로 포장하려했고, 사실보다는 남의 눈을 더 의식했던 자책감이 이렇게 아프고, 부끄러울 수가 없다.

 오, 하나님!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해도,  때로는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모자라기도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제 어리석음은 모르고, 어설프게 이성을 앞장세워, 매사에 합리성만 살피는 핏발선 인간보다는, 제발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인간이 되도록 이 몸을 지켜주소서!

 그리고 이 나이에도 고아가 되었다고 슬퍼하는 친구여!

이 나이에 부끄러운 독백이네만, 자네 덕분에 해묵은 내 어머니의 가슴앓이를 치료할 비약을 얻은 듯하니 정말 기쁘기 한이 없네.

 내, 이 약을 써보고 그 결과를 자네에게 모두 알려줄 것이네만, 모르기는 해도 아마 그때 내가 어머니의 두 손 잡고 흘릴 눈물 때문에, 그리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할 것 같으이.

  자네도 나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해 주리라 믿네.

 어쨌거나 정말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나를 깨우쳐주어 정말 고맙네. 정말로 고맙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