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서면 시장통의 모기원.
사무실에 앉아 있다, 아무래도 마음이 편칠 않아 손아래 동서가 자주 다니는 기원엘 들렀다.
전철역으로 두 구역밖에 되질 않아 자주 들리는 서면 시장통이지만 내가 자주 가곤 하던 기원은 아니었고, 증권회사곁에 있는 조그만 기원이었다.
최근 주식이 바닥을 치면서 엄청나게 손실을 많이 보았다며 낙담해하던 동서의 모습이 떠올라 위로라도 해주고 저녁이나 함께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동서에게는 묘한 고집이 있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은 그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수긍하지 않는 그런 고집이었다.
한번은 운문사로 처가에서 놀러를 갔었는데, 운문사 초입에서 동서와 무슨 이야기를 하다 사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동서가 칼퀴가 있는 놈이 암놈이라며 빡빡 우기는 바람에 서로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당시는 동서의 성격을 잘 몰라 얼토당토않는 고집에 끝까지 맞서다 그리되었는데, 아마 성격을 알았다면 그냥 웃으며 넘어갔을 그런 일이었다.

기원을 들어서자 예의 주식하는 사람들이 동서와 함께 몰려 경마를 하고 있었다.
동서가 실수를 해서 또 대마라도 죽인 것인지 예의 투덜거리는 말투로 좌중을 시껄벅쩍하게 하고 있었다.
이 기원은 예전 동서의 소개로 몇 번 들런 적이 있었다.
대개가 하급자들이 많고, 주로 시장 상인들인데다, 주식을 하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몰려 있는 특이한 기원이다보니 그 이후론 잘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제대로된 상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게다가 상인들이나 주식투자자들답게 내기액수도 상당히 커서 접바둑으로 몇 판을 두고나면 엄청 피곤한 탓도 있었다.
게다가 동서의 엉뚱한 행동이 자주 나오는 탓에 괜히 몇 번이나 곤란한 경우를 겪기도 했다.
어려운 사이는 아니어도 보고 있기엔 다소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동서는 나에게 넉점을 놓았다.
사실 승부바둑으로 치수조정이라도 한다면 대 여섯점 정도를 놓아야하는 그런 기력이었다.

역시 지금도 그들의 바둑판아래에 수북하게 돈이 깔린 것을 보니 경마액수는 예전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내가 다가서자 동서는 나를 보고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함께 경마할 것을 권해왔다.
바둑을 두려고 온 것이 아니기에 잠시 고민이 되었다.
넉점이하의 하수들이라 치수도 좀 그랬고, 내기바둑은 특히 그랬다.
나의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원장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 상대와의 대국을 주선했다.
헌데 원장의 대국주선을 보고 있던 동서가 내가 걱정이 된 모양인지 시비를 걸고 나왔다.
호선을 주문하는 원장에게 치수를 가지고 시비를 건 것이다.
내가 두 점을 놓아야한다는 말이었다.

동서와 내가 처가에서 바둑을 둘 때는 치수나 승패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친선이다보니 대충 두곤 하는데 동서는 그걸 모르고 나를 걱정한 것이다.
자기를 두점 접는 사람이 그에게 넉점을 놓으니 그럼 자기와는 여섯점 치수인데, 넉점치수인 내가 그와 호선으로 둔다면 불리하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괜찮다는데도 목에 핏대를 세우는 동서를 보니 뭐라고 말도 못하겠고 엉거주춤 그러고 있는데 예상외로 상대가 나에게 그럼 두점으로 둬 보자고 제의를 해 왔다.
우습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같은 동급끼리 두점을 놓는다고 판이 안짜이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근처기원에서 그래도 강자에 속하는 내가 두점을 놓기는 싫었고, 그래서 이긴다해도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동서는 자기 경마판엔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내가 두는 곳까지와서 두점을 놓는지 확인까지했다.
자기가 다니는 기원이니 손님인 내가 뭔가 피해나 보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것이다.
물론 억지로 호선으로 두자고하면 안될 일도 아니지만 동서의 성격을 잘 아는 나로선 그러기도 뭣했다.
내가 할 수없이 두점을 반상에 놓으니 이번엔 상대가 또 내기까지 주문하고 나왔다.
첩첩산중이었다.
그것도 삼칠장으로 가자는 거였다.
20집이하 삼, 21집부터는 칠, 41집부터는 장인 그런 내기였다.
이 기원의 기본단위이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액수라 그러잖아도 치수땜에 그런데, 맘이 편할 리가 없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상대는 첫점을 고목에 놓고 이미 반상을 둘러보고 있었다.
엎지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물론 자기 기력에 상당한 자신을 가진 것이겠지만 나로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했다.
나중에 사기바둑꾼이란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해서, 이기는 쪽이 다음 판엔 덤 7집씩을 양보하는 조건을 따로 걸었다.
물론 호선과 석점을 한계로 해서였지만, 승패에 따라 치수조정을 하자고 주문한 셈이었다.
물론 이 방식은 처음 두는 상대와 기원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기 형태였다.
그런데 상대를 배려한 이 주문을 상대는 오히려 그걸 내가 꼬리를 내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로선 큰 실수였다.

같은 기력끼리 두점바둑이지만 조금만 방심해도 두점의 위력은 금방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신중하게 두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상대는 나를 약체로 평가한 모양인지 초반부터 잘 알려진 속임수정석을 들고 나왔다.
고목에 소목으로 걸쳐간 나의 돌을 눈목자로 덮어씌우는 정석이었다.
이 정석은 상대가 응수치 않고 손을 빼 버리면 오히려 상대의 행마가 궁해지는 그런 정석이었다.
아니 제대로 응수해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기에 손을 빼는 것이 오히려 정수라고 고수들 사이에선 불문율로 되어있는 그런 정석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생각을 한 다음 상대의 기력을 시험도 해 볼 겸 밑으로 붙였고 상대의 주문을 한 번 따라가 보기로 했다.
대형 고목정석이 시작된 것이다.
한 수만 삐긋하면 망하고마는 그런 정석인데, 역시 상대는 중간에 수순을 비틀어버렸고 나의 정확한 응징에 속수무책 초반에 그는 그만 판을 망치고 말았다.

첫판을 20여집이나 진 상대는 어이가 없는지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내기에서 진 돈 칠을 내어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반에 유리한 판세라 생각한 내가 중반과 후반에 느슨한 행마를 하면서 그가 많이 따라붙었는데 그걸 그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유리하여 조금씩 양보한 것을 나의 기력으로 평가한 것인지 그래서 해 볼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당연 두 번째 판은 선에 덤 7집바둑이 되었다.
동서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내가 첫 판을 이겨서인지 아무런 말은 없었다.

결국 치수가 맞지않는 바둑에 상대를 잘 못 평가한 것까지 겹쳐 바둑이 금방 호선 바둑이 되어 버렸다.
연이어 패한 상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연달아 내기에서 패한 상대가 나에게는 화를 못 내고 동서와 치수에 대해 서로 욕설을 주고받더니 결국 치고받는 싸움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원장과 내가 말려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말리다 말리다 할 수 없이 당황해하는 원장에게 내기에서 딴 돈을 모두 주어버리고는 기원을 나왔다.
동서의 성격으로 봐서 갈 때까지 갈 것을 알았기에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도 없었고, 원장이 나를 보고 빨리 가는 게 낫겠다고 눈치를 주기에 그랬다.

저녁에 집에 와서 생각하니 정말 걱정이 되었다.
동서집으로 전화를 했다.
처제가 전화를 받았다.
동서 좀 바꿔 달라는 나의 말에 처제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 형부, 내 미치겠어요,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하여간 이사람,  지금 경찰서 유치장에 있답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