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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부생육기 9 | 문학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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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부생육기 9
글쓴이 윤실수   조회 127
아내는 내가 야구와 골프에  푹 빠져 가게 일을 소홀히 하는데 화가 치밀었을까?
어느날 밤 야구장에서 돌아오던 나는 차마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연숙이 자신의 차 안에서 어떤 사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장면을 목도했던 것이다..
사내는 내가 나타나자 자신의 차를 타고 줄행랑을 놓았기에 누구인가 정확히 알수는 없었지만 뒷 모습이 전 주방장 같았다.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연숙을 차에서 끌어내어 세차게 뺨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차게 후려쳤던지 연숙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 장면을 목격한 이웃의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를 하였는지 어디선가 출동한 경찰은
 내게 수갑을 채우더니 현행범으로 체포하여 경찰서 유치장에 쳐 넣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시절에도 운동권이 아니었기에 유치장 구경은 생전 처음이었다.
따라서 구금이 겁이 나기도 하였지만 참담한 심정이었다.
 나는 초범이었기에 변호사를 선임하면 석방될수 있었지만 일부러 선임하지 않았다.
그때의 격앙된 감정으론 스스로를 통제하기 어려워 석방되면 연숙에게 더 큰 일을 저지를것 같아서였다.
나는 호신용으로 총기를 구입해 놓았기에 더욱 위험천만이었다.
연숙 역시 내가 즉시 석방된다면 총격 같은 더 큰 화를 당할까봐 두려워 변호사 선임을 주저하고 있었다.
재판 결과 나는 가정폭력범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30일 구류형에 처해졌다.
나는 LA 북쪽 100킬로 미터 지점의 야산에 위치한 WAYSIDE HONOR RANCH 라는 팻말이 붙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한국이었다면 아내가 간통죄로 처벌을 받았을 터인데 아내는 무사하고 내가 구속이 되었으니 나 로선 적반하장격인 셈이었다..
나는 국민학교 2학년떄 반장으로서 청소 검사를 제대로 안했다는 이유로 담임에게 뺨을 세게 얻어 맞아 코피를 흘린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제껏 그런 정도의 폭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여자와 북어는 두드려 패야 말을 듣는다 "라고들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미국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고 유색인종이 다수인 구치소의 재소자들 역시 마찬가지 였다.
내가 수감된 구치소는 경범죄를 범한 잡범들이 수용되는 곳이기에 여러 유형의  재소자들이 있었다.
그 중엔  탐나는 물건을 훔치다 잡혀 들어온 소액 절도범들이 가장 많았다.
그런 절도범들 조차 나를 용서 받을수 없는 파렴치범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연약한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졸장부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내가 간통을 하여 그랬노라고 내가 변명을 하였더니 그렇다면 이혼을 하면 그만이지 왜 폭력을 휘두르냐는 것이었다.
한인 재소자들은 상습 음주운전자가 가장 많았고 나 처럼 가정폭력으로 수감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의 경우 처럼 아내를 때렸다는 죄목으로 수감된 한 한인재소자는 이렇게 항변하였다.
"박통도 화가 치밀땐 육여사에게 재떨이를 던졌다고 하지 않던가요? 아내에게 가벼운
손찌검을 했다고 모두 감옥에 보낸다면 아마도 한국 사람 절반은 전과자일 거예요!"
내가 수감생활을 했던 구치소는 RANCH 라는 이름에서 보듯  목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재소자에게 먹일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젖소를 기르고 착유도 하였다.
재소자들에게 적당한 사역은 건강에 좋을 뿐 아니라 시간도 잘 가 오히려 다행이었다.
미국의 구치소는 식사가 얼마나 좋던지 나 로선 놀랄 지경이었다.
대학시절 내가 묵었던 기숙사의 식사보다 훨씬 메뉴가 다양하고 양질이었다.
구치소는 도서관, 체육시설, 세탁장 교회당 등의 시설도 고루 갗추어 놓고 의사가 상주하며 진료를 하였다.
오죽하면 일부 홈리스들은 일부러 경범죄를 저지르고 재 수감될 정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살인 마약밀매등의 중범죄를 범한 죄수들이 수감되는 형무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형무소는 50년대의 미국 이긴 하지만 살벌하였다.
 그러나 내가 수감되었던 구치소가 그런대로 지낼만 하다고 나의 수감 생활이 마음 편할리는 없었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처럼 구치소의 시간은 멈춘듯 흘러가지 않고 정지된 느낌이었다.
나는 수감생활중 말썽을 피우지 않았기에 모범수로 감형을 받아 2주만에 석방될수 있었다.
연숙은 일식당 운영권을 남에게 팔아 넘기고 아이와 함께 어디론가 도피해 있었다..
나는 그떄 40대 중반으로 한창 일할 나이였지만 출소후  삶의 의욕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가정 폭력범은 출소후 매주 두 시간씩 6개월간 순화교육을 받아야만 했으니 죽을 맛이었다.
나는 다시 홈리스가 되어 LA의 한 기원에서 숙식을 하며 바둑이나 두는 신세가 되었다.
첫 아내와 사별한 직후처럼 나는 또 다시 생불여사의 처지로 전락한 것이었다.
그런 생활을 한지 일주일쯤 되었을까 뜻하지 않게 기원으로 연숙이 날 찾아왔다.
연숙은 내게 보복을 당할까봐 숨어지내다 맞아 죽을 각오로 용기를 내 날 찾아 왔노라고 하였다.  
 "우린 이제 다 끝났는데 왜 날 찾아왔지? 무엇하러?"
"하도 염치가 없어 용서는 바라진 않겠어요! 하지만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한번 만 더!"
 "아이가 내 자식인건 맞아? 당신은 양치기 소년처럼 통 믿을수가 없으니..."
나는 홧김에 함부로 잔인한 언사를 내 뱉고 말았지만 지나쳤기에 곧 후회하였다."
아내를 그렇게 몰아 부칠 만큼 나 자신 역시 그리 당당할건 없었다.
연숙은 요지부동으로 길길이 뛰던 나의 태도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곤 되돌아갔다.
그날 밤을 뜬눈으로 밝힌 나는 연숙이 내게 남겨놓은 쪽지에 적힌 주소로 처자가 은거하고 있던 곳을 찾아갔다.
외도를 한 아내를 용서한다는게 자존심이 상하였지만 짧은 인생살이에 자존심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부부관계 라는게 사소한 잘못으로 이별을 하기엔 너무도 후유증이 컸다.
간통은  이혼사유일 만큼 중대한 일탈이지만 그렇다고 용서 못할 죄는 아닌것이다.
이혼으로 자녀들까지 잘못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온 나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참기로 하였다
한번 익힌 기술은 언제던지 요긴하게 써 먹기 마련이다...
2차 대전때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폐허가 된 독일과 일본이 재기할수 있었던 것은 전쟁 준비로 축적된 기술력 덕분이었다.
나와 아내는 일식집 경영의 노하우가 있었기에 둘이 힘을 합친다면 다시 일어날수 있었다.
"우리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자!"
"아니 미국을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이 왜죠?"
"우리도 이제 미국에 살만큼 살았어! 마누라에게 손하나 까딱 할수없는 미국이 이젠 싫어졌다구!" 
내가 그때 미국을 떠나려고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연숙에게 그렇게  둘러 댈수 밖에 없었다.
십여년전 빈손으로 미국땅을 밟았던 나는 다시 빈손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나마 소득이 있었다면 철부지 아내와 똘똘한 아들을 하나 얻은 것 뿐이었다.
일식집을 운영하며 틈틈이 골프를 배워 놓은 것도 그나마 다행이긴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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