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새벽 -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에서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디 오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薄明 비겨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첫‘이라는 말, 정갈한 절망이라는 말, 눈뜬 슬픔, 첫새벽에 바친다는 정갈한 절망, 슬픔에 바친다는 생생한 혈관, 그 고동 소리... 그리고 박명(薄命)을 연상하게 하는 박명(薄明)...‘서시’에서 시인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이란 말을 한다. 당신은 운명이다. 운명을 오래 바라볼 거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순응도 저항도 아닌 관조(觀照)가 아닐지? 시집에 마지막으로 실린 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