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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초 국수(國手)와 내기
노사초 국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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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의 이름을 내세워 대회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리고자 함이다. 한갓 내기바둑에만 빠져 집안을 내팽개친 바둑꾼에 지나지 않다면 함양군에서, 함양군바둑협회에서 16년째 물심양면 지극정성으로 대회를 열 이유가 있을까. 나라를 잃어버린 후 바둑이 일본사람들에게 뒤떨어지게 된 원인을 들어 “특수층이나 남자들만의 독점 오락으로 여기는 인습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나라 바둑은 그 질과 양을 탈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당대에, 일찍이 신랄하게 규탄한 이가 노사초 국수였다. 우리는 그가 "한갓 내기바둑으로 유랑이나 하며 가산을 탕진한 순장바둑의 대가"라는 따위의, 흥미거리 일화에 함몰돼 그 이상의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닌지. 대회에 참가하면서도 노사초 국수의 바둑인생에 대해 미처 잘 모르는, 몰랐던 이들을 위해 71년 월간바둑 1월호에 유상로 님이 쓴 [바둑야화] 전문을 소개한다. 요즘 맞춤법에 맞지 않는 표현과 일부 문장을 이해하기 쉽도록 조금 손을 보았다. - 편집자 註. ○● 노사초 국수에 대한 오해와 이해 ☜ 관련기사 먼저 보기 클릭 ![]() 노사초 국수(國手)와 내기 노사초(盧史楚)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874년, 경상도 함양 땅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참판(參判)을 지냈고 아버지는 교리(校理 조선시대에 집현전, 홍문관, 교서관, 승문원 따위에 속하여 문한文翰의 일을 맡아보던 문관 벼슬. 정오품 또는 종오품이었다)를 지낸 명문 출신이다. 거기다가 800석이란 거부를 겸했으니, 부귀와 권세가 쩡쩡 울리던 가문에서 노사초 선생 자신도 25세가 되던 해엔 진사(進士 조선시대에, 과거의 예비시험인 소과小科의 복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준 칭호. 또는 그런 사람)에 급제한, 필역도 좋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난 분이었다. 진사가 된 후 문중에서 벼슬을 권했으나 “인생이란 짧은 것인데 어찌 탐욕과 세도를 부리며 살 것이냐”며 굳이 반대했다. 바둑은 20세 때이니까 늦게 배운 셈이다. 노선생이 서울 와서 처음 백남규 국수에게 여섯 점을 놓고 두기 시작한 것이, 그의 나이 30이 채 못되어 맞두게 되었다니 재주가 비상한 분이다. 그때 서울 조동휘 대감 댁에는 긴 담뱃대를 들고 찾아드는 장안 기객(棋客)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부호들이 전주(錢主)가 되어 이들 기객의 뒤를 밀어주지 않으면 대국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다. 기우(棋友)로는 당시 영남을 무대로 활약하던 소위 영남파 바둑3왕으로 실력이 거의 비등한 윤경문과 채극문이 있었는데 이들의 서울원정 비용은 언제나 노사초 국수가 도맡았다. 이런 친구들과의 정담이나 시흥(詩興) 끝에는 으레 자신은 마실 줄도 모르는 주연을 베풀어 주었으며, 때론 구차스럽게 보이는 가난한 바둑친구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한복차림에 큰 갓을 쓰고 나서면 그 늠름한 풍채와 군자다운 인품이 장안 선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바둑의 여명기라고도 할 수 있는 당시에 기도보급과 이의 대중화를 위해 바둑에다가 재산을 거의 다 내어놓다시피 하였다니 우리 기단(棋壇)의 큰 공로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노사초 국수가 가는 곳마다 기객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기력이 두 점 차이만 되어도 잘 두어주지 않던 때이지만 노국수만은 “노진사님! 반갑습니다. 한수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청하면 상대의 수가 높건 낮건 나이가 늙었건 어리건 신분이 천하건 귀하건 간에 치수는 따지지 않고 수를 맞추어 기분 좋게 두어 주었다. 나라를 잃어버린 후 바둑이 일본사람들에게 뒤떨어지게 된 원인을 들어 “특수층이나 남자들만의 독점 오락으로 여기는 인습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나라 바둑은 그 질과 양을 탈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신랄한 규탄을 가하기도 했다. ![]() ▲ 35세 때의 얼굴이다. 한일병탄 무렵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제공/한국기원)
"일본에 가더라도 프로3단 실력은 충분하다!" 그가 평생을 한결같이 바둑을 좋아하기에 옆에서 관전하던 후배기사 유진하 국수가 “노국수님이 만약 이승을 떠나시게 되면 바둑을 두고 싶어 어쩌시렵니까?” 하고 한마디 건네자, “그 무슨 소린고? 천국에는 기선(棋仙)이 있는 곳인데 어찌 그런 걱정을 하는가…” 하며 “먼 훗날 기우들이 나를 묻거든, 진실로 한세상에 바둑 좋아하는 사람이러니(固一世之善棋더니) 이제는 어디 있는가(而今安在哉야)?”라고 말해주기를 덧붙였다. 사초는 대국 중에 곧잘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固一世之善棋 而今安在哉’라는 말을 흥얼거렸다. 그래서 1945년 봄 노국수가 별세했을 때 유진하 국수는 그 구절을 만장(輓章)으로 크게 써서 상여 뒤에 걸었다고 한다. 해방되기 바로 전해였다. 기타니(木谷 實) 선생이 인솔한 만주 위문단 일행이 일본으로 귀국하는 길에 서울에 들렀다. 이때 일본기원 소속기사 혼다 가즈코(本田壽子) 초단과의 역사적인 대국을 두었는데, 이미 노쇠한 노국수가 집백(執白)으로 불리한 국세를 종반에 들어가면서 뒤집어엎어 놓은 일이 있었다. 이는 그의 바둑이 얼마나 날카롭고도 무서운 바둑이라는 것을 유구한 세속에 증명해 주리라. 사람들은 “노국수 바둑은 일본에 가더라도 3단 실력이 충분하다‘고 칭송했다. (편집자 주: 필자는 원문에서 노사초 국수와 대국한 일본 여성기사를 혼다 사치코(本田幸子) 초단이라고 썼는데 착각한 듯하다. 이후 78년 권경언 6단이 쓴 글에서는 혼다 가즈코(本田壽子)로 명기하고 있다. 글이란 한번 활자화되면 영원한 기록으로 남을 염려가 있기에 일본기원의 자료를 뒤져보니 정황상 42년에 입단한 혼다 가즈코(本田壽子)가 맞기에 바로잡았다. 혼다 사치코(本田幸子)는 47년 입단했다. 참고로, 금년 98세가 된 혼다 가즈코(本田壽子)는 결혼한 뒤 남편 성을 따라 스기우치 가즈코(杉內壽子)로 개명했다. 8단으로 지금도 예선대국에 꼬박꼬박 나와 뛰고 있는 현역 최고령기사라니, 노사초 국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보다 세 살 아래 동생이 혼다 사치코(本田幸子) 8단이고 열두 살 아래가 구스노키 데루코(楠光子) 8단으로서 일본 바둑계에서 세 자매 기사로 유명한 바둑가족이다.) 항간에 노사초 국수를 일컬어 “이 바둑은 노국수가 와도 안된다”느니 “쌍립도 끊을 수 있는 바둑이라”느니 “열세 번 젖혔다”느니 하는 말들은 아직도 그를 두고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말들이다.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두고 천수를 다하는 날까지 무려 20여년간 우리 기단의 정상을 풍미하던 그는 별세한 후 서울 안정사(安靜寺)에서 국수로는 처음으로 기우들의 추도를 받았다. 노국수의 국상(局上) 생애는 한결같이 바둑판을 싸움터로 만들어 치열한 불꽃을 튀기면서도 언제나 승부를 초월한 경지에서 바둑과 함께 인생을 즐기신 분이다. 조선의 호걸남아 바둑에 감복한 일본의 기객 그 한 예로 한번은 전라도 광주에서 당시 광주읍장(지금은 시장이지만)으로 있던 후구모토(福本) 초단이라는 일본 기객과 겨루던 장면을 여기 펼쳐보면-. 처음엔 귀에서 변으로 서서히 두어가던 돌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웬일인지 눈에 불을 켜면서 가는 곳마다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차츰 그 싸움의 불꽃이 중원으로 번지기 시작하더니 무서운 도살전이 벌어지면서 생사를 가리기 어려운 일대 혼전을 빚어놓았다. 바로 그때다. 후쿠모토가 중앙에서 백을 끊자고 위협했을 때 노국수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천천히 돌을 들어 변두리에 죽은 척하고 있던 백이 일선으로 빨딱 내려서며 한수 수를 늘여놓고는 다시 중원으로 돌아와 두서너 번 먹여쳐 회돌이를 친 후 중앙 흑말의 급소를 찔러버렸다. 이렇게 되고 보니 흑은 중원 요석에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이 영향은, 그 변두리에서 서로 토막토막 끊어져 얽히고설켜 있는 빅 상태의 말들이 전부 자연사로 돌변하는 무서운 결말로 이어졌다. 무제한 방내기였으니까, 이렇게 되면 이 한판 승부가 지금(71년) 돈으로 약 20만원에 가까운 큰 승부로 변하게 되었다. 초조와 불안과 공포에 쌓여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후쿠모토가 바둑판 위에 90도로 허리를 구부리고 아무리 반상을 파헤쳐보아도 살아있는 흑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바둑돌을 쥐고 있는 후쿠모토의 손은 덜덜덜 떨고 있고 그의 이마에선 땀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이때 불쑥 노국수의 입에서 절단을 노린 흑이 완착이라면서 다시 두라는 말이 떨어졌다. 엄숙한 순간이었다. 후쿠모토는 양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조선에 와서 선생과 같은 대범한 호걸남아와 대국을 가졌다는 것은 내 당대의 자랑이라”고 하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 노사초 고택이 있는 '개평마을' 돌담길 걸어보아요~ ☜ 바둑이 아니어도 하루 묵어 좋을 힐링마을.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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