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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진 천원(天元)의 빛. 청산(靑山)의 발자취 下
스러진 천원(天元)의 빛. 청산(靑山)의 발자취 下
김인 국수, 향년 78세로 별세
[궂긴소식] 박주성  2021-04-04 오후 03:45   [프린트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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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별이 졌다. 361로에 영원히 청산으로 우뚝 계실 분이다.


청산(靑山)의 발자취 上편에 이어서.....

관련기사 ○● 김인 국수 별세. 청산(靑山)의 발자취 上 (☞클릭!)

'영원한 국수 김인, 관철동 사람들은 그를 변치 않는 청산(靑山)이라고 부른다.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에 제모습을 드러내는 푸른 산···.'- 박치문('관철동 시대'에서)

그 어떤 지표도 찾을 길 없는 사막의 밤길이나 혹은 망망대해에서 밤하늘의 북극성이 길을 걷는 이들에게 나침반이듯 거기 청산이 묵묵히 버티고 서 있어 주는 것만으로 후학들에겐 더없는 자랑이자 위안이다. 밤이 깊어 어둠이 짙을수록 저홀로 드높게 빛나는 별처럼. 반상의 천원(天元)처럼.- 정용진( '김인국수배 10주년 특집기사: 청산(靑山)이 있어 기쁜 우리 '에서)

천원의 별빛이 스러졌다. 육신이 노쇠해진 후에도 그의 마음은 늘 청년과 같았다. 누구나 기꺼이 ‘청산(靑山)’이라 불렀다.

국수산맥을 잇는 당당한 봉우리다. 누구나 스스럼없이 ‘영원한 국수’라 칭송했다. 바다처럼, 바위처럼, 푸른 산처럼, 북극성처럼.... 70년 넘은 평생을 기단의 거목으로 한국바둑계를 지켰다.

노년의 김인은 “66년 국수 타이틀을 딴 후 10여 년이 내 전성기였다”며 “하지만 돌아보면 그때 좀 더 치열하게 정진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편하게 안주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진정한 고수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라고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인은 결벽처럼 악착스러운 승부를 싫어했고 과정이 멋진 승부를 선호했다. 그는 엄밀히 말할 때 허구를 좇는 병법가였고, 비정한 승부를 외면한 로맨티스트였으며,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한 ‘장이’었다. 이런 스타일의 김인이 정상에 올라 더 이상의 목표를 찾지 못하게 되자 술과 더불어 인생을 흠뻑 적시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그의 시대는 조훈현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저물게 된다. -안성문(월간바둑: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에서)

▲ 조남철과 김인. 일인자가 되기까지 66년부터 치열한 대관식을 거쳐야했다. 71년에는 국수, 명인, 왕위, 패왕까지 도전 20번기를 벌이기도 했다. 국수전은 이후 15기까지 6연패를 달성한다. 6연패 때 김인의 상대도 역시 조남철이었다.


김인에겐 국수전 6연패 당시가 최고 절정기였다. 제15기 국수전 도전자가 다시 조남철이었다. 제4국까지 일진일퇴를 거둬 도전 5번기는 2-2 스코어. 마지막 최종국까지 몰린 치열한 승부는 둘이 겨룬 도전기에선 처음있는 일이었다.

특히 5국도 반집으로 승부가 난 박빙의 대국이었다. 두 국수 모두 노을의 마지막 실오라기까지 전부 태웠다.

최종국은 71년 2월 16일 운당여관 특별대국실에서 벌어졌다. 4국까지 흑번필승이 이어졌다. 아직 덤4집 반이었던 시절이다. 1국과 5국에서 반집승부가 나왔다. 당시 나이가 28세와 48세. 젊은 사자와 늙은 호랑이의 격돌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관전기에선 최종국 계가 장면 에피소드를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최종 결승국은 장장 10시간의 혈투 끝에 끝났다. 그런데 바둑은 끝났는데도 김국수나 조9단은 계가를 하러 들지 않는다. 마치 뚜껑을 열기가 벅차기라도 한듯 어느 쪽도 얼핏 손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 참다못해 누군가 '계가를 해보시지'했지만 그래도 두 기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B 4단이 옆에서 "백이 한집반을 이겼지요"했고, 동석했던 K4단도 "반집아닌가"하며 동조했다.

어느쪽도 이긴것은 백이지 흑이 아니라는 단언이었다. 전문가가 계가를 잘못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일이라 이것도 국후에 화젯거리가 됐지만, 여러 관전자의 권유에 따라 계가를 해본 결과는 의심할 여지 없이 흑이 반면으로 5호를 남기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입에서 이때야 비로소 탄성이 새어 나왔다.'





▲제15기 국수전 도전5번기 최종국.
●김인 7단 ○조남철 8단. 244수 흑0.5집승.


50년 전, 70년대 초 국내 4대 기전은 국수, 명인, 왕위 패왕이었다. 김인은 당시 대부분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었다. 71년만 해도 조남철과 20번기를 벌였다. 차츰 하찬석, 노영하와 같은 푸른 새싹들이 도전기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72년 김인은 제6기 왕위전에서 노영하 3단을 물리치고 왕위전 6연패했다. 보통 4대기전 도전기는 운당여관 특실에서 벌어졌다. 후배들과 각축전을 벌이다 조훈현이 나타나자 김인은 바로 정상에서 하산을 준비했다.

“김인 八단과 조훈현 七단. 두 사람이 대국할 때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조 七단과 서봉수 五단의 대국 분위기와는 전혀 이질적이었다. 그것은 따뜻함이었다. 상대방이 잘 두면 잘 둘수록 뭔지 고맙고 든든한 그런 관계, 승부 자체보다 더욱더 커다란 신뢰의 안개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노승일(월간바둑 관전기에서)


▲ 조훈현이 도전자로 나서 화제가 됐던 74년 제14기 최고위전 도전기. 김인 七단이 0-3으로 패퇴하며 최고위를 조훈현에게 넘겼다.


이후 김인은 “그깟 타이틀 하나 내주었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라고 믿었다. 곧 도로 찾아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게 아니더군.”라는 감회를 남겼다.

▲ 김인과 조훈현. 1975년 5월 8일 열린 15기 최고위전 도전1국.

▲ 설악산 마등령 정상에서 김인과 조훈현. 북한산과 설악산은 특히 두 사람이 좋아하던 곳이었다.



■ 바둑과 평생. 술과 함께 스러진 천원의 빛

가다 보니 불룩한 술독에 독한 술을 빚는구나.
조롱박꽃 모양의 누룩이 매워 (나를) 붙잡으니 어찌하리요.
- 청산별곡(靑山別曲) 중에서

그의 반듯한 얼굴은 늘 과묵하고도 단정했다. 바둑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묵중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자였다. 바둑이 지닌 도(道)를 지킨 청산(靑山)이었다.

한국바둑,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다. 그의 전성시대에도 김인은 "바둑 승부는 비정하고 가혹해졌다고 한다. 술을 마시고 시와 철학을 논하는 일은 기사에게 해가 될 뿐이라고 한다. 이런 말이 나오는 건 바둑에 본질을 모르는 탓이다.

기계처럼 단련하고 세상사를 잊어버린 채 승리만을 추구하고 이기는 게 바둑이라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나. 바둑 기술자와 바둑 고수는 다르다."라고 일갈했다. 그의 시대가 짧았던 이유도 이런 담백한 승부관에 기인한다. 중요한 도전기에서도 8~90수 무렵에 둘 맛이 안 나면 미련 없이 돌을 거뒀다.


▲ 김인 9단.


술과 바둑은 평생의 지기였다. 2000년대 초반 위암 수술을 받았다. 위의 상당 부분을 절개했지만, 이후에도 다시 술은 즐겼다.

시니어리그는 바로 작년까지 늘 검토실을 지켰다. 건강악화로 이미 몸이 버티지 못했지만, 손사래를 치며 "무슨 소리야. 우리가 술은 해야지. "라며 시니어리그가 끝나면 반주할 자리부터 찾았다.

평소 과묵한 그도 술이 들어가면 어릴 적 일본 유학시절부터 시작해 좀처럼 듣기 어려운 자신의 얘기를 술술 풀어낸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고고한 선비의 고담준론을 대하는 듯 품위마저 느껴진다. 주변에 문인, 시인, 기자, 학생, 기인재사(奇人才士) 등이 넘쳐났던 이유다.

특히 타이틀 최종국을 둘 땐 기사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끝난 다음에 술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1년에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금의 반 이상을 술자리에서 풀었다. 동료가 안 보이면 “아무개 어디 갔나?”하고 찾았다. 그러기에 너나없이 곁으로 몰려들었다.

관철동의 ‘찌개집’은 그가 자주 간 술집 겸 식당이다. 비가 오면 천장이 새는 함석지붕에 간판도 없는 허름한 집이었다. 그냥 아무 찌개나 시켜도 잘 끓여준다고 해서 그렇게 통했다. 관철동의 디오게네스 민병산 선생이나 자칭 7류 소설가 강홍규, 환속 승려 김성동 등이 으레 거기서 저녁때면 모였다. 김인은 밤늦게 대국이 끝나면 그곳에 가 계산부터 한 다음 자리에 합류했다.

가끔은 까만 얼굴의 천상병이 비척거리며 나타나 “천원!”하며 손을 벌렸다. 두 손바닥 밖에 가진 게 없는 천상병이었지만 나름대로 원칙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겐 오백원이었지만 김인만은 특별히(?) 천원이었다. 하루는 김인이 “나도 이제 국수이니 2천원을 주겠다.”고 말했다. 천상병의 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김인아, 너는 아직 천원짜리야!”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둘이 크게 박장대소를 했다고 전해진다.
-안성문(월간바둑: 영원한 국수로 남은 낭만시대의 거인에서 )


▲ 생전 바둑 공부에 몰두하는 모습.


1943년 11월 23일 나셨다. 1958년 10월 입단했다. 프로기사 생활만 60년이 넘었다. 1983년 4월 6일 '9단'이 되었다. 그의 나이 40세. 조훈현 9단에 이은 2호였다. 승단에 무심했던 탓이다.

노년에는 “사실 승부사를 떠나면 프로기사직을 은퇴하는 게 맞다고 본다. 하지만 바둑계와 연이 점점 끊어지는 게 싫었다. 언제까지나 바둑 동네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라는 심정을 토로했었다.

"자네 이름이 무언가?"

매년 연말 사이버오로를 찾아오신 자리에서 소주잔을 앞에 두면 항상 같은 어조로 물으셨다. 멋쩍은 답변을 들은 후엔 늘 소년과 같이 해맑게 웃으셨다.

이제 육신의 짐을 벗고, 다시 자유를 찾으신 국수의 웃음을 영원히 기억하겠다. 영전(靈前)에 올리는 술은 한없이, 한없이 드시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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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 9단 약력

- 1943년 11월 23일 전남 강진 출생
- 1958년 입단
- 1962년 도일(渡日)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문하생(63년 귀국)
- 1966년 제10기 국수전 우승 후 15기까지 6연패
- 1966년 제1기 왕위전 우승 후 7연패(통산 8회 우승)
- 1966년 제6기 패왕전 우승 후 7연패 등 통산 30회 우승, 22회 준우승
- 1971년∼1975년 제5∼8대 기사회장
- 1983년 9단 승단
- 2004년∼2021년 한국기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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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정신 |  2021-04-05 오전 1:22:00  [동감0]    
김인이라 한다.
윤실수 |  2021-04-04 오후 6:05:00  [동감3]    
상금의 절반을 술값에 쓰셨다? 상금의 5% 를 기사회비로 내기를 거부한 모 기사와는 정말 대조적이었군!
당항포 세도리가 제정신 아닙니다,,, 선거 운동을 하다니...  
7830fafo 그런 이를 선거유세판에 얼쩡거리도록 놔둔 선대본부의 실수를 나무라지 않을 수없습니다.. 그런 이가 아니더라도 깨시민들은 알아서 시장될 분을 선택하지 절대 비리로 점철된 오염덩어리를 시장으로 뽑아주진 않을 것입니다.. 그 자의 불쾌한 이름이 시장 후보의 이미지에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워지도록 만든 선대본부 관련자는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 분명하지요.  
tjddyd09 고마 해라, 이놈덜아, 니들은 얼마나 깨끗하냐 ?? 꼭 똥 묻은것들이 겨묻은개 나무란다더니,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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