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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도 돕는 승부사' 조훈현!
삼성화재배 추억의 명승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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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바둑에서 최고의 천재를 딱 한 명만 꼽으라면, 기자는 주저 없이 조훈현 9단을 꼽는다. 1952년생인 그가 1회 응씨배를 우승하며 전국을 온통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을 때가 우리나이 38세. 세계대회에서 마지막으로 우승(2002년 삼성화재배)할 때가 51세였다(한국기원이 발행하는 바둑연감에는 만48세로 돼 있으나 이는 출생신고 연도인 1953년생에 따른 기록이다). 한해 전인 50세에는 6회 삼성화재배와 14회 후지쯔배, 속기대회인 13회 TV아시아바둑선수권까지 석권했다. ‘바둑은 마흔 살부터’란 말이 공공연히 받아들여지던 때가 결코 먼 옛날얘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조훈현 9단이 2001~2002년 연속 삼성화재배를 호령하며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할 때 그의 라이벌 고바야시 고이치나 녜웨이핑 9단은 어디로 갔는가? 이미 한 세대 전 인물로 취급받는 이들을 들먹일 것까지 없다. ‘해가 지지 않는 왕국’을 구축했던 이창호 9단은 지금 어떠한가. 불과 우리나이 39세인데 말이다. 스승은 그 나이에 세계를 제패하며 펄펄 날았다. 그렇다. 모차르트 시대의 연주기교와 음악 깊이를 지금 시대와 비교할 순 없다. 조훈현시대와 달리 이창호-이세돌 시대를 거치면서 프로기사의 최절정 나이는 10대 후반~20대 초반으로 내려왔고 30년쯤 뒤에는 초등학생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될지 누가 알랴. 바둑수법에 대한 발전이 그만큼 광속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시대환경과 개인차에 따라 전성기를 구가하는 연령대가 다른 것이야 당연하고도 비교불가한 것이겠지만, 이 모두를 헤아린다 해도, 조훈현이란 사람은, 확실히 대단하다. 불세출(不世出)의 기사란, 바로 그를 두고 써야 하는 말이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란 말이 있다. 지금껏 보아온 조훈현 9단은 ‘반드시 이겨야할 이 한 판’에선 기필코 이겼다. 녜웨이핑 9단과의 응씨배에서 1-2로 막판에 몰린 상황에서 맞은 결승4국도 참으로 힘들었던 판을 믿기 어려운 정신력으로 건지며 기사회생했고, 창하오 9단과 벌였던 6회 삼성화재배 결승3번기에서도 0-2로 끝났다 싶은 순간 무시무시한 순발력으로 묘착을 던져 반집승을 끌어내더니 기어이 승부를 2-1로 뒤집어버리는 독기를 보였다. 반드시 이겨야할 때 이겼으니 조9단은 진정 강한 자이다. 오늘 소개할,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가까스로 반집 차로 대역전승을 이뤄낸 뤄시허 9단과의 바둑은, 이건 뭐 할말을 잃을 정도다. 상대가 공배에 자기 집까지 메워주면서 자멸했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귀신도 돕는 승부사’란 말이 나왔을까. 이쯤되면 운이 아니랄 수도 없겠는데, 가만 보면 유독 강한 자에게 더 따라붙는 게 운이다. 그래서 운도 실력이란 말이 나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조훈현 9단은 운까지 따라준 희대의 승부사였다. 이게 바로 ‘강자의 프리미엄’일 것이다.  ▲ 제6회 삼성화재배에서는 창하오 9단에게 기적 같은 2-1 역전승을 거두면서 대회 첫 우승을 기록했다.  삼성화재배 최고의 역전극 1988년 세계대회가 생긴 이후 조훈현 9단은 제자 이창호와 더불어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바둑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조9단은 6회(2001년)와 7회 2년 연속 삼성화재배를 제패했는데, 이것이 세계무대에서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6회 결승3번기에서는 준결승에서 이창호 9단을 꺾고 “이창호를 꺾은 것은 우승보다 값지다.”며 감격해 하던 창하오 9단에게 ‘필사적인 승부’가 뭔지를 일깨우며 또한번의 ‘좌절’을 안겼고, 7회 결승3번기 때는 왕레이 8단(당시)을 상대로 ‘전신(戰神)의 진면목’을 보여주며 2-0으로 돌려세웠다. 그런데 7회 때의 백미는 왕레이와의 결승전이 아니라 뤄시허 9단과의 8강전이었다. 뤄시허(羅洗河), 1977년 생이니 이창호 9단보다 두 살 어리다. 2002년 당시 중국랭킹 8위였지만 일찍이 IQ 168의 신동 소리를 들으며 중국바둑계의 기대를 잔뜩 받던 바둑천재였다. ‘소저(小猪)’, ‘작은 꽃돼지’란 별명과는 달리 번개마냥 빠르고 솜털처럼 부드러운 속기가 일품이다. 작달막하고 통통한 외형도 그렇거니와 초속기 솜씨가 ‘반상의 손오공’으로 불리는 서능욱 9단과 흡사한데, 낙관적이고 경솔한 손버릇(?)까지도 빼다박았다. 최정상급의 대결에선 이러한 단점(경솔)이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 뤄시허 9단은 이를 극복하고 2006년 제10회 삼성화재배에서 이창호 9단을 2-1로 물리치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저(飛猪)’로 거듭난다. 이때까지 마샤오춘도 창하오도 이기지 못했던 ‘석불(石佛)’을 ‘저팔계(꽃돼지)’가 눌렀다는 점, 삼성화재배 10년 만에 비로소 중국에 첫 우승컵을 안긴 기사라는 점을 상기하면 그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잘나가던 한국바둑이 올해 들어 LG배와 몽백합배에서 연거푸 8강에조차 들지 못하는 부진을 보여 충격을 던져주었지만, 10여년전 승승장구할 때도 한명 혹은 두명이 간당간당 8강에 올라가 나홀로 우승을 일군 적도 여러번 있다. 7회 삼성화재배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02년 10월16일 울산 현대호텔에서 벌어진 8강전에 진출한 한국선수는 조훈현 9단과 최명훈 8단(당시) 두명뿐이고 나머지 여섯 자리는 모두 중국기사였다. 이마저도 16일 8강 첫날 대국에서 최명훈 8단이 왕레이 8단에게 지는 바람에 조훈현 9단은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17일 8강 이틀째 대국에서 마주한 상대가 뤄시허 9단. “이거 부담되는데…. 나마저 떨어지면 이상해지잖아.” 최명훈 8단의 탈락이 확정됐을 때 조9단이 한 말이었다.  ▲ 삼성화재배 역사상, 아니 세계대회사상 이처럼 기막힌 역전극이 또 있었을까. 7회 삼성화재배의 백미는 결승전이 아니라 8강전, 뤄시허 9단(왼쪽) 대 조훈현 9단의 대결이었다. 조훈현 9단(흑) 뤄시허 9단(백) <실전진행1> 실전 123의 대목부터가 이 바둑의 하이라이트다. 여기까지 형세는 실리에서 앞선 흑이 주도하고 있다. 게다가 흑1, 3으로 백 두점까지 끊어먹어서는 매우 편하게 되었다. 조9단은 국후 백2를 놓고 “미쳤데. 왜 그냥 죽이지?”라고 했다. 그런데 몇 걸음 못가 진짜 ‘미친 수’를 자신이 두었다. 백4에 끊었을 때 흑5로 반발한 수, 이 수야말로 ‘미친 수’였던 것이다. <1도> 정수는 흑1로 곱게 이어두는 거였다. 흑5까지 아무 탈이 나지 않는 자리다. 그렇지만 백4와 A, B, C가 모두 백의 선수로 듣는다. “(상대의 입맛대로 두게 하는 건)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잖아.” 승부사의 반발심리다. 어찌하여 미쳤다는 걸까? 아래 <실전진행2>의 수순을 처음으로 돌려 한수씩 놓아보자. 착각이었다. 조9단은 백8의 수를 못 보았던 것이다. 아니 이렇게 1선으로 기어가며 연결하기에 급급한 수는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프로의 바둑에서 두어지지 않는다. 해서 고려대상에 없었다. 그런데 상대가 흑7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 백8로 넘어가는 순간, 눈치챘다. 흑대마의 사활이 걸린 수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백14까지, 순식간에 흑▲ 다섯 점이 떨어졌다. 살점이 아니라 뼈째 뜯겨지는 아픔이었다. 그렇다면 앞서 흑11의 수로 <2도>처럼 1 이하 5로 살리면 어떻게 될까. 그땐 물론 백도 6으로 살린다. 자, 흑9까지면 두 집 내고 산 거 아닌가…싶지만, 백에겐 10의 곳에 먹여치는 묘수가 숨어있었다. “내가 미쳤지…. 끝나버렸어….” 조9단이 탄식이 낮고 길게 흘러나왔다. 다시 위 <실전진행2>의 장면으로 돌아가, 백14까지의 손익득실을 따져보자. 하변은 본시 흑이 7집 나는 자리다. 백집은 한집도 없었다. 그런데 흑집은 8집이 되었고 백집은 무려 15집이 뿅~ 하고 생겼다. 백이 14집이나 거져 얻은 것이다. 게다가 이 변화로 인해 흑‘가’에 둔 다음 ‘나’로 찝는 수도 더는 선수가 아니다. 은연중 엷었던 좌하귀 백대마가 떵떵거리게 되었고 이 모든 것들을 계산에 넣으면 흑은 20집 정도의 손실을 입었다. “도저히 안됩니다.” 검토실의 기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었다. <실전진행3> 큰 끝내기를 할 데도 별로 없다. 이 장면에서 형세는 흑이 반면 3집을 남기는 정도라 한다. 덤을 주고 나면 3집 반의 차이. 아마추어의 바둑에서야 간발의 차이겠지만 정상급 프로의 바둑에서 이 정도면 더는 해볼 데가 없는 바둑이다. 더군다나 백1로 막으면서 ‘귀에 수가 있으니 어서 가일수 하시오.’라고 경고한다. 얼어죽으나 굶어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 노적가리 불질러 놓고 싸라기 주워 먹는 꼴이지만 옛말에 도끼 가진 놈이 바늘 가진 놈을 못 당한다 했다. 이판사판, 조훈현 9단은 흑2부터 분주히 이삭을 줍기 시작한다. 백3, 5에도 아랑곳 않는다. 이곳이 7집 끝내기. 아래 <3도> 흑1, 3으로 받으면 빅이지만 돌볼 계제가 아니다. 잡을 테면 잡으라는 투로 일별도 하지 않은 채 조9단은 흑6 이하 20까지, 손을 뺀 채 또 열심히 넝마주이로 나선다. 가랑비에 옷 젖는 이치를 뒤늦게 보여주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지만 이 바둑만큼은 신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죽은 자식 뭐 만지기 아닐까. 좌상귀 보기를 돌같이 하자 뤄시허 9단이 은근 열이 치솟았음인가. 아무리 바둑이 유리하나 ‘수가 있는 자리, 손을 쓰지 않으면 혼낼 겁니다.’ 하고 연거푸 위협을 했다. 그런데도 들은 시늉도 않으니 이를 지나치는 건 사나이의 매너가 아니라는 듯 뤄시허 9단은 <실전진행3>의 백21, 23으로 또다시 귀를 두어왔다. 다음 백이 ‘가’로 두면 흑대마가 걸린 패다. 이런 큰수가 있기에 뤄시허 9단은 집요하게 이곳에 다섯 수나 매달렸다. 하지만 백21, 23은 나중 억만금이 될지언정 당장은 공배와 같은 수다. 바람이 불고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무엇이 흔들리는 거냐고. 스승이 말한다. 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조훈현은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을 걷고 있을 뿐인데 뤄시허의 집착이 판을 흔들고 있다. <4도> 고요한 듯 보이나 좌상귀가 내면에서 요동치고 있다. 지금 걷는 길이 그러하듯, 조9단에게 좌상귀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막이다. 백은 A로 집어넣으면 단패. 그러나 흑은 B에 때려낸 뒤 C, D 두번을 더 둬야 하는 이단패다. 먼저 B의 패를 건다거나 백A의 패를 대비하려면 반상의 팻감을 사전에 다 없애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집을 메우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가뜩이나 모자란 판국에 이는 자살행위다. 한마디로 좌상귀 패는 백의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신세라는 얘기다. 이런 핵폭탄을 안은 채-. <실전진행4> 이 바둑을 귀신이 도왔다는 얘기는 괜한 얘기가 아니다. 적의 가슴에 핵탄두까지 터억 걸어놓고도 백이 1, 3(총보 222부터의 수순)과 같은 귀신이 곡할 수를 두었기 때문이다. “진짜 미쳤데. (백3은) 두집 끝내기쯤 되나?” 조훈현 9단은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심정이었다고 술회했다. 잽싸게 흑8부터 14까지 백 두점을 날름 잡아먹고 흑20까지 차지한다. 백이 이곳을 들여다본 뒤 꽉 막으면 3집을 낼 수 있는 자리였다. “계속 횡재를 했지만 아직도 진 바둑이죠. 백이 그냥 끝내기만 하고 있으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요.” (조훈현 9단) 좌상귀 패는 백에게만 권리가 있기에 여전히 그만큼 불리하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 순간 또한번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백21로 후수를 자청한 공배 메움. 이어 자기집을 메운 백25의 수. 흑이 자기집을 메워가며 팻감을 없애도 마땅찮은 판에 백이 자기집을 없애며 패를 걸어온 것이다. 진짜 뤄시허가 미쳤거나, 귀신이 돕지 않은 마당에야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현상이 펼쳐졌다. 아무리 마(魔)에 씌었어도 백25의 수는 뭔가? <5도> 백1로 그냥 패를 들어갔어도 그만이었다. 백은 기껏해야 A, B 두 군데 팻감밖에 안 보이는데 흑은 C, D, E의 곳만 세 개의 팻감이 있다. 따라서 흑은 2~6으로 패를 해소해야 할 것이고 그 대가로 백7까지 우하귀를 도려냈으면 이 또한 끝이었다. <실전진행5> 패싸움의 결과는 흑13까지 백이 좌상귀를 왕창 따내고 흑은 우상귀 백을 잡는 맞바꾸기로 끝났다. 이 결과는? 백이 좌상귀를 잡은 크기는 34집이고 흑이 우상귀를 차지한 크기는 31집이다. 놀랍게도 그토록 집요하게 투자하고 집착한 공작이 고작 3집 득을 보자고 한 짓이라니! 그렇다면 좌상귀 패를 들어갈 것도 없이 아래 <6도>와 같이 백1로 미리 살아두면(이 수는 팻감을 없앤 효과와 더불어 자체로 2집 끝내기다) 흑은 이제야말로 2로 자기집을 메우며 팻감을 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좌상귀 A의 패를 해 얻은 이익과 똑같다. 그렇다면 백△로 공배를 메우며 선수를 넘겨주고, 백□로 자기집을 한집 메운 것은 무슨 짓이었단 말인가. 303수 끝, 흑 반집승. 대국이 끝나고 조9단은 자신의 승리가 믿어지지 않는 듯 상기된 모습이었다. 사망진단서를 받은 판도 이렇듯 살려내니 ‘중국 신예기사 킬러’란 별호가 붙을 수밖에. 박치문 중앙일보 관전기자가 물었다. “지금까지의 놀라운 역전극 중에서 가장 정도가 심한 것이 어떤 판이었냐?” 조9단은 단번에 대답했다. “오늘 바둑!” 삼성화재배뿐 아니라 바둑사를 통틀어 이 바둑만한 역전극이 또 있었을까. 조훈현은 진정 하늘이 돕는 승부사다. <끝> ○● 삼성화재배 특집(상) - 마샤오춘을 세계무대 뒤로 사라지게 한 한수! ☜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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