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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얼굴이 다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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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학 시절 바둑동아리 친구는 기보 놓아 보는 것이 취미였다. 입학부터 아니, 정확히는 바둑동아리에 가입한 날부터 한 1년간은 바둑동아리에 매일 아침 일찍 나와 기보를 늘어놓았다. 다른 기보는 쳐다보지도 않고, 동아리방 서가에 꽂혀 있던 3권짜리 오청원 선국집만 수순대로, 페이지 순으로 들여다보았다. 누가 옆에서 떠들든 바둑을 두든 신경도 안 쓰고 자신의 작업을 지속하였다. 이렇게 열심인 반면 수업엔 잘 안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학점은 제곱하면 값이 오히려 줄어드는 수치였고, 교수님 얼굴을 자세히 본 건 군대 가기 전 휴학계를 내기 위해 만났을 때가 유일했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 친구가 했던 ‘작업’은 기력 향상에 별 도움은 안 되었을 게 분명할 터였다. 친구 기력은 기원급수로 따지자면 5급 안팎 정도였다. 오청원 선국집은 내용은 주옥같지만 참고도가 없었다(기억이 확실하지 않은데 내 기억엔 없다). 해설도, 흐름에 관한 몇 마디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친구가 영양가 있는 참고도를 머릿속으로 그려 가며 기보를 보는 건 무리였다. 보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지도 않았다. 저급자(친구여 미안)에게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그 책을 그는 보물처럼 아끼고 내용을 음미했다. 나는 짐짓 마음먹고 친구에게 물어본 적도 있다. “재미있니?” 하니까 “응, 재밌어”란 대답이 돌아왔다. ‘실력 향상에는 어쩌고…’ 하면서 더 물어보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본인이 재밌다는데 어쩌겠나. 그 세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군대를 갔다오더니 친구는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듯했다. 장학금을 놓치지 않는 걸 봐서 알 수 있었다. 졸업 후엔 어느 바둑 관련 회사의 바둑 기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도 그 친구만큼은 아니지만 기보 보기를 즐기는 편이었다. 책방을 가면 실용ㆍ취미ㆍ바둑 코너(그냥 바둑 코너가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를 돌아보는 게 즐거웠고 가슴 가득 행복을 안고 책을 사오곤 했다. 내 경우는 기보를 다양하게 보는 쪽이었다. 고전 접바둑 기보, 본인방 슈사쿠의 기보부터 최신 국내외 기보까지 가리지 않았다. 방학 때면 아침에 일어나서 밤을 지나 새벽이 오기까지 기보를 반상에 놓아보기도 했다. 부모님은 학교 공부에 방해될까 봐 싫어하셨다. 작은아버지는 형의 저 공부하는 자세를 보라며 사촌 동생의 머리를 쥐어박으셨다. 작은아버지는 내가 하는 걸 엄연한 공부의 형태로 인정해주셨던 거였다. 나는 그 순간 사촌 동생을 비롯해 이 시대 프로기사가 되려고 바둑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난 프로기사나 아마추어 강자가 되겠다는 꿈 같은 건 없었다. 기보를 놓아보는 건 나에게 한해선 공부가 아니라 액션 영화보기나 온라인 게임 하기 내지 축구 경기 관람하기 등과 동일한 성격의 행위였다. 프로지망생들에게 성스러운 공부 분야인 기보 보기를 난 한갓 취미로 즐겼다. 단지 재미있었을 뿐이었다. 다양한 내용의 기보를 보다 보니 유익한 점은 많았다. 기사들의 기풍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시대에 따라 바둑의 양상이 어떻게 변하는가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다양한 바둑들이 바둑 책 속에 들어 있었다. 서로 다른 유파의 무림 고수들 같은 기사들이 바둑 무림에서 대결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 듯 여겨졌다. 기보를 많이 놓다 보면 물리기도 했다. 그런 때는 좀 색다르게 기보를 보는 방법을 물색했다. 바둑판의 위아래를 바꾸거나 좌우를 바꿔 돌을 놓기도 했고, 좋아하는 기사의 기보만 골라 놓기도 했다. 잔잔한 내용이 지겨우면 불계의 결과가 나온 판만 골라 놓아보기도 했다. 내가 열심히 기보 보기 놀이를 하던 당시 한국은 이미 세계 최강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었다. 일본 기사들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는 있었지만 우승은 대개 한국이 했다. 다케미야, 오다케, 고바야시가 아직 현역 기사로서 개성 넘치는 바둑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개성 넘치는 바둑은 기보 보기의 대상으로서도 좋았다. 다케미야의 ‘우주’는 부숴도 부숴도 넓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항상 현실이 이기는 세상과 달리, 낭만이 현실을 이기는 꿈을 다케미야는 실현해 주었다. 고바야시는 실리주의의 극단을 가고 싶어했고 오다케는 미학을 실천했다. 조치훈은 목숨을 걸고 두면서 타개의 화신이 되었다. 개성이 강렬한 그 시절은 올드 팬들에겐 이젠 향수로만 남아 있다. 2011년을 맞이한 이 시대 기풍과 승부를 포괄하는 키워드는 ‘전투’와 ‘실리’다. 포석이 없이 초반부터 지독하게 싸우며 난전으로 돌입하는 현대 바둑은 크게 봐선 복고다. 아이러니컬하다. 원시 형태 바둑으로 회귀했다. 전투가 일어나게 하는 동인은 실리다. 실리 획득을 위해 바둑돌 병사들이 움직인다. 이런 스타일의 최전방엔 이세돌이란 인물이 있다. 이세돌이라는 천재의 바둑을 접하면서 이제 바둑 기술은 궁극에 다다른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는 이들도 있다. 호전적인 기사들이 득세하고, 현실적으로 실리를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기사가 성적을 내면서 그것이 최선임을 증명하고 나선다. 기사 대부분이 그런 길을 찾아 나서는 느낌이다. 승리를 위해선 그것이 왕도인 것처럼. 나 역시 전투 바둑을 좋아한다. 화끈하고 통쾌한 요소가 전투 바둑에 있다. 기보 보기가 지겨울 때 결과가 불계인 바둑을 골라보곤 했던 이유도 그런 데 있었다. 하지만 자꾸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마다 다른 성격을 갖고 있듯 바둑도 그러할 것이다. 다양한 바둑은 더 재밌고 풍요롭다. 그런데 개성이 넘치던 바둑들은 실종되고, 성형된 바둑들만 남는 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전투ㆍ실리 바둑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승리를 위해서 난 여러 길 중 그것만이 추구되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지난해 말 아마국수전에 갔을 때다. 연구생의 길을 걸었던 최고의 아마기사들이 출전한 그 대회에서 쉬는 시간에 몇몇 아마기사들이 다른 판의 복기를 하는 걸 봤다. 그들끼리 대화 중에 이런 이야기들이 새어 나왔다. “바둑이 참 재미없다” “에휴, 뭐 어쩌겠어. 요샌 다들 이렇게 둬” 자조 섞인 말투들이었다. 그 바둑은 전투바둑은 아니었지만 획일적인 내용의, 창의성이 돋보이지 않는 승부 방식의 하나를 보여주고 있었다. 자조는 승리에 가장 빨리 접근하기 위해 이런 내용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말이었다. 앞의 전투ㆍ실리 일색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할 수 있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모험과 개성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가. 물론 억지로 개성을 만들자 해서 되는 건 아닐 것이다. 노장이 된 어느 날 오다케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내 바둑을 미학이라고 생각하면서 둔 적이 없었다. 미학이란 별명은 어느 편집인이 붙여준 것인데, 어느새 나도 미학이란 별명에 맞게 바둑을 두려고 의식하게 됐다. 그러자 무언가 내게 맞지 않는 것 같았고 성적은 점점 떨어져 갔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바둑을 두고 있었을 때 오다케는 그 자체가 미학이었다. 오늘날 최고의 바둑을 추구하는 기사들은 자신만의 본연의 바둑이 있을 것이다. 의식하지 않을 때 뿜어져 나오는 자신만의 개성이다. 오늘, 그 본연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피어난 개성 넘치는 바둑들이 우리 바둑계에 앞으로 많이 나와 줬으면 하고 더 소망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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