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 "암 진단 후 더 바둑에 매진하고픈 열정이 생겼다!"
조치훈, "암 진단 후 더 바둑에 매진하고픈 열정이 생겼다!"
형 조상연에게 듣는 조치훈 九단의 바둑이야기 ①
[기획/특집] 정용진  2025-10-03 오전 03:15   [프린트]
▲ 조상연 七단은 조치훈 九단의 맏형이다. 1941년 생이니 올해 우리나이로 여든다섯 살. 조치훈 九단에게 형 조상연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갔다가 이미 자신은 늦었다는 걸 깨닫고서 여섯 살 막내동생 치훈을 데려와 모든 것을 바쳐 키웠다. 조치훈의 영광 뒤에는 형 조상연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사진/월간바둑)


특별인터뷰 | 형 조상연에게 듣는 조치훈 九단의 바둑이야기 ①

‘형만한 아우 없다’는 속담은 적어도 바둑세계에서는 딱 들어맞지 않는다. 대체로 형보다는 동생이 더 뛰어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예로 들면, 형 김수영보다 동생 김수장이, 형 안형준보다 동생 안성준의 성적이 돋보인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형제기사로 꼽히는 형제기사 이상훈보다 동생 이세돌의 업적이 훨씬 뛰어나다.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형 조상연과 동생 조치훈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들 동생의 성장과정을 들여다보면 ‘형 없이 아우 없다’란 사실을 대면하게 된다. 일찍이 그런 형이 없었다면 이런 아우도 없었을 것이란 사실. 바둑영웅 조치훈 九단을 키운 건 8할이 형 조상연의 헌신 덕분이었다. 형 조상연 七단으로부터 조치훈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조상연·치훈 형제. 33년 전, 1992년 7월 제4기 동양증권배 개막식장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형은 동생의 그림자. 동생 치훈이 있는 곳엔 언제나 형 상연이 함께했다. 1976년 5월 28일 일본에서 바둑유학 중인 청년 조치훈이 일시 귀국했을 때 공항에 마중나온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사진/한국기원)

이 글은 [월간바둑] 2025년 6월~7월호에 게재한 특별인터뷰입니다. 일본바둑 레전드 ‘조치훈 九단을 키운 형, 조상연 七단에게 직접 들어보는 동생 조치훈에 대한 이야기로, 한가위 명절연휴를 맞아 사이버오로 회원께 다시 소개합니다. 본문 중 언급하는 기록과 일시는 원고 게재 당시 기준 그대로 전재했으며, 한국기원 [월간바둑]과 일본기원의 자료사진을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 편집자 註




김인, 조훈현, 조치훈에 앞서 이 사람이 있었다

아홉 살(62년)에 입단한 조훈현에 앞서 열네 살(58년)에 입단한 김인이 있었다. 바둑팬 대부분은 여기까지는 안다. 그런데 열네 살에 입단한 김인보다 2년이나 앞서 열다섯 살에 입단한 소년기사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올드바둑팬이 아니라면 잘 모른다.

1956년 부산상고 1학년 재학 중 만15세에 제4회 입단대회 관문을 통과했다. 요즘이야 “이 나이면 프로로 대성하기엔 늦었다”는 소리를 들을 법하지만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다. 나라가 제자리를 찾는 데 안간힘을 쓰던 시기다. 게다가 조남철 선생의 말마따나 “프로기사라고 해봐야 고작 10여 명뿐. 게다가 모두 노인이었고, 개중 젊다고 해봤자 서른을 넘긴 상황에서 15세 소년은 그야말로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라는 표현은 과언이 아니다.

이런 소년기사의 탄생에 바둑팬은 환호했고 인기가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소년기사의 등장으로 ‘최고위전’ 등 지방신문사가 주최하는 기전들이 생겨났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소년기사의 이름은 조상연(趙祥衍)

1941년 11월 16일생. 세월은 무상하여 어느새 우리나이로 여든다섯 노인이 됐으나 그 숱한 세파가 어디로 비껴 흘러갔는지 여전히 꼿꼿하다. 입단 5년 만인 1962년 홀연히 도일(渡日)해 기타니(木谷 實) 九단 문하로 들어가 63년 일본기원 二단을 인정받았고, 2007년 六단에 오르기까지 34년간 일본기사로 활동하다가 그해 은퇴했다. 일본기원은 관례에 따라 그에게 한 단(段) 올려 七단을 수여했다.

사실 이 모든 이력이 부질없다. 그가 누구인지 여전히 궁금해할 바둑팬에게 ‘조치훈의 형 조상연!’ 이 한마디 설명이면 직방이기 때문이다. 80년대 일본 기성(棋聖)·명인(名人)·본인방(本因坊) 3대 타이틀을 한손에 움켜쥐며 최초로 대삼관(大三冠)을 달성한 조치훈 九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조치훈을 키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그림자처럼 조력한 형이었기에 우리에겐 ‘조치훈의 형’으로 훨씬 더 알려진 사람, 조상연 七단이다.

▲ 한국전쟁 중 피난시절 부산에서 한국바둑 명맥을 이어온 대한기원 주축 인물들을 볼 수 있다. 1953년 9월 28일, 서울로 돌아가는 조남철 국수를 환송하며 기념으로 찍은 희귀사진이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지대한 도움을 준 김병호 初단, 그 옆이 조남철 국수다.
그리고 그 뒷줄에 소년 두 명이 보이는데 왼쪽이 조상연(은퇴, 프로 七단), 오른쪽이 고재희(현 프로 九단)이다.

한국바둑의 1세대 ‘소년기사’

78년 11월호 월간『바둑』에 조남철 선생이 한국바둑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소년기사들에 대해 회고한 대목이 있다. 대략 옮기면 이러하다.

부산 피난살이도 끝나고 서울로 환도해 민심도 어느 정도 안정되던 55년(3월)과 56년(10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과 중국(대만을 말한다) 간 친선교류전을 치렀다. 이 대회 덕택으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고 여기에 조상연, 김인을 필두로 소년기사들의 탄생이 이어지면서 바둑붐이 일었다.

당시 부산바둑계에서 활약한 리더는 김수영 七단(2005년 작고)·김수장 九단의 아버지인 김탁(金鐸) 아마3단이었다. 그가 소년기사 조상연의 후원자를 자처해 앞장섰다. 국제신문에 조상연을 중심으로 한 각종 기전(이벤트)을 시도했고, 이것이 지방신문에 바둑란이 생기기 시작한 동기가 됐다. 처음 김봉선 四단과 7번기로 시작한 이벤트는 조남철과의 7번기 등으로 이어졌다. 이에 자극받은 부산일보사와 대구의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도 덩달아 바둑란을 선보였다.

바둑을 배우던 소년들은 이 같은 조상연을 보고 용기를 얻었고 자극을 받았다. 이러한 기운이 김인으로, 다시 조훈현의 등장으로 연결됐다.

부산일보사가 59년 9월 이벤트 기전 성격으로 열었던 ‘8인 승발전’을 본격 기전인 제1회 최고위전으로 간판을 바꿔 달은 것도 그해 12월이었다. 타이틀 보유자를 가리는 1회 대회에서 우승한 조남철 七단(당시)은 도전5번기로 치르기 시작한 2회 대회(1961년)에서 조카인 조상연 四단과 맞닥뜨려 3-0으로 방어했다.

삼촌에게 진 이듬해 조상연은 3월 26일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났다. 보름여 간격을 두고 먼저 두 살 어린 김인이 일본으로 날아갔고 뒤이어 한국바둑의 기대주로 각광받고 있던 또 한명의 청년기사가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우리나이 스물두 살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상연은 요즘 시쳇말로 ‘현자타임(현실 자각 타임)’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바둑으로 대성하기엔 이미 때 늦어버린 자기보다는 동생 치훈을 하루라도 빨리 데려와 키워야겠다는 각성을 한다. 부모님을 설득해 5개월 뒤 여섯 살짜리 막내를 일본으로 데리고 와 온갖 뒷바라지 끝에 18년 만에 마침내 명인으로 만들었다.

남한산성 자락으로 조상연 사범을 찾아간 까닭

1930~40년대에 태어난 기사 중 생존해 계신 분이 이제 몇 안 남았다. 조상연 七단은 2021년에 별세한 김인 九단보다 두 살 연상이다. 한국바둑의 개벽기인 1950~60년대를 증언해줄만한 원로기사들이 몇 안 계시는 이때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줄 한 분이다. 더군다나 ‘한국바둑의 개척자’로 불리는 조남철 선생의 조카다. 지척에서 삼촌의 기원 일을 거들며 지켜보았고(본인은 ‘게임돌이’를 했을 뿐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일찍이 ‘천재 소년기사’로 등장하면서 50년대 중후반과 60년대 초 한국 프로바둑 초창기를 누빈 정상급 기사였으니 더없는 적임자다.

조상연 七단이 남한산성 비탈진 산자락에 집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한 건 2002년경이다. 그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살다가 도쿄에 있는 거주지는 자녀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주로 남한산성 자락에서 농사로 여일하며 지낸다. 일본은 볼일이 있거나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 가끔 다니러가는 정도라고 한다.

▲ 중앙일보 일본 특파원으로 알고 지냈던 분의 권유로 남한산성 자락에 사 놓았던 땅에 23년 전 집을 짓고 틈틈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원래는 쓰러져가는 암자가 있던 산기슭이라 인적이 드문 외진 곳이다.

오래전부터 남한산성 자락에 똬리를 틀었어도 한국바둑계 사람들과 거의 교유하지 않은 채 도인마냥 은거하며 지내왔다. 간혹 두 살 위인 고재희 九단이나 김인 九단 같은 그 시절 친했던 또래기사 한두 명 하고나 안부를 나눠 왔을 뿐, 그나마 한잔 술 거나하게 걸친 김삿갓처럼 홀연히 남한산성을 찾곤 하던 김인 국수마저도 이제는 없다. 조상연 七단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한국기원으로부터 두 번이나 ‘제명’ 당한 사람이라고 하니 한국바둑계와 피차 통음(痛飮)하며 지낼 사이는 아니었을 터이다.

그런 그를 새까만 후배 글장이 몇이 청명(淸明)에 우르르 들이닥치듯 찾아뵈었다. 남한산성 산기슭 곳곳에는 진달래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고 목련이 부푼 젖몽우리마냥 유백색(乳白色) 꽃봉오리를 부풀리기 시작한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더 늦기 전에 한번 찾아뵙자 의기투합한 목적은, 월간『바둑』으로서는 형으로부터 ‘조치훈 九단의 근황’에 대해 들어볼 셈속이었겠으나 필자는 좀 달랐다. 이번 기회에 ‘조남철 선생께서 들려주고 남겨놓은 바둑역사가 아닌, 그때를 경험한 다른 주역의 증언’을 좀 들어보고 싶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다각도의 조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한국기원으로부터 제명을 당했다는데, 당사자로부터 직접 사연도 들어보고 그 과정에 오해가 있었다면 이참에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1. 조치훈 九단의 건강에 대해…, 암 수술 이후 근황

지난해 조치훈 九단이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직장암이었다. 병원을 찾았을 때는 수술이 필요할 만큼 커진 상태였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식도암까지 추가로 발견됐다. 직장암이 전이된 것이 아니라 식도 자체에서 발병한 원발성(原發性) 종양이었다. 한국기원 소속기사로 이적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스미레(仲邑菫) 四단을 취재하러 온 아사히신문 기자로부터 전해들은 바로는 대변주머니를 차고 다녀야할 정도라고 했다.

상태가 생각 이상 위중하구나 싶었다. 한 시대를 장식한 바둑영웅이 스러지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1956년생이면 올해 68세에 불과하다. 당연히 조치훈 九단의 건강상태부터 물었다. 다행이 맏형의 대답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안도했다.

“그런 거는 아닐 건데…. 대변주머니를 차고 다닌다는 건 형인 나도 처음 듣는 얘긴데…. 지난해 직장암뿐 아니라 식도암까지 발견됐다는 전갈을 받고 깜짝 놀라 급히 일본으로 건너갔지요. 수술을 받고 치료를 병행하면서 지금은 다시 바둑도 두기 시작했어요. 두 암 중에서 직장암 증세가 더 심했는데, 치료를 받으면서 식도암은 거의 사라졌다고 하네요. 정말 다행이죠.”

조치훈 九단은 2015년 8월 아내 교코(曾川京子) 여사와 사별한 뒤로 장녀 마도카(麻堵花)의 내조를 받고 있다.

“니 아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하고 귀한 분이니 끝까지 성심성의껏 돌봐드려야 한다”는 엄마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휴대폰조차 쓰지 않고 사는 아빠의 매니저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조치훈 九단이 가끔 농담으로 “시집도 안간 과년한 딸아이 때문에 연애도 제대로 못하고 눈치를 보며 산다”고 말하는 그 딸이다. 화장실 변기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본 딸이 성화를 부려 검진을 서두른 것이다.

거주하는 곳이 지바(千葉)현이라 굳이 도쿄로 가지 않고 지바에 소재한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직장암이 더 급해 먼저 수술을 했는데 이게 잘 됐다. 그런 다음 방사선치료를 하면서 식도암 쪽으로 손을 쓰려고 보니까 신기하게도 암세포가 제법 사라져 있었다. 약효를 덩달아 보았는지 하여간 불행 중 다행스런, 아니 기적과 같은 일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 동생의 근황을 들려주고 있는 조상연 七단. 이른이 넘은 나이에도 정정했다.

“직장암 치료를 하다 보니까 이게 약 기운이 그리로도 가는 모양이지? 그래도 식도암 그쪽도 일단은 손을 썼지. 그렇게까지 했는데 치훈이가 나한테는 연락을 안 해. 그래서 내가 조카딸을 통해 전해 듣고 지바로 간다고 그러니까 오지 말래. 그러니까 더 의심스럽잖아요? 형에게 얼굴을 보이기 싫어 그런가 했더니 형이 정 일본으로 오겠다면 자기가 도쿄 내 딸이 살고 있는 우리집으로 오겠대.

걔는 휴대폰도 없지 현금도 안 들고 다녀요. 카드 하나 교통카드 하나밖에 없어요. 다 딸이 관리하고 전적으로 의탁해요. 지금도 바둑 외는 아무 것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집은 자주 오긴 왔는데 이게 오래간만에 오니까 지하철 몇 번 출구로 나오는지 헷갈려 헤맸나봐. 근방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찌어찌 빌려 가지고 전화를 걸었어. 하하. 그렇게 왔어. 와서 밥을 먹는데 보니까 얼굴이 좋아. 아프다는 얘가 엄청 좋네. 또 밥도 되게 잘 먹데. 오랜만에 형수가 한국음식을 해 주고 그래서인지 세 공기나 먹어.

내가 천만 원을 봉투에 넣어서 줬어.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하면서 넙죽 받더라고. 아, 얘가 어려운가 보다. 너무 걱정스러워. 그런데 봤더니 곁에 앉아있는 우리 손녀한테 바로 주더라고. 그래서 내가 야, 뭐야? 그랬더니 아니 형, 형이 나 줬으면 내 거지? 내 거 내가 쓰는데 왜? 왜 혼내는 건데? 그러니 할 말이 없어요. 치훈이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런 동생의 평소 모습을 다시 보고서 안도하게 되더군요.

치훈이의 바둑에 대한 열정은 여전합니다. 몸상태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대국에도 참여하고 있고 컨디션도 점차 회복하고 있습니다.”

▲ 조치훈 九단은 2023년 4월 8일 제2기 데이케이배 레전드전 결승에서 고바야시 사토루 九단에게 209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두고 타이틀 획득 76회를 달성했다. 2025년 5월 16일 현재 1623승 911패 7무로 일본 최다승을 기록 중이다.

암 진단 후 더 바둑에 매진하고픈 열정이 생겼다

2023년 12월 조치훈 九단은 일본 프로바둑 사상 첫 1600승을 달성한 바 있다. 1600승을 거둔 뒤 “대국에 임하는 긴장감을 갖고 있는 한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 그는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선 “매일 바둑공부를 한다. 대국에서 비참하게 지는 건 괴롭다”며 “고통스러운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야 말로 고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전치 3개월의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휠체어대국 투혼’을 보인 그다. 한바탕 병치레쯤으로 중단할 그가 아니잖은가.


일본경제신문에 연재한 ‘나의 이력서(私の履歷書)’에서 조치훈 九단은 과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실제로 암 진단을 받은 후, 바둑에 좀 더 매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 또한 사실이다. 몇년 전, 이야마 유타(井山裕太) 왕좌(王座)에게 “내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바둑밖에 두지 못하게 되면 거침없이 솔직히 말해주게. 그때는 미련 없이 은퇴하겠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때 정점에 올랐던 기사로서, 더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그런 마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에게는 바둑밖에 없으니 매순간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한 바둑을 둘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욱 강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코믹한 조치훈’의 면모를 잊지 않는다.

“자, 조 선생님, 슬슬 때가 되신 것 아닙니까?” 이렇게 툭, 이야마 씨가 말을 걸어 올 거 같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얼굴을 마주치지 말아야겠다."

▲ 1980년, 4년간 진출했던 명인전 리그에서 6승 2패로 마친 뒤 동률을 기록한 가토 마사오 九단과 도전자결정까지 치른 끝에 마침내 도전자가 됐다. 명인 오타케 九단은 직전에 열린 랭킹7위 기성(碁聖)전에서 조치훈에게 타이틀을 빼앗아간 강력한 상대였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패를 따내는 차례에 혼선을 빚어 1무승부가 출현하기도 한 제9기 명인전 도전7번기에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11월 5~6일 시즈오카(靜岡)현 아타미(熱海)에서 둔 6국에서 조치훈이 백 1집반 승을 거두며 4승 1무 1패로 꿈에 그리던 명인(名人)에 올랐다. 계가를 하기 전 이미 결과를 알고 있던 오타케 九단은 “카메라맨을 부르시죠”라는 특유의 멘트로 먼저 대국실 밖에 대기하던 보도진을 들어오도록 청하면서 패배를 인정했다. 24세 명인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뒷바라지하던 형으로서 가장 좋았던 순간

조상연 七단은 형으로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동생이 1980년 11월 6일 제5기 명인전 도전7번기 6국에서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九단을 4승1무1패로 물리치고 ‘명인(名人)’에 오른 때를 꼽았다. 조치훈 八단(당시)의 나이 24세. 이 뒤로 5연속 우승을 이뤄 ‘명예명인’ 자격을 얻었다.

일본에서 가장 큰 상금이 걸린 타이틀은 기성(棋聖)전이지만 명인은 명성으로나 인기로나 최고로 치는 기전이다. 국수(國手)가 한국기사들이 선망하는 타이틀인 것처럼 명인(名人)은 일본기사들에게 꿈의 타이틀이었다. 조치훈이 五단으로 승단한 후 인터뷰에서 “나는 五단이 되고 싶어서 일본에 온 게 아니다. 명인이 되고 싶어서 왔다”고 말한 것을 두고 ‘신인의 패기’보다는 ‘당돌한 발언’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명인을 따기 전에는 결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자신을 채찍질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형에게도 ‘명인’은 1차 목표였기에 가슴 벅찰 수밖에 없었다.
“명인은 그만큼 일본에서 상징성과 위상이 남다른 타이틀인데, 그 자리를 한국출신 기사인 치훈이가 차지했다는 것은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

조치훈 九단도 ‘나의 이력서’ 연재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여섯 살에 일본에 와서 18년. 어린 마음에 ‘명인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동경하던 타이틀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순간이었다. 종국 직후, 여러 질문을 받았지만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부모님에게도 전화로 알려 축하를 받았을 텐데, 어떤 얘기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정말 기뻤고, 목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도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차분한 상태였던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밖의 많은 타이틀전이 남아 있기에 ‘아직 갈 길이 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 1980년 명인 획득 후 12월 28일 전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금의 환향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아들을 반기는 어머니와 일본에서 동행한 형 조상연.

▲ 아버지 조남석 씨가 손자손녀를 안아주며 반기는 모습.

▲ 명인의 귀국 기자회견. 우리말에 서툰 동생을 도와 형 상연이 곁에 앉아 인터뷰했다.

▲ 1980년 12월 29일 청와대를 예방한 조치훈 명인은 국위를 선양한 공로로 우리나라 기사로서는 처음으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선배 조훈현 九단도 내 동생을 맞이하듯 조치훈의 쾌거를 반겼다.

▲ 바둑계는 환영회에 이어 환송회까지 성대하게 마련했다. 환송회에서는 형 상연, 부모님과 나란히 고국의 열렬한 환대에 감사인사를 전했다.

형 조상연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동생 조치훈이 마침내 일본 바둑 '명인'에 오르던 순간을 되짚어보았다. 다음 편에서는 조상연이 홀연히 일본으로 떠나게 된 배경과 여섯 살 동생 치훈의 손을 잡고 일본으로 데려가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한국으로 돌려보내질 뻔했던 말썽꾸러기 천재가 비로소 승부에 눈뜨게 된 결정적 계기가 펼쳐진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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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jsay |  2025-10-04 오후 6:20:00  [동감0]    
바둑계를 평정하시더니 암계도 평정하셨군요. 사랑합니다. ^^
캐쉬리 |  2025-10-03 오후 2:49:00  [동감0]    
조남철과 조카 조상연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ㅎㅎ 도일 했을때도 뜬금없이 관서기원 입단 시도를 했었다 하고, 결국 조남철 주도로 한국기원에서 제명 당함. 얼마전 복직(?) 신청 했었는데 기사회 투표결과 부결...
팔공선달 |  2025-10-03 오전 10:35:00  [동감2]    
내가 바둑을 접한 것이 조치훈이었고 조훈현에 흥분했고 이창호로 열애에 빠졌다.
일본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조치훈이 해소하고 현실적 자부심을 줬고
조훈현은 일말의 열등감마저 털어버리고 자신감과 미래를 보여 주었다면
이창호는 지속 가능한 희망봉이었다.
더 이상 무엇으로 비견할까.

그들과 같이한 반세기 동안 그들은 벤치였고 그늘이었고 봄날 햇빛이었다.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지만.
팔공선달 삶은 내가 손한번 내밀지 않아도 빛이 되고 그늘을 준다. 애기가로서 그들은 나에게 그것이었다. 바둑을 알고 후회의 기간도 있었지만 회한의 간이역에서 지나는 시간열차에 휘둘리는 들꽃이라도 지금 나는 바둑으로 행복하고 그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함께하기 전에 인사는 없었지만 팔공선달닙 반갑습니다. 명절을 맞이하여 온 집안이 평안하고 선달님 건강하시기 바람니다.  
먼산보기 선달님 글이 멋지군요. 동감입니다.^^  
박스포석 아름다운 글에 잠시 감탄하고 갑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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