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뉴스
목숨을 버릴지언정 승부사의 자존심은 버릴 수 없다!…국수 김인의 사퇴서에 담긴 임전자세
목숨을 버릴지언정 승부사의 자존심은 버릴 수 없다!…국수 김인의 사퇴서에 담긴 임전자세
안영이 육성증언 (2)
[기획/특집] 정용진  2023-01-22 오전 11:00   [프린트스크랩]
  • 트위터
  • 이메일
  • 카카오스토리+
  • 구글+
  • 페이스북
▲ 1968년 12월 4일, 동아일보 초청으로 내한한 린하이펑(26세) 본인방이 한국 국수 김인 6단과 세종호텔에서 한일정상 대결을 벌였다. 그런데 비공개대국으로 치른 이 대국은 김인 국수가 정선 치수로 두어 뒷말이 나왔다. 당사자인 김국수 또한 한국기원 이사진의 부당한 치수 결정에 자존심이 상해 '한국기원 소속 기사 사퇴서'를 쓰기도 했다.


이 글은 [월간바둑]이 2023년을 맞아 기획한 '바둑계 원로에게 듣는다'- 안영이 선생 육성증언 1편으로, 특별히 설연휴 기간 사이버오로 회원을 위해 2회에 나눠 공동게재합니다. 안영이 선생의 육성증언은 [월간바둑] 신년호(1월호) 특집으로 시작하여 3~4회에 걸쳐 순차적으로 소개되니 더 많은 바둑계 비화를 듣고 싶은 분께서는 매달 25일에 발행하는 [월간바둑]에 관심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註


안영이(安玲二)는 누구인가?
- 한국 유일무이한 ‘바둑컬렉터’이자 ‘바둑서지학자’.
- 1934년생. 한국기원이 발행하는 [월간바둑] 편집부(1967~1972년)에서 기자로 활약하다 편집차장으로 퇴사.
- 1965년 경우당(景友堂)에서 발행한 <월간바둑> 창간을 시작으로 모두 4종의 월간바둑잡지 창간과 제작.
- 바둑출판사 <현현각>을 세워 국내 바둑출판문화 발전에 기여.
- 지금까지 60년간 한국바둑 유물과 사료를 수집, 발굴, 보존하며 한국바둑사에 대해 연구를 거듭한 산증인.

■구술/ 안영이
■구성/ 정용진

○● 설특집(1)/ 일본 본인방에게 ‘정선’으로 두라는 통고에 한국 국수는 ‘사퇴서’를 썼다! ☜ 먼저 보기 클릭



▲ 1968년 12월 4일, 한일정상대결이 열리는 서울 세종호텔 특별대국실에 '기사직 사퇴서'를 품에 안고 김인 국수가 나타났다. 이를 본 안영이 선생은 사퇴서를 빼앗고는 만류했다. 그리고 55년 지나 이 원고지 석 장은 바둑사를 증언하는 유물이 되었다.

국수의 사퇴를 만류한 동향선배, 그보다 더 소름 돋는 일
55년의 시간을 버틴 원고지 석 장은 문화재가 됐다!


당시 바둑기자였던 안영이는 12월 4일 아침 세종호텔 특별대국실 앞에서 동향(강진)의 후배 김인 국수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주했다. 그런데 김국수가 곧장 대국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침 선배를 찾고 있었다는 듯 옷소매를 끌어당겨 세우더니 양복 안주머니에서 접은 원고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내용을 읽고서 안영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사퇴서를 관계자에게 제출하고 대국에 임하겠다는 말을 듣고선 아예 자필 사퇴서를 빼앗고는 만류했다.

“보니까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고 얼굴이 부었더라니까요. 부황허니 떠가지고 잠을 한숨도 못잔 형상으로 나타났어요. 일방적으로, 불합리한, 못마땅한 치수로 피할 수 없는 대국이라면, 차라리 사퇴하고 한국기원 기사가 아닌 심정과 각오로 두겠다. 소속기사냐 아니냐의 몸가짐은 의미가 크잖아요. 이것은 진짜 피가 솟는 그런 일이에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면 말로만 끝날 일이지 저것을 나에게 직접 보이면서 그런 비장한 심정을 드러냈겠어요?

어쨌거나 약속이니까 일단 최선을 다해 바둑은 두고 파토는 내지 마라. 그리고 이것은 참고 넘기자. 내가 설득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혀 주기 위해 상당 시간 진땀을 흘린 적이 있어요. 김국수가 생각하는 건 오로지 한국의 타이틀을 여러 개 보유한 막중한 위치에 있는 기사로서 명예를 지킬 책무가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김국수가 자필 사퇴서를 쓰게 된 자초지종을 듣고서, 우리 일행은 전율했다. 아마 바둑계에도 처음 알려지는 일화일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55년 전 바둑계의 사정이 그러했고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스윽 지나치고 말 수도 있었을 이야기, 여기까지는 묻힌 채 지나올 수도 있었을 비화(秘話)다. 하지만 스윽 보고 버렸을 수도 있을 사퇴서를 어미새가 알을 품듯 고이 간직해 온 결과는, 역사(歷史)다. 평범한 물건이 역사가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일기장, 엽서, 영수증, 사진 등은 쓸모를 다하면 쓰레기가 되지만 시간을 견디면 문화재가 된다.’

선생은 그 순간 그걸 어떻게, 간직해야겠다고 일감(一感)에 생각했을까.

“사실은 참 중요한 기록이에요. 또 김국수가 살아있으면 내보이기 힘든 기록인데 고인이 됐으니까 이제 공개할 수 있는 거고요.
사퇴서를 낼 때 저 나이가 몇 살 때인가를 봐야해요. 스물다섯 그 나이에 그렇게 충실한 생각을 갖고 임하는 대국자세, 기사로서의 정신자세를 후배기사들이 본받아야 해요.

일본바둑이 우리보다 한수 위니까 어차피 안 될 것이다, 정선 치수가 당연하다고 다들 여길 순 있어요. 그렇지만 승부사로서 그러면 안 되지요. 자존심을 걸고 당당히 맞서겠다는 기백을 포기하는 건 승부사가 아니지요. 그때 김국수의 기개를 보고 내가 참 존경했어요. 나보다 여덟 살 어리지만 참 속이 차 있는 사람이로구나, 감복했지요.”

목숨을 버릴지언정 승부사의 자존심은 버릴 수 없다!
박카스만 마셔도 취하는 조훈현이 소주를 털어넣은 일화


프로의 자존심을 건 대국 이야기를 듣자니 이로부터 12년 후 펼쳐진 또 한판의 한일대결 비화가 떠올랐다.
1980년 일본 명인에 오르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한 조치훈 9단과 당시 한국의 일인자 조훈현 9단의 두 판 기념대국. 조치훈은 한국인이었으나 일본바둑을 대표하는 기사였고 조훈현은 한국바둑 9관왕이었다. 그때도 12월이었다. 한 판은 각자 3시간 장고바둑, 또 한 판은 KBS 스튜디오에서 속기로 두었다.

이때까지도 일본바둑은 여전히 세계 최강, 최고로 인정받고 있을 때이긴 했다. 그렇긴 하나 조훈현에게 조치훈은 네 살 연하의 후배였고 일본기원 소속기사로 뛸 때에는 줄곧 한발 앞서 달리다가 군복무로 귀국한 처지였다. 이후 각자 한국과 일본에서 정상에 오르는 동안 긴 시간 만날 기회가 없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 수 있는 상황이긴 했으나, 조훈현으로선 내심 1:1까지는 생각했어도 0:2로 밀릴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두 판 다 졌다. 무엇보다 한국바둑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기에 뼈아팠다.

▲ 1980년 명인에 오르면 일본바둑 정상에 선 조치훈 9단은 그해 12월 28일 일시 귀국했다. “명인(名人)이 되고 난 뒤 고국 땅을 밟겠다”고 말하던 그였고, 금의환향이었다. 29일에는 청와대에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31일 서울 롯데호텔 34층 31호실에 꾸린 특별대국실에서 제한시간 5시간의, 마침내 조훈현-조치훈 양웅이 '진검'으로 맞서는 승부를 펼쳤다.
비록 공식대국이 아닌 기념대국이었으나 한일을 대표하는 정상대결이었고 "누가 더 센가?" 초미의 관심사에 답을 주는 한판이었다. 오전 9시에 시작한 대국은 저녁 8시가 되어 끝났다. 1차전은 일본 명인 조치훈이 196수 만에 흑 3집반을 이겼다.

▲ "조치훈이 더 센가?" 해를 넘겨 1981년 1월 2일 조-조 2차전이 속개되었다. 이번에는 KBS 스튜디오에서 제한시간 30분씩 주어진 속기대결. 생중계를 한 노영하 해설위원은 “명인 조치훈과 한국의 전관왕 조훈현 8단(당시)이 새해 첫날 펼친 기념대국을 KBS가 국내 지상파 방송 사상 첫 생중계했다”며 “2시간 동안 진행된 당시 중계방송은 최장 생중계 기록으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고 후일 말할 만큼 한일 양국의 폭발적인 관심을 끈 대결이었다.
한국의 바둑관계자들은 조훈현 8단이 2차전을 이겨 1:1 화국으로 승부가 끝나길 고대했으나 결과는 254수 끝, 백 5집반, 이번에도 조치훈 명인의 승리로 끝났다. 2:0으로 진 조훈현 8단으로선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게다가 추후 드러난 대국료 차등지급 문제는 조훈현 9단의 자존심을 두 번 짓밟는 꼴이 됐다. 조치훈 9단이 조훈현보다 열 배나 많은 대국료를 받았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초청한 KBS에서는 조치훈 일행의 체재비를 포함한 액수였다고 해명했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오래전 일이고 한국기원이 밝힌 적이 없어 정확하지는 않으나 조훈현 九단이 받은 대국료는 300만 원인가 500만 원인가 그쯤이었다고 들었다). 그때의 패배에 더해 차별대우까지 당한 한국 일인자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박치문 중앙일보 전문위원의 목격담이 생생하게 대변해 준다.

(박치문 위원) “1980년 12월 그해 제야의 종을 치던 그 무렵이었을 거야. 김인 국수, 이준학 사범과 같이 관철동 골목에서 술을 마시는데 불쑥 조훈현 9단이 합석했어. 그러더니 소주 반잔인가 그 이상인가 홀짝 털어넣더라고. 체질적으로 박카스만 마셔도 취한다는 사람이 말야. 다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거든. 그러고선 먼저 나가더라고.

그리고 우리 일행은 술집에서 나와 종로 한국기원 건너편에 있는 한평여관에 자러 들어갔는데, 그날 내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왔던가 하여간 밖에 나왔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여관 벽을 더듬대며 잡았다가는 비껴 쓰러지고 그러고 있더라고. 가만히 보니까 조훈현이야. 집안내력이 술을 마시면 눈이 흐릿해 안 보이는 유전적 체질을 타고났다고 그래.

취기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조훈현을 얼른 여관방에 데리고 들어갔던 그날 일이 지금도 생생해. 못 마시는 술을 입에 담을 정도로 승부사로서 자존심 상했고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얘기지. 조치훈에게 진 후유증으로 이후 서봉수에게 타이틀을 내리 3개인가 빼앗겼을 걸 아마.”

▲ 비공개대국으로 열린 한국 일인자 김인 국수 대 일본 일인자 린하이펑 본인방의 1차전. 1968년 12월 4일 세종호텔에서 펼친 이 대결은 덤이 없는 정선 대국으로 두었다. 결과는 김인 국수가 한국바둑의 힘을 보여주며 273수 만에 흑 3집승을 거둬 자존심을 지켰다.

1968년 12월 4일 세종호텔에서 비공개로 둔 1차전은 각자 제한시간 3시간 바둑이었고 이후 각 30분으로 치른 두 판 공개대국에 견주면 서로 전력을 다한 ‘정면대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인 9단은 정선 치수로 맞서기는 했으나 중반 난전에 돌입해 묵중한 힘을 발휘하면서 3집을 남겼다. 완력을 조율해 가며 완승에 가까운 실력을 보임으로써 한국바둑의 저력을 과시했다.(아래 총보1 참조)

참고로 이틀 뒤 준속기(제한시간 30분)로 둔 2차전(덤 4호반 맞바둑)에서는 흑으로 6집반을 져 1승 1패를 거뒀고(아래 총보2 참조), 3차전에 나선 조남철 8단은 의욕적인 세력바둑을 펼쳤으나 132수 만에 흑 불계패를 당했다.

▲ 이틀 뒤 12월 6일 세종호텔 해금강홀에 공개대국장을 설치하고 팬들 앞에서 오픈대국으로 펼친 2차전. 이번에는 제한시간 각 30분에 덤 4집반, 맞바둑으로 겨뤄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아쉽게 흑을 쥐고 6집반을 졌다.

▲ 명인 조남철 8단(왼쪽)과 린하이펑 본인방의 대국은 12월 7일 부산 동주여고 강당에서 열렸다. 이 대국은 제한시간 각 30분에 덤 4집반의 맞바둑, 이 역시 공개대국으로 뒀다.

그러고 보면 안영이 선생은 프로기사 김인의 처음과 끝에 있었던 사람이다. 역으로 김인 국수 또한 안영이의 바둑인생을 있게 한 ‘인연’이었다. 흡사 연리지(連理枝)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한평생 이어간 두 사람의 ‘바둑인연’에 대해서 [월간바둑] 2월호에 더 소개하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총보1/ 동아일보 주최 린하이펑 9단 초청 비공개대국>
○ 백 本因坊 린하이펑 9단
● 정선 國手 김인 6단
<1968. 12. 4, 세종호텔, 제한시간 각 3시간, 273수 끝, 흑 3집승>


<총보2/ 동아일보 주최 린하이펑 9단 초청 공개대국>
○ 백 本因坊 린하이펑 9단
● 흑 國手 김인 6단
<1968. 12. 6, 세종호텔 해금강홀, 제한시간 각 30분 덤 4집반, 202수 이하 줄임, 백 6집반승>



월간바둑 PDF홈페이지에서는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월간바둑 과월호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PDF를 보시는 방법은,
1) 월간바둑 홈페이지의 상단메뉴에서 [과월호보기]로 들어가
2) 목차/표지 검색을 통해 구독하고 싶은 잡지를 클릭한 다음
3) 목차내용을 통해 보고 싶은 꼭지를 보시면 됩니다.

○● 월간바둑 홈페이지 과월호 보러가기
 ☜ 클릭

  • 페이스북
  • 구글+
  • 카카오스토리+
  • 이메일
  • 트위터
┃꼬릿글 쓰기 동감순 | 최신순    
윤실수 |  2023-01-23 오후 5:27:00  [동감1]    
자존심 얘기가 나왔기에 한마디 하자면 요즘 설날이 왜 chinese new year냐고 항의하는
한국인들이 많더군요. 여기서
차이니스란 국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아시아의
新正이란 뜻이지요. 중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대국일뿐 아니라 역사
또한 가장 깊기에
아시아 적인것을 싸잡아 chinese라고 부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동해가 일본해로 불리우는
것도 일본인
들이 부탁해서 그런게 아니고 일본이 이미 1600년대에 유럽과 개항을 했
기에 자연스럽게 굳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바둑이
서구에서 GO라고 불리우듯 음력
설도 CHINESE NEW YEAR라고 불리우는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HIHIHI 간교한 자여! 그대 말의 핵심은 chinese new year나 바둑이 서구에서 GO라고 불린다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해를 일본해라고 부르자고 주장한 자신의 말에 대한 궁색한 너스레에 불과하다.그래서 내가 당신을 교활한 견강부회의 대가이자 후안무치한 인간으로 규정했었지. 당신이 진정 대한민국인이라면 일본놈들이야 동해를 어떻게 호칭을 하든 말든 단군 이래 반만년 동안 우리민족이 사용해 온 '동해'를 고수해야 할 처지가 아닌가?  
대원경 일제사기꾼놈, 또 정초부터 왜 또 헛소리 짖는데....야 네이버 영어사전 "설날" 치고 들어가 봐라," Lunar New Year's Day "로 명확하게 나온다. 누가 설날을 chinese new year라고 하더냐??? 그건 네 썰이다. 서울대 깡 통아. 그리고 16세기까지도 서양에는 동해를 "oriental sea" "Sea of korea"라 불리었다. 그것이 19세기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하면서 일본제국이 건설되면서 부터 "sea of Japan"이 등장한 것이다. 다게시마도 이때 등장한 것이다. 원래 석도다. 최근 CIA에서 또 "일본해"라고 표기한 모양인데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바로 잡아 야 한다. 그런데 현정부가 그럴능력이 있겠느냐???바둑도 중국에서는 절대 "GO"라 안한다. 제발 그럴것이다라 는 막연한 생각가지고 마치 사실인양 짖어대지 마라. 창피하다. 민족의 수치여!  
캐쉬리 |  2023-01-22 오후 10:36:00  [동감0]    
세계최강자에게 대국료좀 더준게 그리 문제인가 ㅎㅎ 당시 같은 금액으로 했고, 한쪽은 엔 한쪽은 원으로 받아서 당시 환율로
대략 4~5배 정도 차이였다는게 정설, 이게 또 지금 환율로 계산해서 10배라고 ㅎㅎ
워러04 |  2023-01-22 오후 10:18:00  [동감0]    
워렌버핏이 울고 갈 정도의 가치투자의 달인이십니다 그려 ^^
안선생님의 기를 받아 올해는 가즈아~~!!!!
아이8 |  2023-01-22 오후 10:08:00  [동감0]    
바둑 데극에서 중국기사가 최초로 치팅 (컨닝) 이란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화장실을 들락 거리며 핸드폰 인터넷을
통하여 놓아보기를 한 다든가? 복기를 헤본 다든가 또다른 인공 지능 기능이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전에는 신
진서와 중국기사와에 세계대결에서 컴퓨터에 에러로 신진서가 바둑돌이 잘못 놓여진 것을 중국 기원이 강행 처리
한 일도 있지만 그러고 보면 중국이 승부욕으로 비 매너 행위를 했다 볼수 있씁니다 그당시는 신진거 대극 뿐
아니라 우리가 바둑을 들때도 대극중 화면 자막이 바뀌는 일은 흔한 일이었 씁니다 바둑을 뜨는 사람중에도 일
반 대극자는 대득중 복기하며 바둑 뜨는 사람도 많았지만 컴퓨터는 일 반인이 쓰기에 편리한 기능이 있음에도 결
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젼이야 한번사면 십년은 고장없이 쓰지만 컴퓨터는 고장이 질난다는 결함이
있고 컴퓨터에 사향에 따라 오래가는 컴퓨터도 있데요 피시방에 중고 컴퓨터는 구입할게 아닙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인류는 편리함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과거 이발소에서 남자는 남자머리만 깍던 시시절에는 여
자 미장원에서 낯설은 여자가 머리를 깍는게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씁니가만 남자와 여자가 화장실을 공용으
로 사용하며 여다가 쓰던 엉덩이에 남자가 갖다 댄다는게 어색하게 느껴 지기도 하였 씁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편리함을 추구하게 되었고 문명이 편리함은 인간에게 좋은 영향만을 준것은 나
닙니다 그중에는 침대라고 말하고 싶씁니다 자동차에 폭팔적 증가는 차들이 병목현상으로 통행이 원할하디 못
하고 차들이 정체 현상도 생기기도 하지만 그에따른 주차난도 심각 합니다 과거에는 차를 가진 다는건 개인들에
로망이었지만 현재는 차가 부럽지 않 고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괸찮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 미당원 가니 주인 아줌마가 얼마 쓰지않는 새 침대를 준다기애 나는 방이 비좁아 침대 놓을 동간이 없
다하여 세 침대를 쓰레기 통에 버렸 씁니다만 나는 공간이 넓다 하여도 침대 위에서는 자지는 않을 겁니다
침대가 폭신 폭신하여 좋은것 같지만 딱딱한 곳에서 자야 위에서 아래로 느르는 지압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아
픈 부위 쪽으로 늘러서 자면 오히려 지압이 되고 좋씁니다
야구소녀 |  2023-01-22 오후 4:33:00  [동감0]    
조치훈 (56 년생 잔나비띠 ), ㅡ 조훈현 (52 년생 용띠 ), 두 사람의 나이차는 딱 네살, 저 사진에 나온 두 기사 모두 저 당시가
최고의 전성기 라고 봐야 함, 사진에 보이는 조치훈 명인의 모습에서 엄청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econ |  2023-01-22 오후 4:31:00  [동감2]    
청년 이창호는 존경하는 기사로 스승이 아닌 임해봉 명인을 꼽았습니다. 인품을 존경했다죠. 그래서인지 공식대국은 이겼지만
비공식 대국은 ...공식대국의 경우 백으로 두집을 남겼다는 야근데..
윤실수 |  2023-01-22 오후 4:24:00  [동감2]    
안영이 선생을 개명까지 하게한 장본인인 일본의 바둑평론가 安영일 은 누구일까요?
후지사와가 명인시절 안영일씨와 대국을 하였는데 호각이었다고 한다. 후지사와는 -이 정도 실력이면 프로로 전향하시죠?
-라고 극찬했더니 -나는 바둑은 그냥 취미로 하렵니다-라고 사양했다고..
안씨는 바둑계 최초의 평론가라 할수 있는데 박학다식했던 만물박사. 사까다가 15세경 훈수를 하다 안씨에게 뺨을 맞은 사
건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정용진 편집장이 청년 이세돌을 훈계할 때도 이 일화를 인용했을 정도.
야구소녀 |  2023-01-22 오후 3:27:00  [동감0]    
조남철 ㅡ 조치훈의 대국은 작은 아버지 (숙부) ㅡ 조카간의 대결 이네요, ㅋㅋ 조치훈사범은 전북 부안 출신,
야구소녀 |  2023-01-22 오후 3:20:00  [동감0]    
조남철 선생과 ㅡ 조치훈의 대국은 제가 못봐서 기사를 보고 처음 알았네요, 그리고 며칠후엔 당시 우리나라 여류국수(아
마) 였던 김영 아마5단과 조치훈의 4점 지도 대국도 열렸지요, 혹시 그 사진도 있으신지요 ? 제 기억 으로는 4점 인데도 나
중에 대마가 다 잡히면서 참패로 끝났지요, ㅋㅋ 아무리 여자기사,아마 여류국수라 해도 4점 깔고 두는것도 너무 많다 싶었
는데 그 정도 실력 차이가 나는거 보고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ㅋㅋ
야구소녀 글쓴이 삭제
야구소녀 KBS 노영하 9단 사범, 해설이 참 좋았었구요, 김영씨는 왼손 잡이 였던걸로 기억, ㅋㅋㅋ  
야구소녀 김영 당시 여류국수, 한복을 아주 곱게, 예쁘게 차려 입고 조치훈 명인과 대국 하는 모습이 너무 아릅다웠던걸 로 기억 합니다,  
야구소녀 |  2023-01-22 오후 3:17:00  [동감0]    
조치훈 ㅡ 조훈현 두차례 비공식 대국 ㅡ 당시엔 정말 대단한 사건 이었지요, 최대의 이슈 였구요, 3집반 타이 / 그리고 반
면 빅 ㅡ 덤차이, 5집반 승 ㅡ 모두 조치훈의 승리 였죠, 한국 ㅡ 일본의 최정상급들간의 실력 차이를 다시 확인 시켜 준것
도 맞습니다, 한가지 기억 나는건, 당시 KBS 생중계 (두차례 모두) 중이었음에도 조훈현이 연신 줄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이게 나중에 상당한 비난을 받기도 했었지요, 아무리 그때라 해도 대국중 함부로 담배를 피울수 있는건 절
대 아니었습니다, 옥의 티라고 할까요??
야구소녀 |  2023-01-22 오후 3:12:00  [동감0]    
안영이 선생님의 좋은 글, 사진, 기사, 정말 재미 있네요,
저런 진귀한 사진들은 어디서 구하셨나요 ? 김인 국수도 그렇고 80년말 조치훈 명인 타이틀 쟁취후 방한 ㅡ 조훈현과 2번기 가
진거 . 굉장히 오랜만에 접하네요, 혹시 그때 기보도 좀 볼수 있을까요 ??
FirstPage PrevBlock   1   NextBlock LastPage












* 띄어쓰기 포함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000 / 400바이트)
대국실입장하기
다운로드 이용안내 고객센터
정회원가입
오로볼구매
가장 많이 본 기사
스폰서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