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두터움, 반상의 심리적 이해
불안과 두터움, 반상의 심리적 이해
문용직의 '두터움 특강' - 마지막 총정리편
[한가위 기획/특집] 문용직  2015-09-30 오전 09:18   [프린트]
▲ 흑이냐 백이냐. 기실, 승부사의 불안은 돌가리기 이전,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세상에 태어나니, 어릴 때 엄마 품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모든 때가 불안으로 쌓여 있다. 반상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진/일본기원>


2015 을미년(乙未年) 설특집으로 ‘두터움’에 대한 6편의 문용직 박사 특강을 연재한 바 있다. 그간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 자리했던 ‘두터움’의 실체를 구체적이고 뚜렷한 이론으로 설명한 문박사의 특강에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고, 더 연재해 달라는 요청에 한가위를 맞아 한번 더 특집으로 꾸민다. 문용직 박사의 두터움 강의는 사이버오로 회원들께서 수시로 음미할 수 있도록 추후 별도의 강좌코너로 전편을 묶을 예정이다. - 편집자 주.

특강1 - 두터움은 신비한 세계가 아니다 ☜ 바로보기 클릭
특강2 - 형상과 감성에서 두터움이 나오다 ☜ 바로보기 클릭
특강3 - 형상과 변주를 오가면서 인식을 확장하다 ☜ 바로보기 클릭
특강4 - 단순한 형상은 본래 두텁다 ☜ 바로보기 클릭
특강5 - 중앙에서의 가벼운 세모, 만드는 이치 ☜ 바로보기 클릭
특강6 - 두터움과 세모의 확장이 포석의 길이다 ☜ 바로보기 클릭
특강7 - 반상의 생명은 폭과 너비에 있다 : 후지사와와 유창혁의 두터움☜ 클릭
특강8 - 안정과 균형의 화음 : 기타니의 한칸, 다까가와의 한칸 ☜ 바로보기 클릭
특강9 - 자연에 대한 대조되는 입장 : 임해봉과 다께미야 ☜ 바로보기 클릭
특강10 - 생명력은 감성의 적극적 표현에 있다 : 사까다와 조훈현 ☜ 바로보기 클릭
특강11 - 감성의 억제와 균형의 세계 : 이창호와 요다 ☜ 바로보기 클릭
특강12 - 불안과 두터움, 반상의 심리적 이해



한가위 특집 - 두터움 특강(마지막편)
불안과 두터움, 반상의 심리적 이해


나이가 드니 자신도 모르게 뭔가 철학적인 용어가 나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글을 썼다.

바둑의 설명에서 모호한 용어 쓸 이유 있으랴, 그런 심정이야 있었다.

바둑은 형상의 세계.
그 어느 용어도 그 어느 감정도 형상을 벗어나서 저 홀로 자신을 드러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대국자는 사람.
사람의 문제가 바둑에는 도사리고 있다.
그러니 바둑은 의식, 심리, 시대적 조건, … 그런 것들이 뒤섞여 성립되고 발전될 수밖에 없다.

두터움이 현대에 와서 반상의 큰 문제가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이버오로 칼럼에 글 쓴 적이 있다.
2012년 1월 1일. 수법의 경계 중 “두터움은 어디에서 왔나”
참고하시기 바란다.


1. 불만이 있다

꽤 오래 전의 일이다.
<1도>를 앞에 두고 강의할 때가 있었다.

▼ <1도> 여기서부터 30수를 보여달라면?

1도(모호한 초반을 인정하기 싫다)

백1에 대한 흑의 응수를 두고 수강생 한 분이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30수만 제시해주시겠습니까?”

저 <1도>에서 흑이 둘 수, 그리고 백의 대책을 합해서, 백1 이후의 30수를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놀랐다. 아니, 당황했다.

“음, 지금부터 30수라…”
난처함과 당혹감이 겹쳐졌다.
“그런 수는 없습니다. 두세 수도 말씀드리기 힘들고…. 단지 두세 가지 가능한 착상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순간, 수강생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니, 실망스런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백1 이후 두어야 할 수를 말해 주십시오.”


2. 반상에 도사린 두 문제

수강생의 입장에서 <1도> 백1과 관련한 문제를 요약하면 이렇다.

1) 반상에는 답이 있다. 왜 프로들은 속 시원히 가르쳐주지 않는가.
2) 확실한 것을 가르쳐 달라. 10수 정도는 애매하다. 두세 수는 안개와 같다. 안개는 싫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바둑의 문제일까. 아니면 강사의 문제일까.
기사들은 숨기지 않는다. 숨길 것도 없다.

“아무도 주먹을 쥐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미심쩍은 인상이다. 왜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걸까.
수강생 15명 대부분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불만이다. 실력 늘려고 프로에게 지도를 받는데, 시간과 수업료를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기대만큼 시원하지도 않다.

자, 무엇이 문제일까. 현상은 이리 드러난다.

1) 바둑에는 많은 경우 답이 없거나 있어도 모호하다. 그러나 이건 불만이다.
2) 바둑을 두는 사람은-나이가 많건 적건-불안하다.

문제는 이상의 둘로 요약된다.


3. 바둑은 이런 것,
이해는 부족하고 합의도 없다


수강생도 강사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서로 간에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대한, 그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한 이해와 합의가 부족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특정 수강생의 문제만이 아니다.
반상은 이런 것이다,라는 그 점에 대한 합의가 없다.

그러니 어떠한 강의를 해도 어떠한 강의를 들어도 아쉬움은 남는다.

“아니 내가 기대한 강의는 그것이 아닌데… 선생은 무성의하다.”
“아니, 이 정도를 가르쳤는데도 여전히 못 알아듣는구나. 재주가 없구나.”

반상을 대할 때 우린 다음 두 가지 점에 대해서 애써 무관심하다. 아니, 오히려 애써 모른다.

1) 모호한 것은 싫다.
2) 불안은 싫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바둑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둑 애호가의 문제만도 아니며, 현대인의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이렇다. 인간의 문제다.
그렇다. 인간이면 피하기 힘든 그런 문제다.


4. 인간,
불안에서 도피하고 싶다


세상에 태어나니, 어릴 때 엄마 품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모든 때가 불안으로 쌓여 있다.
자신(ego)과 세상은 서로 다른 존재. 그러니 세상은 두렵다.

여기 “현재의 내”가 있으니 “과거의 나”도 있고 “미래의 나”도 있으리라는 느낌.
아, 그런데 미래의 시간에는 “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과 시간을 지배하려 한다.
지배하지 않으면 두렵다. 미래엔 죽을 것이고,
인정하긴 싫지만 지금까지 보면 예외는 없는 듯하다. 성인도 예언자도 모두가 죽었다.
그래서 통제를 지향한다. 통제 못하는 것은 불안하다.
미래의 나를 생각하면, 10분은 물론이고 1시간 정도의 통제는 불안을 완화시켜주지 못한다.


▲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흔들리지 않고, 냉철하고, 확실할 것 같은 승부사 이창호. 하지만 그도 인간인 이상 승부 앞에 늘 컴컴한 밤길을 걷는 듯 불안하고 안개호수를 대한 듯 모호하고 갈대처럼 흔들리며 서걱인다. 인간은 본시 불안에서 도피하고 싶고, 하여 불안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5. 반상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불안하다

반상이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가 바둑을 배우는 까닭은 통제를 하기 위한 것.
돈과 시간을 들여서 바둑TV 앞에 앉고 인터넷 강의 들으며 프로를 찾아다니는 까닭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것.

그런데 왜 강사는 통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거냐?
프로들 보니까 뭐, 훤히 다 아는 거 같더군.

특히 지식이 좀 있는 분들에게서는 더욱 더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건 오해다.
프로들은 다 알지 못한다. 일부만 안다.
그 앎의 범위는 아마추어의 기대를 크게 넘어서지 못한다. 기대에 못 미쳐 부족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바둑을 배울 때 먼저 수긍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반상의 조건이다.

19줄 격자무늬로 이뤄진 것이 반상이라는 조건.
흑과 백이 번갈아 둔다는 조건.
조건은 많다. 6집반 덤도 조건이며, 패는 바로 따낼 수 없다는 것도 조건이다.

이 글이 강조하고픈 것은, 반상의 본질이다.
반상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불안하다.


6. 불안의 경계선, 모호함의 경계선이 있다

이리 생각한다.
만약 반상에 답이 그것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답이 있다면, 그 반상은 재미가 없을 것이다. 결정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답이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재미가 없을 것이다. 노력해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바둑 역사 3천년에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먼저 <2도>. 저런 초반엔 답이 없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정답은 없다.
그러나 고수라면 동의할 여지가 높은, 서로 간의 합의에 의한 답은 있다.
단, 그 답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제한이 주어져 있다.

▼ <2도> 다음의 한수? 당신의 선택은?

2도(다음 흑에게 답은 있는가?)
이런 장면 만나면 우리는 어떻게 답을 찾을까?
갑자기 눈앞에 넓은 대지가 솟아올랐다고 가정해보라.

자, 다음수를 요구하실 테니 그럼 어디가 답일까? 한번 추측해 볼까.

1900년 이전 중국이라면 <3도>가 답으로,
2000년 이후 한국이라면 <4도>가 답으로 주어질 것이고 또 대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 <3도> 1900년 이전 중국에서의 바둑이라면

3도(고대 중국의 답, 싸움바둑이니까)
고대 중국은 바둑을 전쟁의 모형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이렇다. 싸우는 것을 당연하다 생각한다. 그것이 전쟁의 모형에 맞는 행동이니까.
아마도 답은 여기 흑1 침입일 것이다.

▼ <4도> 2000년 이후 한국에서의 바둑이라면

4도(현대의 답, 중앙지향적인 공간을 얻고자 한다)
오늘의 바둑 모형도 전쟁이긴 하다.
그러나 그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고대 중국과 다른 차원에 있다.
고대 중국은 바둑에서도 국가 간 전쟁처럼 권모술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둑을 설명함에도 덕(德)이니 의(義)니 하는 관념을 도입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전쟁은 전쟁이되 반상 위의 논리, 놀이로서의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 입장에서 보면 여기 흑1을 답으로 해도 고수 명인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5도>와 같이, 논리로 계산할 수 있는 중반 국면이 주어진다면 명확한 답을 말할 수 있을까.

▼ <5도> 이런 국면에서라면 명확한 답을 드릴 수 있다

5도(중반, 논리로 계산할 수 있는 경우)
<2도>와 비교해 <5도>는 답이 달리 주어진다.
모호한 듯 보이지만, 그러나 이런 경우엔 사활처럼 답이 있다.
합의가 아니라 논리적인 답이 있다.

흑1이 빈삼각의 묘수다.
흑1을 A로 뻗는 것은 백B, 흑C, 백D로 끊기지만, 이제는 오른쪽으로도 연결하고 B와 C를 맞봐 왼쪽으로도 진출한다.


왜 그럴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것이 정의일까.
정답은 없되 시대에 따라 다른 답은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개인적 이해가 주된 요소가 될 것이고, 원시공동체 시대에는 함께 나누어 쓰는 것이 정의의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약돌 2개를 주어서 이 2개가 몇 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시대에나 다를 바 없이 2개라고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바둑도 그러하다. 초반은 모호하다.
그러기에 합의된 바 문화적인 논리가 힘을 쓴다.
그러나 사활이나 맥 등 논리적 추론이 가능한 영역은 모호하지 않다. 논리가 답이 된다.

왜 그런가.
다시 한 번 <2도>와 <5도>를 돌아보자.

<2도>에는 돌의 제약이 없다.
반상에 돌이 놓여질 공간이 넓다. 돌에 자유가 주어진다.

<5도>에는 돌에 제약이 많다.
돌 주변이 좁다. 돌에 제한이 주어진다.


7. 프로는 자유의 한계를 공부했다

앞서 어느 수강생 이야기를 했었다.
그 분은 바둑의 본질과 한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왜 자신에게만 인생의 한계가 있는 거야? 둘러보면 다들 잘 살고만 있는데 말야.
오해다. 굳이 그 점을 여기서 중언할 필요는 없으리.

그 분은 불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정할 자유,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승이라면 그것을 다 넘어서겠거니, 하는 그런 거. 그런 희망. 그런 신화.
그것에 기대고 싶었다.

현자들은 모든 답을 다 알고 있는 듯하다.
무슨 질문을 해도 한마디 던져준다. 알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오해일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제한된 부분만 알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바둑에서도 우린 제한된 부분만 안다. 그것으로 만족도 한다.
기원에서 고수들이 누리는 즐거움이 바로 그런 거 아닌가. 하수 앞에서는 언제나 만족스럽다.

그러나 오해는 말자.
다른 분야와 다를 바 없이 프로는 대단한 지식을 갖고 있다. 전문가란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0년은 해야 한다. 제대로 해야만 한다.
허구한날 기원 가서 10년 두었다고 전문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엉터리 될 수도 있다. 방향이 틀리면 10년 후 크게 어긋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둑에서 프로는 10년을 뭘 공부한 걸까?
앞서 <2도>와 <5도>를 어떻게 정리해 나갈 것인가?
바로 그 점을 공부했다.

요컨대 자유의 한계 속에서 그것을 긍정한 이후에
“그럼 우린 뭐하지?” 바로 그에 대한 답을 찾느라 10년을 공부한 것이다.

그것이다. 자유의 한계를 공부한 것이다.
앞서 말했다. 자유에는 불안이 따른다고. 그래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프로들은 불안을 공부한 것이다.


▲ 봉수의 순간. 이 순간 어떤 생각을 할까. 1995년 5월, 서울에서 벌어진 조치훈-가토의 본인방전 도전1국 첫날 봉수하는 장면. <사진/일본기원>

8. 불안을 공부한 프로가 아는 것은

불안을 인정한 프로들이 아는 것은 불안을 벗어나는 길이다.
이런 거 공부했다. 포석. 중반의 싸움기술. 사활. 맥. 행마법. 죽이고 버리되 얻는 법, 등등.

그것이 전부인가?
아니다. 이런 것도 했다.

집을 많이 얻는 법 중에서, 지금 많이 얻는 법. 나중에 많이 얻는 법.

더 들어가 이런 것도 했다.
불안하면 멀리 못 보니까 불안을 잠재우는 법.

불안을 잠재우는 법.
그러나 대국 전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법이나 대국 때 자신을 환기시키는 법, 그런 것을 공부한 것은 아니다.

바둑은 쉬운 세계가 아니다.
만약 쉬운 세상이라면 그건 우리 자신을 가볍게 보는 처사와 다를 바 없다.

우리의 손과 몸의 기술이 들어가고(이것이 바로 수법이라는 단어에서 手와 法의 뜻을 가끔은 되새겨야 할 이유일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개입되는데, 만약 그것이 쉽다면, 우린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대단한 통제력을 갖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이 복잡하고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린 우리가 대단한 존재라고 믿는다.

바둑에 기술이 있다.
마음 운운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마음과 기술(순수하게 논리적인)이 혼합된 그런 기술이 있다. 마음과 기술을 적절하게 잘 배합하면, 불안을 잠재우는데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있다.


9. 두터움과 불안은 동전의 양면

이 글이 강조하고 싶은 지점에 왔다.

두터움은 불안의 평정에 좋은 기술이다.
두터움은 불안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수법은 몸에 익히기만 한다면 반상에 큰 영향력을 미치므로 불안의 치유에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다.

두점머리 두드리는 기술만 잘 익혀도,
중앙으로 한칸 뛰는 기술만 잘 익혀도
1급은 어렵지 않다.
그러면 2급 이하는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2급까지만 만나면 불안은 없다.

그러나 두터움의 이해 없이 반상의 불안을 통제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바둑에 두 영역이 있다.
1) 이론적 이해 가능한 영역,
2) 반복과 집중으로 체득 가능한 영역

두터움은 두 영역 모두에 걸쳐 있는 것이지만, 그래서 어렵다고 알려져 있지만, 몸으로만 체득이 가능한 수읽기의 영역과는 차원이 다른 영역이다. 이론적인 검토와 반성(反省)으로 의식적으로 진보가 가능한 영역이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두터움을 아는데 애로를 가진 프로도 없지 않았다.
두터움을 잘 모르면 집으로만 반상의 형세를 판단한다. 그 결과 형세판단의 힘이 부족했다.

그 언젠가 아마추어와 3점 접바둑을 두었는데,
그 분은 초반에 돌을 벌리기만 하면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6도>가 그것이다.

▼ <6도> 벌리면 다 집인가?

6도(2점 접바둑, 흑은 집으로만 판단)
국후 들으니, 흑1을 턱하니 놓는데 백2가 오니 놀랐다는 것이다. 흑집에 들어오다니!
그래서 흑3, 잡으러 갔다는 것이다. 하하. 덕분에 백은 A, 흑B, 백C로 아주 유리해졌다.

말씀드렸다. 집이 될 가능성만 높을 뿐입니다!


집 위주로 반상을 판단하면 다음과 같은 심리 속에 들어가기 쉽지 않나 한다.

상대의 세력이나 발전성은 아니 보고 자신과 타인의 집만 보게 되는데,
유불리와 승부에의 강박이 강해진다.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판단이 단순하게 되는 것이다.

기준을 하나만 잡는 것은 깊이와 넓이를 좁게 하고 옅게 한다,
그러면 이겨야한다는 강박은 더욱 강해진다, 1집 2집이 아니라 30집은 유리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지만 바둑에는 집만이 아니라 다른 가치 높은 기준도 많다.
세력이나 두터움은 다른 기준.

우린 저마다 다른 가치를 존중하며 살고 있다. 반상 또한 그렇다. 상대는 바본가!

후지사와 선생이 “상대를 공경하라” 말씀했는데 과연 반상의 이해가 깊은 기사임을 알겠다.

▼ <7도> 두터움을 알았다면

7도(두점, 만약 두터움을 알았다면)
앞서 <6도> 흑 잡은 분이 두터움을 알았다면 여기 흑1이 아주 좋은 자리임을 알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흑1이 아니라 한줄 좁혀 A도 두고 싶었을 것이다.

▼ <8도> 이때도 흑1 밀었을 것이다, 두터움을 알았다면

8도(두점, 두터움을 알았다면)
아니다. 여기 흑1 밀었을 것이다.
두터움을 알았다면 <6도> 흑3이 아니라 여기 흑1을 두었을 것이다.


바둑은 욕심이 적어야 수가 넓게 보이는 세상이다.
왜 그런가. 모호한 세상이라서 그렇다.

물론 이겨야 한다는 욕심이 적으면 고수가 될 수 없다.
명인이야말로 욕심투성이일지 모른다.
그러나 둘 때만은 상대를 인정하고 반상의 깊이를 인정해야 한다.

반상을 보다 폭넓게 알면 조급한 마음은 실로 많이 줄어든다.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부정할 것은 부정하게 된다. 인정(認定)의 폭이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까닭 없는 불안은 사라진다.

바로 그것이다. 까닭 없는 불안이 사라진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두터움은 불안의 평정에 좋은 기술이다.

두터움의 본질은 안정(근거)과 발전성.
그러므로 두터운 수법은 대국시에 마음을 크게 안정시켜준다.

따라서 말할 수 있다.
두터움은 불안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이라고.

이 정도다. 반상에 길은 이 정도다.

만족 못하시는 분들도 있으리. 그러나 그 분들께는 이리 말씀드리고 싶다.

“조급하신 겁니다.” “불안을 참지 못하시는 겁니다.” “불안하다는 생각 속에서 그 생각을 현실이라고 보고 계신 겁니다.”


이상으로 두터움에 대한 두 번째 이해를 마친다.
부족한 글 읽어주신 데 큰 감사드린다.

본 강의는 이것으로 설특집 1부와 추석특집 2부, 모두 12편으로 매조지했다. 그리고 다음 한 편 더 있다. 앞서 다께미야 9단 바둑에 대해 따로 더 말씀 드리겠다는 약속대로 보너스 특강 준비한다. 보너스 특강은 [문용직의 두터움] 별도코너를 마련하고 지금까지 12편을 모두 모아 두고두고 보실 수 있게 준비가 되었을 때, 페이지 오픈하는 날 올리겠다. 오래 기다리시지 않도록 하겠다. 감사!

┃꼬릿글 쓰기 동감순 | 최신순    
youngpan |  2015-10-01 오전 1:26:00  [동감0]    
맛깔나는 강의입니다! 두터움이란 아마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죠!
초반의 변화는 10의 700승 이상입니다. 1수 두어갈때마다 무한변이 있으니 어렵죠....특히
초반은 프로도 설계하기 어려움은 여전하단....이야기죠!
원술랑 |  2015-09-30 오후 8:34:00  [동감0]    
댓글을 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21세기 반상(盤上)의 위대한 형이상학자 문용직 박사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백1은 우아한 공격이다. 백돌 두점(△)을 모으면서 하나의 원을 그리고자 하니, 매우 아름답다. 심미안이 행복하다. -문용직의 두터움의 특강(3)> 심미안이 행복하다니? 가히 예술의 궁극 고처(高處)에 가 닿을 만한 깨달음과 희열이 느껴진다. 멋부리지 않은 듯한 멋스러운 풍모를 지닌 작은 오청원이여! 그대의 영역 성취는 고아(高雅)하고 명징(明澄)하고 후박(厚朴)하다. 반상(盤上) 해석의 신기원을 이룩한 상아탑이여! 어찌 그리 높고 아름다운가! 읽는 내내 행복했다. 반상(盤上)의 시적 재미를 톡톡히 맛봤다. 두모는 일견 낯선 듯 보였지만 세모, 네모를 이해하는 순간 앞길이 훤히 트였다. 이번 한가위 기획 특집으로 꾸며진 문용직 선생의 <두터움 특강>은 한마디로 말해 반상(盤上)의 진수(眞髓) 그 자체였다. 선생은 기계(棋界) 최초로 반상(盤上)의 반추상(半抽象)같은 회화(?)를 펼쳐놓고 서설하신 실로 대한민국 위기(圍碁)의 큰 보배이시다. 나는 반상(盤上)의 두터움을 열심히 되새김질해 보련다. 조선 최고의 독서가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 선생처럼!
거북이일등 원술랑 님, 반갑습니다. 휴가(!)도 잘 보내셨고, 추석 명절도 잘 보내셨겠지요? 계속 원술랑 님의 글을 접하기를 희망합니다.  
원술랑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께서도 가족끼리 오손도손 모여서 즐겁게 보내셨지요? 가족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덕담을 주고 받는 미풍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요 고마움입니다.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선생님의 크고 작은 모든 삶의 희락이 넘쳐나시길 빌겠어요! 오직 경복할 뿐입니다!  
거북이일등 감사합니다, 원술랑 님.  
맥스와산책 |  2015-09-30 오후 5:16:00  [동감0]    
사범님 글들은 꼭 책으로 출간되었으면 합니다.
바둑 기술을 넘어서 문학적이고 인생공부 같은 이야기들이라 무척 귀한 내용들입니다
맹골수로 |  2015-09-30 오후 5:06:00  [동감0]    
지금까지 이런류의 글은 본적이 없었습니다. 감사 ^^
하이디77 |  2015-09-30 오후 2:16:00  [동감0]    
정말 감사합니다. 쓰신 분은 말할 것도 없고, 기획하신 분에게도 감사합니다. ^^*
가만놔둬 |  2015-09-30 오전 11:57:00  [동감1]    
주옥같은 글 감사합니다. 항상 선생의 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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