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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바둑계 '故 천주더 추모 열기' 가득
5일 중국기원서 각계인사 1천명 운집해 고인 죽음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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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5일 중국 바둑계는 온통 슬픔에 잠겼다. 5일 오늘 오전 중국 베이징 중국기원에서 천주더 선생의 추모식이 열렸다. 중국 정부 인사 및 군 장성들도 대거 참석해 고인을 애도했다. 고인은 지난 1일 오후, 지병인 췌장암으로 베이징 자택에서 숨졌다. 5일 오전 중 약 1천명의 사람들이 천주더 사범의 추모식에 참여했다. 중국기원 2층 청사 중앙엔 故 천주더 선생의 사진이 걸려있다. 추모식장은 사회 각계에서 보내 온 추모의 화환으로 가득찼다. 현장은 경건했다. 녜워이핑은 바둑계를 대표하듯 맨 앞에 섰다. 그리고 1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천주더 선생의 사진 앞에서 3번 절을 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천주더는 문화혁명으로 인해 프로기사로서의 전성기를 마감했고, 이후 중국기원의 책임자로서 중국현대바둑에 많은 공헌을 했다. 현재 유행하는 '중국식 포석'은 50년 전 그의 연구로부터 출발했다는 게 중국바둑계의 자랑이기도 하다. 중국의 바둑원로 녜워이핑이 추모식이 끝난 뒤 기자들의 인터뷰를 받았다. 그는 현재의 심정이 한 없이 괴롭고, 비통하다” 라고 말했다. 녜워이핑은 . “천사범의 일생은 아무런 후회가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중국바둑에 자신의 최선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했다.1963년 중울 바둑 교류전에서 천주더 선생은 일본스기우치 마사오9단을 꺾었다. 중국 바둑 최초로 일본 프로 9단을 이긴 기록이다. 1965년에 이와타 다츠아키를 꺽었다. 중국 바둑이 세계 바둑계의 정상으로 떠오르게 만든 공로가 있다. 녜워이핑 또한 천주더 선생이 있어 우리(중국)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고 했다. 녜웨이핑은 “그 시대의 우리는 일본기사를 이길 수 없었다. 오히려 일본에게 배우는 단계였다. 그러나 천주더 선생이 나타나 일본을 따라 잡았다.”고 평가했다. 녜웨이핑과 천주더 선생과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선생이자 친구와도 같았다고 했다. 녜웨이핑의 말이다. “천주더는 제 선배고 제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에는 라이벌이고 됐고 나를 친구처럼 대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제한을 받는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까지는 도달 못 했지만 자신이 마주친 한계내에선 최고 수준엔 도달했다. 진정 많이 노력했었던 사람이다. 그는 아주 겸손했으며, 실로 신사의 품격을 갖춘 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번역 | 사이버오로 중국통신원 박위룡] [사진, 글 출처 | 시나바둑] ![]() ▲ 중국현대바둑의 1세대 프로기사, 문화혁명 전까지 그는 촉망받는 최고의 기사였다. ![]() ▲ 전성기 시절의 모습 ![]() ▲ 11월 5일 장례식장 녜웨이핑(맨 우측)이 보인다. ![]() ▲ 중국군 린지엔차오 장군, 많은 장성들이 추모식에 모습을 보였다. ![]() ▲ 콩지에가 유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 1천명이 동시에 세 번 절을 했다. ![]() ▲ 중국기원 2층에 마련된 추모(장례)식장 ![]() ▲ 조화에 글은 보내는 사람이 직접 쓴 것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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