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훈의 이쁜 초승달 두 개
박영훈의 이쁜 초승달 두 개
[N] 손종수  2002-10-27 오후 04:10   [프린트]


22일부터 25일까지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제4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1차대회는 예상치 못한 거물들의 조기 출전과 추락으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개막식 전야제에서 대진 추첨이 끝난 뒤 무대 위에 올라 '나의 목표는 4연승!!'이라고 기염을 토한 쪽은 중국의 구리(古力) 7단이었으나 정작 농심 신라면배 사상 첫 4연승을 기록한 쪽은 한국의 박영훈 3단이었다.

'구리 7단과는 교류전에서 만나 1패를 당했다. 이번에 국가대표로 선발되면서 구리 7단과 만나기를 바랬는데 이렇게 첫 상대로 겨루게 돼 기쁘다'는 말로 완곡하게 설욕의 의지를 밝힌 박3단은 대회 첫 출전, 첫 대국의 심리적 압박감을 통쾌한 완승으로 떨쳐버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몰랐다. 그 1승이 '베이징 대장정(大長征)'의 출발점이 되리라고는….

대회 이틀째, 대국 개시 30분 전까지 누구와 겨루게 될지 몰랐던 소년은 '상대가 일본 랭킹1위 왕리청(王立誠)'이라는 말에 놀라움 대신 안경 너머로 이쁜 초승달 두 개를 그렸다. 그리고는 툭 던진 한마디.
"왜 벌써 나왔대요?"

이 말은, 거물에 대한 두려움보다 '강자와 겨루게 돼 즐겁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있었다. 첫 대국에서 구리 7단을 꺾어 교류전의 빚을 갚음과 동시에 모든 심리적 부담을 떨쳐버린 소년에게 '일본 랭킹1위'는 더없이 즐거운 목표였던 것이다.

중반 한때의 위기를 무사히 넘긴 박3단은 기어이 일본 랭킹1위를 무너뜨리고 한국선수단을 역대 최약체로 평가하며 '이번이야말로 첫 우승의 기회'라고 벼르던 중·일 선수단을 긴장시켰다.
소년은 대국이 끝난 뒤 '일본 랭킹1위를 꺾은 소감이 어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대신 또 한번 안경 너머로 이쁜 초승달을 그렸다. 그 웃음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제 목표는 일본 랭킹1위가 아닌데요?"

대회 사흘째, 이번 상대는 소년보다, 한국선수단보다 국내외 기자들과 팬들을 더 놀라게 했다. 비록, 점수에 밀려 랭킹1위의 자리를 왕레이(王磊) 9단에게 넘겨주었으나 팬들에게는 여전히 '중국 최강자'로 인정받고 있는 젊은 기수 창하오(常昊) 9단이 나섰기 때문이다.

창9단의 때 이른 출전에 대한 견해는 각양각색이었다. '불붙기 시작한 한국의 기세를 꺾기 위한 것'이었든, '먼 선전까지 가서 두어야 하는 중국리그 대국보다는 가까운 베이징대국이 편해서'였든 대국은 소년의 완승으로 끝났다.

소년의 3연승은 내심 우승을 꿈꾸던 중국선수단에 '최강자 조기탈락'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최약체 비아냥의 대상이었던 한국선수단에는 '대회 4연패 유력'이라는 최상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국후, 검토실에서 이어진 인터뷰에는 첫 대국에 비해 2배로 늘어난 기자들이 일제히 녹음기를 들이밀었다. 좋은 부모, 좋은 생활환경은 이럴 때 빛이 나는 것일까. 소년은 1시간 가까이 질문공세에 시달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 질문을 하면 아예, 기다렸다는 듯 안경 너머로 이쁜 초승달 두 개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이창호와 비교될 만큼 말을 아끼는 바람에 원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기자들이 끝까지 호감을 보이며 승리를 축하해준 이유도 모두 그 웃음 때문일 것이다. 이튿날, 현지 스포츠신문은 전면을 할애해 이런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창하오마저도 한국의 꼬마를 막아내지 못했다."

대회 나흘째, 파죽지세로 3연승을 내달린 소년 앞에 더 이상의 장애는 없었다. 일본 신예최강그룹의 일원이며 속기강자라는 장쉬 7단도, 행운의 여신까지 거들어준 소년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소년은 초반의 열세를, 중반 대공세로 되돌린 뒤 종반 끝내기에서 상대의 작은 실수를 놓치지 않고 다그쳤다. 결과는 극적인 반집승.

다시 반복되는 국후 인터뷰. 소년의 웃음과 침묵은 계속되었다. '누가 가장 어려운 상대였느냐', '평소에도 그렇게 잘 웃느냐'는 질문에 소년이 보여준 답도 예외 없는 이쁜 초승달 두 개였다. 그러고 보니 소년이 대회기간 내내 기자들의 뇌리에 남겨준 인상깊은 말은 딱 이 한마디뿐인 것 같았다.
"아니, 뭐 그냥…"(그리고 웃음)

자연스러운 웃음이란, 부작용이 없는 감염바이러스와 같은 것. 소년의 주변에는 늘 즐거움에 감염된 사람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국 프로기단을 벅차게 한 것은 소년의 4연승이었지만 기자의 가슴을 벅차게 한 것은 소년이 만들어 올린 두 개의 이쁜 초승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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